나. 박해 와 순교
ㄱ. 신해박해(1791)와 을묘박해(1795)
윤지충은 1791년 5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8월에 장례를 치렀는데, 교회의 명령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유교의 성직자인 양반들에게 신앙화 된 유교식 제사의례를 거부하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조정은 윤지충과 그의 결정에 동조한 권상연의 행위를 조상제사가 상징하는 양반중심의 문화를 부정하고, 조선사회가 으뜸 가치로 존중하며 강조하던 효(孝)를 반대한 폐륜행위로 단정하여 극악무도한 윤리사범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오후 3시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을 받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두 순교자들의 목은 사형판결문에 따라 장대 끝에 매달아 놓고 지나는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9일 동안 전시하였다.(군문효시)
1794년 북경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여 1795년 1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4월 5일 부활축일에 미사를 봉헌하였다. 조선 천주교 창설이래 처음 거행된 미사였다. 주 신부는 4월(음), 전라도를 방문하여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 이존창의 집과 전주 유항검의 집을 방문하여 각각 몇일 동안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1795년 5월 12일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체포되어 주 신부의 잠입을 주도하고, 숨겨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다. 주 신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선교방법을 모색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