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정신사에 영향을 미친 인도의 성자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그가 알려지기 전까지 우리 나라에서 ‘요가’는 물구나무서기 하고 몸을 배배꼬는 그런 신체정신 훈련 정도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그의 자서전을 통해 고급 요가의 세계가 소개되면서 요가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많은 구도자들의 수행 방편으로 채택되었다. 상황은 급변하여 이젠 ‘요가’라는 이름만 들어도 금방 깨달음을 얻을 듯 구도자들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히말라야 설원에서 긴 머리 휘날리며 우주의식의 법열에 젖어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공상 속의 요기(요가수행자)들 중에는 오늘날 그 상상의 나래를 현실로 이룬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의 자서전은 너무도 유명하여 진지한 탐구자들 사이에서는, 정식 출판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번역하여 돌려 보며 구도의 정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깨달음을 얻어 스승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한 때 이런 풋내기의 과정을 거친 분들이 많다.
성자들과의 만남
요가난다의 일생은 기적적인 일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다. 1893년 인도의 고락크푸르에서 태어난 그는 십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구도의 길에 들어서, 인도 전역을 돌며 위대한 요기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몇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와미 프라나바난다. 두 개의 육신을 가진 성자. 그는 인간이 또 하나의 육신을 실체화시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요가난다에게 보여준다. “현상계의 미묘한 통일성도 참된 요기들에게는 감춰질 수 없다네. 나는 즉석에서 멀리 캘커타에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간다 바바. 그는 요가난다에게 물질창조의 기적을 보여준다. “나는 다만 신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할 따름이야. 우리도 역시 신이 가진 무한한 창조적 다양성을 나타내야 한다네.”
바두리 마하사야. 특별한 프라나야(호흡법)를 통해 공중에 뜨는 성자. 그러나 그는 기적적인 면보다는 아누바바(명상 속에서 느끼는 신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를 더욱 강조하였다. “너는 침묵 속으로 자주 들어가고 있지만 아누바바는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느냐? 명상하는 목적을 혼동해서는 안되느니라.”
마하사야. 우주의 성모와 대화하는 법열의 성자. 그를 통해 영적인 황홀경을 체험한 요가난다가 감사의 표시로 절을 하려 하자 이렇게 말한다. “내게 그러면 안 된다. 이제 신은 너의 사원(육신)에도 머무르고 계시다. 성모로 하여금 내 발에 경배하도록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람 고팔. 잠자지 않는 성자. “초월의식에 들어가면 모든 내부 기관들이 우주에너지로 충전되어 신체의 모든 활동이 중단된다네. 그렇게 해서 나는 잠이 필요치 않네.” 그는 또 구루(유크테스와르)를 떠나 히말라야로 가려는 요가난다에게 이런 충고를 해준다. “문을 닫고 홀로 있을 수 있는 조그만 방, 그것이 자네의 토굴일세. 그것이 자네의 성스러운 산이고 신의 왕국을 찾을 장소이네. 산이 자네의 구루가 될 수는 없지.”
어엿한 스승의 위치에 올라선 뒤에도 요가난다는 인도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성자들을 만났다. 아난다 모이 마. 한 순간도 신으로부터 의식이 떠나지 않은 채 황홀한 희열 속에 사는 성녀. 그는 처음 본 요가난다를 즉시 알아보며 포옹을 한다. 생애에 대해 말해 달라는 요가난다의 청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 의식은 일시적인 이 몸과 연관되어 있은 적이 없어요. 보세요, 지금이나 언제나 영원불멸의 신과 하나 되어 저는 항상 똑같아요.”
기리 발라. 음식은 물론 물조차도 먹지 않고 사는 여자 요가 수행자. 60여년 동안 먹지 않고 살게 된 이유를 묻는 요가난다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 “인간은 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며, 신성한 진보를 이룸으로써 음식이 아니라 영원의 빛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이밖에도 요가난다는 타고르, 간디 등과도 만난 적이 있다. 요가난다는 요가 수업이 포함된 초중등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란치 학교를 세웠는데, 새로운 교육적 실험을 하고 있던 타고르의 초청으로 그의 산티니케탄 학교로 가서 서로의 교육적 이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 그는 간디가 머물고 있던 와르다에서 요가 강연회를 베풀고 간디에게 크리야 요가를 전수하기도 했다.
크리야 요가의 법맥
요가난다는 바바지, 라히리 마하사야, 유크테스와르로 이어지는 크리야 요가의 법맥을 현대에 이은 스승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요가난다는 운명적으로 한 스승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유크테스와르. 완벽주의자였던 유크테스와르는 제자들을 매우 엄하게 다루었다. ‘언어를 통한 생체 해부’라고 요가난다가 표현할 정도로 그는 한 치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고 즉석에서 질책했다. 동서양의 경전에 해박한 그는 무한한 지혜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얼음처럼 찬 영적인 수학자와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요가난다는 그를 지혜의 화신이라 불렀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논의를 달가워 하지 않았던 그는 실천적으로 그런 세계를 보여 준다. 호흡은 물론 심장 박동까지 완전히 멈추어 절대 고요의 경지에 드는 모습,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몸을 순간 이동시키는 텔레포테이션, 그리고 사후에 부활하여 육신을 다시 나타내는 기적까지. 요가난다는 스승의 도움으로 마침내 우주의식을 체험하게 된다. 요가난다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깨달음을 인가하며 유크테스와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기적적인 힘을 소유하는 것이 신을 찾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전 우주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해도 여전히 신을 놓칠 수 있다. 영적인 진보는 외적인 능력의 현시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명상 가운데 얻어지는 희열의 깊이로 측정되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 신이다. 우리 내면에 샘솟는 항상 새로운 기쁨이 곧 신의 존재를 증거한다.”
라히리 마하사야, 유크테스와르의 스승. 그러나 라히리 마하사야는 요가난다 부모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 요가난다에게 영적인 축복을 내려주었다. “당신의 아들은 요기가 될 것이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을 신의 왕국으로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이다.”
유크테스와르와 요가난다가 모두 정식 출가한 스와미임에 비해 라히리 마하사야는 가정을 갖고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수행하는 재가(在家) 요기였다. 그의 삶은, 가족을 거느리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명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온화한 사랑과 자비로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스승 바바지를 만나 크리야 요가를 배웠고 그 체계를 완성하여 세상에 가르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명상하라. 그리하여 스스로가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운 무한한 본질임을 알도록 하라.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크리야의 신비한 열쇠를 사용하여 대령(大靈) 속으로 탈출하는 법을 배우라.” 그는 ‘요가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수행력이 깊은 도인이었다.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고, 사후에는 동시에 세 곳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생사를 자유자재 하는 요가의 깊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바바지, 라히리 마하사야의 스승. 요가난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인도의 도인들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바바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불사의 존재로, 아득한 과거로부터 육체를 유지한 채 히말라야에 은둔하며 인도의 요기와 스승들을 가르쳐 왔다. 그는 스와미 교단의 중창자인 샹카라와 중세의 스승 카비르에게 크리야 요가를 가르쳤다고 말한다. 일본 신지학의 아버지, 미우라 간죠는 바바지의 나이가 3천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20대 중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크테스와르는 바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바바지의 영적인 단계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해력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인간들의 왜소한 시각으로는 결코 그 ‘신성의 화신’의 영적인 성취 단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요가난다에 의하면 바바지와 같은 초인들은 역사상의 어떤 획기적인 사건보다는 여러 세기에 걸친 느릿느릿한 인간의 진화과정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한다.
바바지는 라히리 마하사야를 산 속의 한 동굴로 이끈 뒤 그에게 그 동안 맥이 끊어졌던 크리야 요가를 전수해 준다. 이 때 라히리 마하사야가 지닌 마지막 업보를 청산해 주기 위해 히말라야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황금 궁전을 물질화시키는 기적을 행한다. 과거 어느 생에선가 황금 궁전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낸 제자의 업식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유크테스와르도 바바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동양과 서양은 마땅히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조화된 중도 철학을 수립해야 한다. 앞으로 너에게 서양에 요가를 전파할 한 사도를 보내줄 것이다.” 그가 약속한 사도가 바로 요가난다였다. 요가난다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바바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직접 이런 얘기를 듣는다. “너야말로 크리야 요가의 메시지를 서양에 전파하도록 내가 선택한 자이니라.”
동서양에 영성의 가교를 놓다
1920년 세계종교회의에 인도 대표로 미국에 건너간 요가난다는 여러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요가에 대한 대중 강연을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1925년, SRF(자아실현동지회)가 창설되었다. SRF는 크리야 요가의 보급을 위해 설립된 초종파적인 비영리 단체이다. 이 명상센터는 창설된 지 10년도 안 돼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가입하며 번성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도에도 많은 명상센타(YSS)들을 설립하였다.
요가난다는 동양과 서양을 영성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는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양에서는 물질적인 고통을, 서양에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동양과 서양은 자신들이 가진 위대한 진리를 서로 공유함으로써 빈곤과 영적 무지가 없는 세계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가난다는 고대 인도에서 발달된, 신과의 의식적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인 크리야 요가를 서구에 보급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195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인도 대사의 축하연을 베풀고는, 한 시간 뒤에 건강한 모습으로 마하사마디(열반)에 들었다. 사후에도 그의 육신은 부패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무한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SRF는 전 세계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우편 통신강좌를 통해 크리야 요가를 활발히 보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