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은 당신에게 이미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어제는 무엇을 하였으며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 십년 전에는 무엇을 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무엇을 하였는가? 불행하게도 오랜 과거의 기억 속에서 맴돌던 생각이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시절에 아버지를 무섭게 생각했었다면 그 두려움의 뿌리는 아직도 당신의 무의식 속에서 당신을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며 미래의 어느 날, 그 두려움을 반영하여 다른 누군가를 압박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약 섹스에 탐닉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면 지금은 더 이상 섹스에 몰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탐닉의 흔적은 또 다른 형태의 집착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유전자이며, 당신이 태어나던 날 당신의 존재와 함께 부여받은 바코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기 이전에도 당신은 똑같은 습관을 간직한 에너지와 의식의 패턴이었으며, 당신의 현재의 모든 것은 그 패턴을 유전자로 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 패턴은 너무나도 질긴 고리로 묶여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무지이며, 그 무지의 고리가 풀릴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스스로 무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 때문이다.
● 육체와 마음과의 동일시가 고통을 부른다. 아유르베다는 무엇을 무지라고 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무지는 육체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구조에서 언급하였듯이 육체는 가장 거친 입자로 이루어진 거품이다. 번데기에게는 고치가 세상의 구조이고, 붕어에게는 물속이 세상의 전부이듯이 인간에게는 육체를 비롯한 물질세계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실재로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원자론이 주장되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볼츠만은 외로움과 고독에 자살로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그것을 믿으며 원자력 현미경으로 원자 배열을 사진으로 찍어내기까지 한다. 아유르베다는 우리가 바라보는 3차원의 세상이 유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독실한 착각은 인간의 이러한 근시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아유르베다와 물리학은 물질은 시간과 공간의 꼬임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한다. 양자물리학은 우주의 좀 더 근원적인 실체는 파동이며 의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학을 신봉하며 진화된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평하지만 3차원의 기계론적인 과학만을 받아들일 뿐, 좀 더 세련되고 차원 높은 과학은 일상적인 의식체계로 받아들이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물질로서의 육체를 자기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무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인간의 육체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창작물이다. 아유르베다는 마음 또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부 세상처럼 또 다른 차원의 물질세계일 뿐 참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마음은 이기적인 자아(아함까라: ego)에 유착되어 있다. 이기적인 자아의 가장 큰 목적은 살아남고 번식하는 것이다. 이 이기적인 자아의 자기 성취적인 욕구가 우주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기적인 자아와 이 자아에 유착된 마음, 그리고 육체는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몸과 마음의 모든 욕구가 충족된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이기적인 자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이기적인 자아는 자신에게 다가온 이 괴로움을 선별적으로 외적인 마음에 받아들이며, 좀 더 가혹한 괴로움은 깊은 내적인 마음에 저장하여 스스로 망각하게 된다. 내적인 마음으로 자각되지 못하고 숨어버린 마음은 그에게 세상에 대한 왜곡된 인상과 느낌을 준다. 그 괴로운 느낌은 외부적인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안경이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늘 같은 것을 보며, 같은 것을 부르는 파장이 된다. 그는 거듭 괴로움의 그물에 깊이 발을 묶으며 인생이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냐고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 익숙한 대상과의 동일시가 고통을 부른다. 이기적인 자아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쇳가루처럼 마음과 육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들인다. 이기적인 자아의 주된 동기는 자신의 영역을 치열하게 수호하는 것이다. 그 영역의 가장 안쪽에는 그의 몸이 있으며, 그 몸과 함께 유착된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공간은 가족이나 눈에 익은 사물들, 재산이나, 직업, 단체, 국가, 인종 등에 대한 경험과 인상이 바짝 들러붙어 있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가장 안쪽 공간에 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신념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또 하나의 자기이다. 마치 자신의 육체가 실체가 없는 에너지 결합의 포말인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이러한 대상들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별개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익숙한 것을 자신의 몸의 한 부분인 것처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또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낮선 존재나 생각, 관념, 장소 등에 대하여는 거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마음은 이기적인 자아를 늘 괴롭게 하는 원인이 된다. 즉 이기적인 자아와 동일시 한 것을 잃게 될 때, 그리고 동일시되지 않은 것을 만날 때에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가장 많은 고통을 경험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로지 자신의 육체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무생물이나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어떤 대상에게까지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존재의 껍질을 벗고 참된 자기로 가까이 회귀하게 된다면 원수도 아름다워 보이리라. 가시로 둘러싸인 밤송이의 껍질을 벗기면 반짝이는 밤알이 나오듯이 모든 동일시를 벗은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며, 행복이며, 앎이기 때문이다.
● 몸과 마음의 고통은 동시적이며 동량(同量)적이다. 현대의학은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구분하여 다룬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반드시 육체의 고통을 동반하며 육체의 고통 또한 마음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의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의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을 분리해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병들었으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마음이 병들었으나 마음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병이 더 무서운 병으로 발견되듯이 느낄 수 없는 마음의 병은 더욱 강하고 뿌리 깊은 것이다. 아유르베다는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의 질적 수준은 둘 다 생명에너지의 상태에 달려 있으며 그 생명에너지를 다룸으로써 심신의 건강을 다루는 것이 인도의학 체계의 근간이다. 몸과 마음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수준의 고통을 동일하게 경험한다. 단지 우리의 고통에 대한 자각이 동시적이지 않을 뿐이다.
● 성공을 추종하지 말고 성공을 당하라. 신체심리적 고통의 이유가 밝혀지더라도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참자기를 찾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단단한 땅위에 서 있으며, 나에게서 멀리 있는 적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것들을 지켜야하는 절박한 인생의 거친 항로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이기적인 자아를 위해서도, 그리고 참된 자기를 위해서도 억울한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불만족스러운 감각의 경험을 반복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슬픈 사연으로 말하는 패배자로 남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충분히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인생의 정상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간다. 돈과 권력의 성공자들이 날마다 새로운 성공지침을 만들어낸다. 그 지침의 대부분은 남을 이기는 방법이다. 이기적인 자아와 가까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멀리 있는 것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치열한 경쟁의 대가로 상당한 전리품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대가는 언제나 그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의 상처를 함께 안겨준다. 성공을 추종하는 사람은 성공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며, 그 성공을 즐길 수 있는 시간과 힘을 남기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로지 성공 자체가 목적이며, 자신의 성공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유일한 만족이다. 때문에 추종하는 성공의 목표는 끝이 없으며, 그 추종의 대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느 순간 소멸되기도 한다. 어찌 이기적인 자아가 편안할 수 있겠는가? 참된 성공은 만족에 있다고 말한다면 웃을 것이다. 가족을 거느리고 혹은 직원을 거느린 당신에겐 직접적인 성공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야 배부르고 그때라야 행복할 수 있다. 아유르베다는 역설의 철학이다. 이기적인 자아의 움켜쥐려는 분주한 마음 작용과 그 마음 작용의 억압된 내적 욕구가 소멸되면, 그 때 행운의 여신은 당신의 머리위에 성공의 에너지를 모으는 등불을 켜기 위해서 내려올 것이다. “아유르베다는 현대인의 삶에 맞지 않습니다. 어찌 에고를 버리라고 말하나요. 우리더러 바보가 되라는 말인가요.” 아유르베다의 노력은 고요한 노력이며 아유르베다의 전략은 결과에 구애받지 않는 최선의 전략이다. 이기적인 자아를 극복한 자는 추종하지 않더라도 성공 당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삶의 높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
● 사랑을 갈망하지 말고 사랑을 당하라. 고통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주된 이유는 사랑을 갈망하는데 있다. 당신이 어쩐지 기분이 나쁜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당신이 사랑을 갈구하더라고 당신은 늘 외로움과 고독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쫓아서 달려간다면 그 대상은 몸서리치며 달아날 것이다. 갈망하는 사랑의 지속적인 실패는 당신의 내면에 증오를 심게 된다. 신문 방송을 통하여 접하는 두려운 범죄의 원래의 모습은 갈망하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 사랑을 갈망하지 말고 당신 자신이 사랑이 되라. 그러면 사랑을 당하게 되리라. “스스로 사랑이 되라고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습니까?” 물론 어렵지만 또한 무척 쉽기도 하다. 사랑은 우리의 원래 모습이니까 우리를 가리고 있는 경험의 껍질을 벗기만 하면 된다.
● 고통은 나를 잃어버린 결과다. 그러므로 참된 나를 찾으라. 모든 존재의 본질은 사랑이며 빛이며 진리이다. 그것이 참된 자기이다. 참된 자기는 형체가 없으며, 개별적인 특성과 제한된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기는 오로지 하나의 참일 뿐이다. 요가는 생명에너지라는 배를 타고 참된 자기를 향하여 떠나는 여정이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홀로 헤엄쳐서 참자기를 찾으라고 한다면 너무나 어렵겠지만 생명에너지는 몸과 마음과 의식과 희열이라는 이정표를 비교적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생명에너지를 느끼라. 생명에너지를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체험하라. 생명에너지라는 배의 갑판에서 당신은 참자기에서 빛나는 치유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빛을 내담자의 고통을 위하여 언제든지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거대한 생명에너지를 훌륭하게 다루는 방법이 쿤달리니 요가의 지침서에 과학적으로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