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트라의 힘과 수행의 신비
"두려움의 근원을 분석해보십시오. 당신은 혹시 두려움 없고, 명징하며, 집중돼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자신의 불신不信이나 부정성을 과감히 의심해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요?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영적 스승들에 관한 당신의 두려움에 관해서는 인간에겐 힘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십시오. 인간의 가슴 속에서 사랑, 자비, 친절, 앎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전능자의 힘입니다. 신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힘중의 힘, 바로 근원적이며 신성한 힘의 보고입니다.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신성한 광휘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지금 마음은 당신에게 두려움, 의심, 불안, 죄책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명상의 길을 걸어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그런 마음이 아닌 영혼이 돼야 합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마치 흰개미 군대처럼 영성의 토대를 갉아먹어 모든 내면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 수 있다. 에고와 이기성이 최대의 적이다. 그것들은 사령관으로 자리를 잡고, 분노, 증오, 질투, 탐욕, 복수심 등의 군대를 조직하여 내적이거나 외적으로 소란을 일으키도록 명령을 내린다.
반복됨으로써 보호력을 발휘하는 단어를 만트라(mantra)라고 하며, 그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이다.
1. 내적 세계로의 가교
신성한 말씀(Word)이야말로 내재계와 초월계를, 현상계와 본질계를 이어주는 가교이다.
말씀이 자물쇠이며, 말씀이 열쇠이다. 깨어있는(awakened) 스승으로부터 전해받은 깨어있는 말씀(word)이야말로 잠자는 제자의 가슴 속에 잠자는 말씀을 일깨울 유일한 수단이다.
신성한 말씀의 흥미로운 측면은 그 힘을 나타나게 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선포하거나 발언했을때만 그 말씀들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소리의 형이상학. 그것은 영원성(말의 힘), 소리의 근원(평온한 진리의 파동적 에너지)을 최소한 기본적으로나마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성한 이름의 신비와 그것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방식을 제대로 통찰할 수 없다. 이상이 만트라의 핵심이다. 신성한 말씀이 개인적 의식과 지고한 의식을 재결합시키는 과정을 이해했을때만 철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결단력으로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것이다.
2. 빛을 가로막거나 밝히는 일
신성한 말씀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거룩한 빛의 흐름은 신성한 말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신성한 말씀은 영혼의 언어인 그 우주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돼있다. 우리의 혼란, 즉 안개는 육체와 감각, 마음, 에고, 지성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염되고 혼란스런 마음은 내적인 진리를 왜곡되게 반영하는데 반해 순수하고 안정된 마음은 실체를 정확히 반영함으로써 외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가꿀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영적인 이해력의 동이 터올만한 상태를 창조한다. 따라서 경전들은 마음을 속박의 근원이자 해방의 수단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계시의 근원은 아니며, 오히려 계시啓示의 지식에 베일을 드리우고 그것을 여과하거나 왜곡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의 소유자는 남들은 물론이요 자기 자신조차 도울 수 없다. 게다가 계시의 햇살은 혼란스런 마음이 일으킨 안개를 꿰뚫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은 아주 중대한 관문이다. 이런 관문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진리의 햇살이 우리의 의식을 관통하여 계시의 지식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빛은 절대적인 진리의 고유한 본질이다. 이 진리의 빛이 없이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엇다. 사고하고, 느끼고, 분석하고, 결정하는 정신력의 원천은 바로 이 신성한 빛에 있다. 신성한 빛이 우리 안에 머무는 한, 생명이 유지된다. 하지만 그것이 떠나는 순간, 더이상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빛이 우리 안에 항상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 빛과 개인 의식 사이에 버티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신성한 빛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기에 신성한 빛을 직접적으로 깨달을때,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계시는 바로 이 신성한 빛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적 존재의 신성한 빛은 마음의 밀도密度에 따라 다양한 조명도로 우리의 의식을 관통한다.
여느 빛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광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밝아진다. 그리고 그 빛은 밖으로 나오면서 우리의 카르마적이며 정신적인 불순물들에 맞부잊친다. 불순물이 많을수록 빛은 더욱 많이 가로막힌다. 그리고 가로막히는 빛이 많을수록 마음의 영역에 도달하는 빛은 점점 더 줄어든다.
계시는 내면에서 나온다. 누구나 프라즈나, 프라티바, 메다가 발하는 내적인 빛을 타고났지만 마음, 에고, 지성, 무의식 등이 빚어낸 내면의 조건들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은 그 빛을 감지하지 못한다. 정신적이며 카르마적인 불순물이 너무나 두터운 껍질층을 형성하여 진리의 빛이 꿰뚫고 나오질 못하며, 우리는 그 내적인 빛에 접근하질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에서 가능한 한 많은 불순물을 벗겨내는 것 뿐이다. 이일은 자기 자신의 수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 치료, 자구, 자조, 자립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다. 더 나아가서 이 정화의 프로젝트는 반드시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즉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돼야 한다.
우리의 활동의 상당부분은 자신의 육체에 집중돼있다. 마음의 불순물을 정화하는 과정은 반드시 육체의 레벨에서 시작돼야 한다. 건강한 육체는 존재의 중심을 향한 여행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효과적인 영적 수행의 기반은 건강에 좋은 식사법, 올바른 운동법, 호흡법, 수면 습관의 조절, 감각 충족의 절제 등으로 이루어진다.
몸이 건강해질수록, 의식 역시 더욱 정묘해지면서 마음의 다양한 지층에 깔려있는 미세한 불순물을 발견하게 된다.
- 마음의 기능에 지장을 초래하는 산만성이나 주의력 부족
- 자아에 영향을 주는 의심과 콤플렉스
- 지성을 약화시키는 우유부단
- 무의식적인 마음에 역효과를 일으키는 카르마적 불순물
- 기억력을 감퇴시키는 양심불량
명상은 산만성을 극복하고 마음을 집중시켜준다는 점에서 위의 첫번째에서 세번째 불순물들의 해독제이다. 마음의 산만성이 없어질수록 지각은 더욱 명료해진다. 지각이 명료해질수록 자아를 얽어매는 의심과 콤플렉스가 줄어든다. 또한 자아의 얽매임이 줄어들수록 그것이 지성의 결정 기능을 간섭하는 일도 점점 사라진다. 콤플렉스의 함정에 빠져 있는 자아(에고)는 지성의 기능에 계속 간섭함으로써 그것이 정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반면에 명상은 산만성을 치료함으로써 마음과 자아와 지성을 오염시키는 불순물들을 씻어버린다.
다섯 번째 불순물인 양심 불량은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신성한 진리의 빛은 양심의 형태를 띠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옳고 그른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집착, 욕망, 습관 등으로 인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지속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완벽하게 아는 상태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기에 영혼의 목소리와, 방종한 충동들 간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영혼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의 요구에 따른다. 이것은 곧 죄책감과 자기정죄를 불러일으키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양심을 죽여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죄책감에 대처하기 위해 빛으로부터 자신을 숨긴다. 영원히 흘러나오는 그 신성한 빛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지만 우리는 빛이 자신의 행동을 조명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상기시키지 못하도록 일부러 숨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빛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때, 가슴의 내적인 방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마음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쳐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기 시작하며 기억력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일단 이 과정이 시작되면 그것은 그 자체의 타성이 붙어서 점점 더 가속화된다.
기억력이 희미해지면 망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아(에고)가 대신 주도권을 잡는다. 결정을 내려야할 고차원적인 지성이, 기억력을 통해 내적인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자아는 마음을 이용하여 자기 기만적인 속임수를 만들어낸다. 조명을 받지 못한 지성은 자아와 마음을 거의 통제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둘에 종속되어 굴종해 버린다. 그러면 마음은 마술사처럼 행동하여 자아를 즐겁게 해주기 시작하며, 자아는 스스로 삶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이리하여 세상 속을 돌고 도는 주기에 발동이 걸리며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데 이 모든 일이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벌어진다. 요기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우리가 에고의 탑에서 서로 싸우면서 개발한 언어들은 당연히 혼란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그 언어들은 진리와 명징성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기성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들에는 영혼이 말하고 듣는 우주적인 언어의 자연스런 힘이 결여돼있다.
파쉬얀티는 최고의 단계이며, 이 단계의 신성한 말씀은 진리의 완벽하고 순수한 지식을 담고 있다. 이때 신성한 말씀은 인간의 소리로 나타나기 보다는 바야할 것을 보려고 하는 순수한 의식 상태로 남아있다. 파쉬얀티는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힘'이란 뜻을 갖고 있다. "들음도 없이 듣는 자는 듣고, 듣는 동안 듣는 자는 결코 듣지 못한다." 제대로 "듣는" 사람은 "듣는 자(hearer)로 불리기 보다는 선각자(seer)란 의미의 리쉬로 불린다.
3. 선생 찾기
혼란스런 말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반대로 깨달은 존재의 순수한 말은 누구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게 돼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가며 그런 제대로 된 교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그것은 바로 누구나 자신이 구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을 끌어당기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최초의 만남은 아주 중대하다. 그 첫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육안이나 형식적인 인사말의 차원이 아닌 가슴의 차원에서 벌써 서로를 알아버리는 것이다.
4. 우주적인 만트라
램프의 불을 켜는 수준의 입문은, 속박시키는 이도 자기 자신이요 해방시키는 이도 자기 자신이란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비롯한, 영성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배웠을 때 이뤄지게 된다. 가슴의 내적인 방은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두워지며,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선 결코 밝아질 수 없다.목적지에 도달하고 싶다면 반드시 자기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호흡은 우리를 우주적인 생명력과 연결시키는데 들숨을 통해선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날숨을 통해선 우리의 몸 안에서 필요없는 것들을 내보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살아있으며, 그것이 중단되면 죽는다.
인격, 말, 김정, 매력, 혐오 등은 우리에게서 생명력이 발산되는 방식 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