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 라마나는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이면 누구한테나 기꺼이 구두로 가르침을 주었지만, 그의 '침묵의 가르침'(silent teachings)이 더 직접적이고 더 강력하다는 점을 빈번히 강조하였다. 이 '침묵의 가르침'은 그의 형상으로부터 방출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영적인 힘(spiritual force)인데, 워낙 강력하여 그는 이것을 그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말로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 힘을 방출하였고, 이 힘이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동적으로 가라앉혔다. 이 힘에 마음을 맞추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내적인 평안과 행복의 상태로서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진보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러 그 힘이 진아의 직접적인 체험을 촉진시켜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법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 인물은 쉬바(Siva)의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다끄쉬나무르띠(Dakshinamurti)인데, 그는 이 침묵의 힘으로 네 명의 학식 있는 현자들로 하여금 진아를 체험하게 했다. 슈리 라마나는 다끄쉬나무르띠를 높이 평가하면서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이 장章의 문답 가운데 여러 번 등장한다. 스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힘은, 진아나 스승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어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을 수 있으며,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그것의 효과에는 전혀 장애가 없다. 이러한 주의 집중을 흔히 상합常合(sat-sanga)이라 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존재와의 친합親合'(association with being)을 뜻한다. 슈리 라마나는 이 행법을 진심으로 권유하였으며, 이것이 진아를 직접 체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자주 말했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진아를 깨달은 사람의 육신 곁에 있는 것을 말하지만, 슈리 라마나는 그 의미를 더 넓게 정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상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스승과의 '정신적 연결'(mental connection)이며, 상합은 스승의 곁에 있을 때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스승을 생각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다음의 인용문은 상합의 힘이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은 슈리 라마나가 각기 다른 때에 여기 저기서 입수한 5개 절節의 산스끄리뜨 글귀들로 되어 있다. 그는 그 내용에 아주 감명을 받아, 그것을 따밀어로 옮겼고, 이를 실재의 본질에 관해서 쓴 그의 저작인 {실재사십송 증보}(Ulladu Narpadu Anubandham)에 포함시켰다. 1. 상합(sat-sanga)에 의해서 세간적 대상들과의 연결이 끊어질 것이다. 세 간적 연결(worldly association)이 끊어지면 집착, 즉 마음의 습이 소멸될 것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것'(진아) 속에서 사 라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생존 해탈(jivan mukti)을 성취한다. 그들과의 상합을 소중히 여기라. 2. 또렷한 탐구(vichara)에 의해 여기 이 생에서 성취되며, 깨달은 스승 (sadhu)과의 친합親合을 이룰 때 심장 안에서 일어나는, 찬양받는 그 지 고의 상태는, 설법자(preacher)의 강의를 듣거나, 경전의 의미를 공부하 고 배우거나, 착한 행위를 하는 등의 다른 방법에 의해서는 성취할 수 없다. 3. 만약 우리가 깨달은 스승들과의 친합을 얻는다면, 그 모든 신앙적 행위(religious observances, niyamas-勸戒)가 무슨 소용 있으랴? 더할 나 위 없는 시원한 남풍이 불어오는데, 부채는 부쳐서 무엇하랴? 4. 무더움은 시원한 달이 걷어가고, 가난은 천상의 소원성취수所願成就樹 (wish-fulfilling tree)가 없애주며, 죄는 갠지스 강이 씻어준다. 그러나 무더움을 위시한 이 모두가, 비할 바 없는 스승의 친견親見(darshan)을 얻음으로써 다 소멸되리. 5. 물로 이루어진 신성한 목욕장沐浴場과, 돌과 흙으로 만든 신상神像들도 저 큰 성인들(mahatmas)에는 비할 수 없어라. 아, 얼마나 놀라운가! 목욕장 과 신상들은 수많은 날들이 지난 뒤에야 마음의 순수함을 내려 주지만, 깨달은 스승들이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아 주는 사람들에게는 한 순간에 그러한 순수함이 하사된다네.2
[ 문 ] 왜 바가반께서는 돌아다니시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하지 않으십니까? [ 답 ]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지 그대는 어떻게 압니까? 설법이란 연단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것입니까? 설법은 지知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며, 그것은 실로 침묵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시간 내내 가르침을 듣고도 자기의 삶을 바꿀 만큼 감명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을, 성스러운 친존親存(holy presence)에 앉아 있다가 얼마 후에 자기 삶의 안목이 완전히 바뀌어서 돌아가는 사람과 비교해 보십시오. 아무런 효과 없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과 말없이 앉아서 내적인 힘을 방출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그런데 언어란 어떻게 일어납니까? 먼저 추상적인 知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고가 일어나고, 에고가 생각을 일으키며, 생각이 말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말은 최초의 근원의 증손자 뻘입니다. 이런 말이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면, 그대도 생각해 보십시오, 침묵을 통한 설법은 얼마나 더 강력하겠는지.2
[ 문 ] 침묵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할 수 있습니까? [ 답 ] 깨달은 사람은 영적인 감화력感化力(influence)의 파동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굴 안에 앉아 완전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강설講說을 듣고 나서도 그 주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와 접촉하면, 비록 그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진리에 관해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 속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도구인道具人(instruments)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3 스승은, 남아있는 실재(residual reality-육신의 형상으로 세상에 머물러 있는 실재)로서 빛나는 진아지(Self-knowledge)의 그 빛을 드러내는, 침묵의 하사자下賜者입니다. 스승의 눈이 제자의 눈과 마주치면 말이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4
[ 문 ] 바가반께서는 전수傳授(diksha, initiation)를 해 주십니까? [ 답 ] 침묵(mouna)이 최선의 가장 강력한 전수입니다. 이는 슈리 다끄쉬나무르띠(Sri Dakshinamurti)가 썼던 방법입니다. 손을 대거나 바라보는 등의 다른 방법에 의한 전수는 모두 그보다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침묵의 전수는 모든 사람의 마음자리(hearts)를 변화시킵니다.5 다끄쉬나무르띠는 제자들이 다가왔을 때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전수 방식입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들을 다 포함합니다. 다른 전수 방식에서는 주체-객체 관계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먼저 주체가 나오고 그 다음에 객체가 나와야 합니다. 이 둘이 없으면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겠습니까? 침묵의 전수(mouna diksha)는 가장 완벽한 전수로서, 바라보거나 만지거나 말로 가르치는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제자를 정화하며, 그를 실재 안에 자리잡도록 합니다.6
[ 문 ] 스와미 비베까난다(Swami Vivekananda)는, 영적인 스승은 제자에게 영성靈性(spirituality-영적인 체험의 어떤 수준)을 실체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 답 ] 전달되는 실체(substance)가 존재합니까? 전달(transfer)이란 제자라는 느낌을 뿌리뽑아 주는 것입니다. 스승은 그렇게 합니다. 제자가 한 때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나중에는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 문 ] 은총은 스승의 선물 아닙니까? [ 답 ] 신, 은총 그리고 스승은 모두 같은 뜻이며 또한 영원하고 내재적인 것입니다. 진아는 이미 내면에 있지 않습니까? 스승이 바라보아 줌으로써 그것을 하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 스승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스승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책에서는 여러 가지 전수 방법, 예컨대 손으로 하는 것, 접촉하는 것, 바라보는 것 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스승은 불이나 물, 또는 염송이나 진언을 사용하는 의식을 베풀며, 그러한 환상적인 절차들을 전수(입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마치 그러한 절차가 스승에 의해 다 이행된 뒤에야 제자가 성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 개인(전수 받는 자)을 찾는다면 그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승이란 그런 것입니다. 다끄쉬나무르띠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침묵했습니다. 그는 계속 침묵을 지켰으며 제자들의 의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지(jnana)이지, 흔히 생각하는 온갖 언어설명(verbiage)이 아닙니다. 침묵은 가장 강력한 작업 방식(전수 혹은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경전이 아무리 방대하고 훌륭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효과 면에서는 떨어집니다. 스승이 침묵하면 평안이 모두를 지배합니다. 그의 침묵은 모든 경전을 합친 것보다도 더 방대하고 더 훌륭합니다. (그대의) 이러한 질문들은, 여기 오래 있으면서 많은 법문을 듣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그대(one)1)가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은 얼른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실 스승은 항상 그대의 내면에 있습니다.7
[ 문 ] 스승의 침묵이 실제로, (제자의) 영적인 자각을 보다 진보된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 답 ] 스승의 침묵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뜨바라야(Tattvaraya)가 그의 스승 스와루빠난다(Swarupananda)를 기리는 바라니(bharani)―따밀 시의 한 형식―를 한 수 지어서, 학자들(pandits)을 모아놓고 그 시를 들려주고 나서 평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바라니는 전쟁터에서 천 마리의 코끼리를 죽일 수 있는 위대한 영웅을 기리기 위해서만 짓는 것이며, 일개 수도자(ascetic)를 기리기 위해서 그러한 작품을 지을 것이 아니라는 반대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시 쓴 이가 말했습니다. '자, 우리 모두 저의 스승께 가서 거기서 이 문제를 매듭지읍시다.' 그들은 그의 스승에게 나아갔고,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따뜨바라야가 그의 스승에게 찾아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스승은 침묵했으며, 다른 이들도 모두 침묵에 잠겼습니다. 한 나절이 다 가고 밤이 왔으며, 또 며칠의 낮밤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모두 침묵을 지키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들이 왜 거기 왔는지 생각하지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3, 4일이 이렇게 지나간 뒤에 스승이 그의 마음을 약간 움직이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곧 그들의 사고 활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언했습니다. '천 마리의 코끼리를 정복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미쳐 날뛰는 에고라는 코끼리를 정복하는 이분 스승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확실히 이분은 당신을 기리는 그 시를 헌정받아 마땅하다!'8
[ 문 ] 이 침묵의 힘은 어떻게 작용합니까? [ 답 ] 언어란 한 사람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체일 뿐입니다. 그것은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나타납니다. 다른 생각들은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 일어나므로, '나'라는 생각이 모든 대화의 뿌리인 셈입니다. 누가 아무런 생각 없이 머무를 수 있다면, 그는 침묵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합니다. 침묵은 항상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영원한 흐름이며 말에 의해 차단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이 그 무언의 언어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전선에 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에 저항이 있으면, 전등으로 켜지거나 선풍기로 돌아갑니다. 전선 속에서는 전기 에너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묵이란 언어의 영원한 흐름이며, 말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서는 몇 년이 가도 알지 못하는 것을, 침묵 속에서나 혹은 침묵 앞에서는, 순간에 알 수 있습니다. 다끄쉬나무르띠와 그의 네 명의 제자들의 경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이것은 최고 수준의, 가장 효과적인 언어인 것입니다.9
[ 문 ] 바가반께서는 '진인의 감화력은 침묵 속에서 헌신자의 내면으로 흘러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가반께서는 '큰 성인들(mahatmas)과 접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참된 존재를 깨닫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 답 ] 그렇습니다. 거기에 무슨 모순이 있습니까? 진인, 위대한 사람, 큰 성인―그들 간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봅니까?
[ 문 ] 아닙니다. [ 답 ]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들은 침묵을 통해서 작업합니다. 말에 의해서는 그들의 힘이 감소됩니다. 침묵이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언어는 항상 침묵보다 약합니다. 따라서 정신적 접촉이 최선입니다.
[ 문 ] 그것은 진인의 육신이 해체된 뒤에도 그대로 유효합니까, 아니면 그가 육신으로 있는 동안만 그러합니까? [ 답 ] 스승은 육체적 형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접촉은 스승의 육체적 형상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됩니다. 스승이 입적한 뒤에 다른 스승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모든 스승은 하나이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대가 보는 그 형상이 아닙니다. 항상 정신적 접촉이 최선입니다.10
[ 문 ] 은총의 작용은 스승의 마음이 제자의 마음에 작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다른 과정입니까? [ 답 ] 은총의 가장 수준 높은 형태는 침묵입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수준 높은 우빠데샤(upadesa)[가르침]입니다.
[ 문 ] 비베까난다(Vivekananda)도 침묵은 가장 우렁찬 형태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 답 ] 구도자의 침묵은 그러합니다. 스승의 침묵은 가장 우렁찬 우빠데샤입니다. 그것은 또한 최고 형태의 은총입니다. 다른 모든 전수는 침묵에서 파생되며, 따라서 이차적입니다. 침묵은 일차적 형태입니다. 스승이 침묵하면 구도자의 마음은 저절로 정화됩니다.11
[ 문 ] 슈리 바가반의 침묵은 그 자체 하나의 강력한 힘입니다. 그것은 저희들의 내면에 어떤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 답 ] 침묵은 끝없는 언어입니다. 발성 언어(vocal speech)가 이 침묵의 또 다른 언어를 방해합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주변 환경과 친밀한 접촉을 갖습니다. 다끄쉬나무르띠의 침묵은 네 명의 현자들의 의심을 제거했습니다. 무언현시진리無言現示眞理(mouna vyakhya prakatita tattvam)란 '침묵의 설법에 의해 드러난 진리'란 뜻입니다. 침묵은 드러냄(exposition)이라고도 합니다. 침묵은 그렇게 강력한 것입니다. 발성 언어에 있어서는 언어 기관이 필요하며, 그것이 언어보다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다른 언어는 생각마저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요컨대 초월 언어(para vak), 즉 말하지 않는 말(unspoken words)이라 하겠습니다.12
[ 문 ] 누구나 이 침묵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 답 ] 침묵이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가장 진보된 공부인들에게 적합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침묵으로부터 충분한 영감(inspiration)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설명해 줄 언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어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언어로써)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13
[ 문 ] 큰 성인께서 한 번 바라보아 주심으로 충분하며, 신상神像 숭배, 성지 순례 등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 석 달 동안 있었지만 마하르쉬님의 바라보심으로 제가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답 ] 그 바라봄은 정화淨化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정화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한 덩어리의 석탄은 불을 붙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숯은 시간이 더 적게 걸리며, 한 덩이의 화약은 순간적으로 점화되듯이, 큰 성인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의 등급도 그와 같습니다.14 지혜의 불은 모든 업業을 태워 버립니다.2) 지혜는 현인賢人들과의 친합, 더 정확하게는 그 심적 분위기(mental atmosphere)3)에 의해 얻어집니다.15
[ 문 ] 제자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스승의 침묵이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 답 ] 큰 스승의 곁에 있으면 (제자의) 원습原習이 활동을 그치고, 마음이 고요해져서 삼매에 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는 스승의 친존親存에서 참된 지知와 올바른 체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흔들림 없이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마침내 제자는 그것이 그의 참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리하여 생존 중에도 해탈하는 것입니다.16
[ 문 ] 탐구가 내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스승의 육신 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 답 ]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질 때까지는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 문 ] 저는 저 혼자서는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도와줄 어떤 힘(force)을 찾고 있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해낼 힘이 없습니다. 마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이 필요합니다. 스승 시봉侍奉(sadhu seva-스승을 모시면서 그에게 봉사하는 것)이 은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의 보호 아래 들어가듯이, 우리의 약한 마음은 마음이 강한 스승의 친존에서 쉽게 제어됩니다. (스승에게) 존재하는 것은 은총뿐이며, 그 외 다른 것은 없습니다.18
[ 문 ] 스승을 신체적으로 모시는 것도 필요합니까? [ 답 ] 경전에서는 진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한 스승을 12년간 모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무엇을 해 줍니까? 그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건네줍니까? 진아는 항상 깨달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스승을 모셔야 한다는) 그 일반적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인간은 항상 진아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그것을 비진아, 즉 육체 따위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혼동은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가 제거되면 그 혼동은 사라지고 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깨달은 진인들과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무지는 점차로 사라지며 마침내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영원한 진아가 이렇게 하여 드러납니다.19
[ 문 ] 당신께서는, 제자는 현인들과의 친합親合과 그 분들에 대한 시봉侍奉(service)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답 ] 그렇습니다. 전자는 사실 '드러나지 않은 상常'(unmanifest sat), 즉 절대적 존재와의 친합을 의미하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차선次善으로 '드러난 상'(manifest sat), 즉 스승과의 친합을 갖는 것입니다. 진인들과의 친합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들이 워낙 집요하게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인은 이미 마음을 극복하고 평안 속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의 곁에 있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그의 이러한 상태를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곁에 있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스승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필요한 힘을 (제자에게) 줍니다. 시봉侍奉이란 무엇보다도 진아 안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스승의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그의 거처를 돌보아 드리는 것도 포함합니다. 스승과의 접촉이란 것도 필요하지만, 이는 정신적 접촉을 의미합니다. 만약 제자가 내면에서 스승을 발견하면, 그가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 있거나 다른 데 있거나 마찬가지이며,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20
[ 문 ] 저의 직업상 저는 직장 근처에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스승들의 곁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상합(sat-sanga)을 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 답 ] 상(sat)이란 '"나"라는 관념의 핵심'(aham pratyaya saram), 즉 '자아들의 진아'(the Self of selves)입니다. 스승(sadhu)이 바로 그 자아들의 진아입니다. 그는 모든 이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진아) 없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상합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21
[ 문 ] 스승 가까이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답: 신변에 가까이 있는 것 말입니까? 그것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오직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접촉해야 합니다.22 상합은 마음을 심장 안으로 가라앉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친합은 정신적이면서 또한 신체적입니다. 외부적으로 눈에 보이는 스승의 존재는 마음을 내면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는 또한 구도자의 심장 속에 있으면서, 그의 내면으로 향하는 마음을 심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23
[ 문 ]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상합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것과 제가 여기 온 것이 저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 답 ] 그대는 먼저 상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常, 즉 실재와의 친합을 뜻합니다. 상을 아는 자, 즉 깨달은 자도 또한 상으로 간주됩니다. 상 또는 상을 아는 자와의 그러한 친합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샹까라(Sankara)가 말하기를, 온 삼계三界 4)내에서 생사生死의 대해大海를 건너가는 데는 상합 만한 배가 없다 하였습니다.24 상합(sat-sanga)이란 상(sat)과의 친합(sanga, association)을 의미합니다. 상이란 바로 진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아가 상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한 진인들과 가까이 접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합입니다. (이러한 상합을 가지면) 마음이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면 상이 드러납니다.25 주:
1) 슈리 라마나와의 문답에서는 '저'나 '그대'를 'I'나 'you' 대신에 막연한 3인칭 대명사인 one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흔히 발견된다. 슈리 라마나에게는 '나'와 '너'라는 구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고, 헌신자들의 경우에는 질문하는 자가 '나'라는 생각을 피하기 위함인 듯하다. 2) 'The fire of wisdom consumes all actions.' {기따}, 제4장 37절에 나오는 말이다. 3) '심적 분위기'란 스승이 방출하는 깨달음의 기운으로 충만된 교류 공간, 혹은 그 충만된 기운을 말한다. 4) 힌두교에서 말하는 '삼계三界'(three worlds)는 쉬바, 브라마, 및 비슈누 신의 각 세계를 말한다.
- 출처 : 진리 사랑 그리고 수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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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은 미숙해서 100% 이해하긴 힘들지만 정말 깊은 통찰력이 느껴집니다.
그러고보니 인터넷에 슈리 라마나라고 치니 슈리 라마나 릴라가 나오던데 마하르쉬의 원래 이름일까요?
글쎄 나도 첨 듣는...
함 알아바바... ㅎ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라고 알고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