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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도마복음
[1]하늘나라와 겨자씨 (3)
어느 날 아침 이른 시간,
예수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태양은 아직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어부가 그곳에서
이제 방금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가 다가와 말했다.
"보라, 그대들은 어찌하여
삶을 헛된 일에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 수 있다.
그대들은
왜 물고기 낚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 낚는 자,
사람의 어부로 만들 수 있다.
와서 나를 따르라!"
만일 그대가 사무실이나
가게에 앉아 일하고 있을 때,
예수가 와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가 주세요!
난 바쁜 사람입니다.
내 시간을 빼앗지 말아요."
그러나 두 명의 어부는
가만히 예수를 응시했다.
어떤 의심도 없이
예수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이 사람 예수는 아름다워 보였다.
그의 눈은 호수보다 더 깊었고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빛은
태양보다 더 밝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미련 없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신뢰이다.
단 하나의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낯선이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 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에 그를 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부름, 그의 초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그의 부름을 받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진정성을 느끼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마을을 벗어나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급하게 달려와 두 어부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딜 가는 건가!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빨리 돌아가."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땅에 묻고 와도 되겠습니까?
장례가 끝나면 돌아오겠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죽은 자의 일로 근심하지 말라.
마을에는 죽어 있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죽은 자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
그래서
두 어부는 예수를 따라갔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듣고
진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의미가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죽었으면 죽은 것이다.
너희들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을에는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
그들이 뒤처리를 할 것이다.
그들이
장례식을 치러 줄 것이고
매장을 해줄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으며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신뢰는 뒤돌아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뢰는 되돌아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뒤돌아본다.
언제나 다른 선택을 생각하고,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선택했는가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이 미친 사람의 뒤를 따라가야 할까?
누가 아는가?
이 사람은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두 어부는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따랐다.
예수와 같은 사람을 따르면
머지않아
그에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대가 그를 따라야만 한다.
머지않아 그대는
그가 신의 아들임을 느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를 통해, 그대는 그대 역시 신의 아들임을 느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뢰해야만 한다.
처음에 의심이 있으면 문은 닫히고 만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지난 3세기에 걸친
과학의 성공 덕분에 자취를 감추었다.
과학은 실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과학은 기적을, 물론 쓸모없는 기적을 낳았다.
왜냐하면 그 기적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복을 늘리지 못하는 기적은
한낱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행복이 줄어들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생활은 더 편리해진다.
그러나 행복은 줄어든다.
이것이
과학이 이루어 놓은 기적이다.
기계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수록
그대의 존재는 그만큼 덜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대가 덜 중요해질수록
점점 자신이 하찮고 보잘것없으며
무의미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그대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대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컴퓨터가
모든 일을 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어디론가 가서
자살하는 일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행복은, 누군가 그대를 필요로 할 때 찾아온다.》
그대가
필요한 존재일 때
그대는 행복을 느낀다.
그때 자신의 존재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낀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자신 없이는 모든 일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이제는 그대가 없다 해도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다.
오히려 그대가 없으면
일이 더 잘 되어 간다.
기계가 그대보다 모든 일을
더 잘 처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방해물,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일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시대에 가장 뒤떨어진 제품이
되어 버렸다.
해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모델로 생산된다.
자동차든 무엇이든
모든 것이
새롭게 개량되어 나온다.
오직 인간만이
구형으로 남아 있다.
그 수많은 신제품들 속에서
오직 그대만 낡은 채로 남아 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삶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복지단체가
보살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 부모조차 이제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양로원, 국공립 시설들이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모실 것이다.
누가 그대를 필요로 하겠는가?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그대가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옛날에 그대는 필요한 존재였다.
유대 신비주의자 중에
힐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 중에 신에게 말했다.
"나만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 또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나 힐렐이 없다면 누가
당신에게 기도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쳐다보겠습니까?
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지만
당신 역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주 전체가,
심지어 신까지 그대를
필요로 했을 때는
그대는 의미가 있었다.
존재의 의미가,
하나의 향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쉽게 방치될 수도 있다.
그대는 아무 존재도 아니다.
과학 기술이
그대를 안락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학 기술은 더 좋은 집을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더 나은 인간을 만들지는 못했다.
더 나은 인간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차원은 기계의 차원이 아니다.
《그 차원은 깨달음의 차원이지, 기계적인 차원이 아니다.》
과학으로는
붓다나 예수 같은 인물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오히려 과학은
붓다나 예수 같은 이들의 출현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왜 요즘은 예수나 붓다같이
깨달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들이
단순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사회,
순진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 해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깨달은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그들은 분명히 그곳에 있다.
매일 사무실로 나가면서
그대는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라져 버렸다.
예수는 믿음의 시대에,
깊은 신뢰의 시대에 살았다.
그의 모든 영광, 그의 모든 의미는
신뢰의 차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예수의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자.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질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질문은 순수한 것이었다.
질문이 순수한 것일 때만
예수는 대답할 수 있다.
질문이 순수한 경우를 아는가?
만일
그대가 답을 가지고 있다면,
질문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내게 묻는다.
"신(神)이 존재합니까?"
그러나 그대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라고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그 생각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아니면 그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면서,
이 사람이 과연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만일 답이 이미 그곳에 있다면
그 질문은
속임수이며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예수는 오직 순수한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할 때
제자의 마음속에는 답이 없다.
그는 모른다.
단순히 모르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질문할 때,
혹시 이미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기억하라.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기억하라.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곳에서
만남은 불가능하다.
내가 대답을 한다 해도
그 대답은
그대에게 가닿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 대답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비어 있지 않다.
답이 이미 그대에게 있는 것이다.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물들어 있다.
질문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지식(知識)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그 질문은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
논쟁은 가능해도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무지(無知)로부터
질문하는 것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묻는 질문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물을 때
그대는 제자가 된다.
이제
그것은 논쟁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그래서 묻고 있다.
그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제자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잘 알면서 묻는다.
모를 때는 겸손하다.
알고 있을 때는 이기적이 되며,
예수는
이기주의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다.
제자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는 계속
하늘나라에 대해 말했고,
그것은
많은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
용어 자체가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
나라나 왕국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말이고, 그것이
정치인들을 두럽게 만들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정치인들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언젠가 지상에 도래할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이
그 왕국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다.'
그래서 왕과 성직자들,
총독과 관리와 세리들은 모두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이 사람은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군중들은 모두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귀 기울일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군중들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은
불꽃이 되었고
완전히 새로워졌다.
그들 내부에서
무엇인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과 빌라도 총독,
헤롯 왕, 정치인, 온 지배층이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는 매우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그토록
순수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위험스러워 보였다.
예수는 이렇게 오해를 받았다.
예수 같은 사람은
언제든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가 세상의 언어로 말을
해야만 한다는 데 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든 그는
그대의 언어로 말을 해야만 한다.
다른 언어는 있지도 않으며,
그 언어조차 이미 너무 물들어 버렸다.
이미 너무 많은
의미들로 오염되어 버렸다.
예수는 단순히
신의 왕국, 하늘나라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왕국이라니?
그 말은 위험한 말이다.
'왕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물론
그는 틀림없는 혁명가였다.
그는 혁명의 대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세계의 혁명이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대가 스승 앞에 올 때,
차원이 다른 두 세계가 만난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의 만남과 같다.
그것은 서로의
경계선상에서의 만남이다.
신뢰가 있다면 그대는
하늘로 나아갈 수 있지만,
신뢰가 없으면
그대는 땅에 붙박이고 만다.
신뢰가 존재한다면 그대는
날개를 펴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지만,
신뢰가 없으면
그대는 땅에 매달리고 만다.
이 사람은
그대에게 위험을 가져다 준다.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어떤 형태의 나라인가?
이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과는 정반대의,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나라이다.
예수는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지만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신의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한 자가 될것이다.
가장 나중인 자가
가장 먼저인 자가 될 것이다."
예수는 정확히
노자처럼 말했으며,
실제로 그는
노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고,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해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가
그곳에서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완전히 반대가 될 것이라고.
그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대가 강둑에 서 있다고 하자.
강은 조용히 흐르고 물결도 잔잔하다.
그대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비친 영상은
거꾸로 된 모습일 것이다.
반사된 모습은 언제나 거꾸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실제로 거꾸로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을
똑바로 돌려 놓으려면
그것들을 뒤집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마치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의 혼돈 상태가 필요하다.
붓다는 걸인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중인 자가 된 것이다.
그는 왕이었다.
그러나 신의 나라에서는
왕은 가장 나중인 자에 속한다.
그는 이 세상의 왕국을 떠났다.
이 세상의 왕국은 다만 쓸모없고
무의미한 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지만
그것은 정신적 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대를 파괴한다.
그것은 하나의 독이다.
비록 그것이
너무도 서서히 퍼져서
그대가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대가 삶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서서히 퍼지는 독이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죽인다.
그 외에는
결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별로
급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대를 죽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세상의 왕국은 죽음에 속하지만,
하늘나라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준비된 자는 나에게 오라.
내가 넘치는 생명을 주리라."
3부. 끝.
ㅡ 도마복음 오쇼 강의/류시화 옮김 ㅡ
[1]하늘나라와 겨자씨 (4)
예수가
어느 마을을 지나갈 때였다.
그는 목이 말랐고,
마침 그곳에 우물이 있었다.
한 여인이 물을 긷고 있었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몹시
목이 마르니 물 한 잔 주시오."
그 여인이 말했다.
"저는
아주 천한 계급에 속하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물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물을 달라.
그 대가로 그대에게도
나의 샘에서 물을 길러 주리라.
그대가 한번 그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묻고 있다.
"하늘나라는 무엇과 같습니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미지의 것은 오직
'무엇과 같은'이라는 표현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신화가 탄생한다.
《신화는 그대가 모르는 것, 지금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는 용어들로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대의 현재 상태에서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기존의 용어로 미지의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곧 신화이다.
하늘나라는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오류를 범할 뿐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나 붓다, 노자 같은 이들은
여러해 동안
끊임없이 무엇을 한 것일까?
진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을 한 것일까?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는 어떤 상징들을 통해
그대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우화, 신화, 이야기.....
이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다.
세상에는
신화를 분석하고 해부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지 실화가 아니다."
그들은
분석하고 해부하고
신화에 수술을 가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신화가
역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신화는
단순한 상징이기 때문에
해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서울' 방향이라고 쓰인
화살표가 그러진
돌로 된 도로 표지판과 같다.
그대는 그 돌을 해부한다.
화살표와 페인트와 화학약품,
모든 것을 해부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바보같은 녀석이 이런 짓을 했을까?
이 안에는 서울은 존재하지 않아."
신화는 이정표이며,
화살표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방향 표시일 뿐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하늘나라는 '무엇과 같은지'
말해 달라고 묻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무리다.
어느 대답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무엇과 '같은가' 하고만
물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이런 의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가 잠깐이라도
실체를 엿볼 수 있도록
하나의 표지판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것은 장님이
"빛은 무엇과 같은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가 장님일 때
어떻게 "빛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답을 방해한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빛을 아는 것,
그것에 필요한 것은 두 눈이다.
그러나
"빛은 무엇과 같은가?" 하고 묻는 것은
"장님의 언어로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우화는
눈먼 자의 언어로 표현된
진리이다.
모든 신화는
장님의 언어로 묘사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해부하려고 하지 말라.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신뢰한다면
그 표지판은 훌륭한 것이다.
어느 절에는
불상이 하나도 놓여 있지 않다.
사람들은
절 안으로 들어가서 묻는다.
"불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상은 어디에도 없고,
단지 불단 위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이다.
그 절의 승려는 말할 것이다.
"이것이 붓다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 승려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은 자 붓다는 무엇인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제자들은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가 묻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우화로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어떤 경험도 없습니다.
잠깐이라도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무엇인가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예수는
겨자씨의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다.
신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더 작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신을 가리켜 보일 수 있겠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겨자씨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
그 너머는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이다.
그 너머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겨자씨가 그 경계선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가장 작은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극히 미세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세계이다.
겨자씨는 바로
그 경계선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겨자씨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일 뿐 아니라,
매우 신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단 싹을 틔우면 그것은
모든 식물 중에서 가장 크게 자란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씨앗은 가장 작지만
일단 자라면 가장 큰 식물이 된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우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우주는 나무이고 식물이며, 신(神)은 그 씨앗이다.》
신(神)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주가 그 나타남이다.
그 씨앗을 쪼개어 본다고 해서
그곳에서 나무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씨앗을 분해할 수는 있지만
그곳에 숨어 있는 나무를
발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기 나무 같은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이 씨앗 속에
커다란 나무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다니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것은 분석가들이
늘 범하는 오류이다.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연구실로 가져가
어디에 그 아름다움이 있나
찾아내기 위해 해부할 것이다.
그래서 꽃의 화학적 성질이나
기타 여러 가지 것들과 맞부딪칠 것이다.
그들은 또 그것들을
해부하고, 분석할 것이며,
꽃의 제각기 다른 부분들을 뽑아내어
수많은 병에 넣고 표를 붙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험관을 들여다보아도
그곳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와 말할 것이다.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보라, 아름다움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꽃 전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해부해 보았다.
그곳에
아름다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중에는
그 전체를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해부해서는 알 수 없다.
전체는
그 각각의 부분들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문제다.
《진리는 부분들을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하다.》
그것은
단순히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들 전체보다 위대하다.
멜로디는 음부호들의 합계,
소리들이 합쳐진 것이 아니다.
멜로디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모든 음들이 만날 때
하나의 화음이 창조된다.
각각의
음 속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하모니가 되어 나타난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대는
나의 이 말들을 분석할 수도 있고,
사전에서 그 말들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사전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대는 말한다.
"모든 말들이 이 사전 속에 있다.
그러니 뭘 하러 고생하는가?"
환희와 신과
모든 중요한 의미들은 언제나
말과 말 사이, 행간에 존재한다.
겨자씨는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큰 것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대는 신을 볼 수 없다.
신은 가장 작은 것,
겨자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우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씨앗도 틀림없이 존재해야 한다.
씨앗 없이 어떻게
나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씨앗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있는가?
그대가 볼 수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우주가 궁극의 원인없이,
어떤 근원 없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갠지스 강이 흐르고 있다.
그 갠지스 강이
근원 없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광대한 우주,
그대는 그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우주는
광대무변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훌륭한 조화가,
우주적인 교향악이, 위대한 질서가 있다.
우주는 혼돈이 아니다.
그 속에는 훌륭한 질서가 있어서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놓여 있다.
그것을 잘 아는 이는 말한다.
"지금의 상태야말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중에서
가장 최상의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나의 씨앗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씨앗은 가장 작다.
겨자씨보다 더 작다.
겨자씨는 하나의 비유로써,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예수에게 묻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부이고,
농부이고, 소작인들이었다.
그들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잘 이해할 것이었다.
예수의
이 말을 분석하면
그대는 놓치고 만다.
종교를 분석하면 놓쳐 버린다.
분석없이 곧바로 봐야만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여기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신뢰를 사용하는 일이다.
씨앗 속에서
나무를 볼 수는 없어도,
그 씨앗을
밭에 뿌릴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신뢰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이것은 한 알의 씨앗이다.
나는 이것이 나무로 자라리라는 걸 믿는다.
들러 나가서 이 씨앗을 심을 것이다.
적절한 토양을 찾아서 이 씨앗을 심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기다리고 기도할 것이다.
사랑을 하고 희망을 가질 것이며 꿈을 꿀 것이다."
그 밖에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는 씨앗을 심고, 기다리고,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날 이침 눈을 떴을 때
그 씨앗은 새로운 것으로 변해 있다.
싹이 흙을 비집고 솔아나온 것이다.
이제 씨앗은
더 이상 한 알의 씨앗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꽃피어나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 역시
그 비유의 일부이다.
씨앗은 죽어야만 한다.
오직 그때만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수 있다.
《신神은 죽어 이 우주가 되었다.》
신(神)은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 수가 없다.
신(神)은 이 우주 안에 있다.
신(神)은
이 우주 안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대가
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대는 히말라야든 메카든,
예루살렘이든 바라나시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대는
신(神)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神)은 바로 이곳에,
모든 곳에 편재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씨앗이
이제는 나무 전체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씨앗은
나무 속에서 죽어
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그대는 그곳에서
씨앗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神)은 이 우주 속으로,
이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끝.
ㅡ 도마복음 오쇼 강의/류시화 옮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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