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과 풍류의 바람, 부채
-한소라 서울화랑 관장
요즘 우리 시대의 키워드를 생각해보면 디지털, 속도, 효율성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목적 추구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속도에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하기도 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속도에 뒤질세라 앞만 보고 뜀박질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효율성을 추구하며 얻는 것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과연 우리가 가는 이 소중한 길의 과정을 모두 버려도 되는 것인지 때때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길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않은 채, 길 끝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현대인이 때때로 고독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서점에 들렸다가 문득 조선시대 관련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멋과 풍류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멋과 풍류란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가 사는 모습과 조금은 동떨어진 것이 아닌지, 지금 내가 사는 시대와 조금 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사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을 취급하는 화랑마저도 효율성만을 위해 인기작가 위주나 유행에 따른 작품을 앞다투어 전시할 때는 괜한 송구스러움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무형문화재 선자장 전수자인 엄재수 선생님의 작품을 전시하게 된 것은 더없이 소중한 시간인 듯 느껴진다. 우리 전통 부채 전시는 나에게 한국 문화의 방향성을 이끌고 있는 화랑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준 것 같다.
합죽선(合竹扇), 한자 그대로를 풀어보면 대나무를 합하여 만든 부채란 뜻이다. 대나무를 껍질만 남기고 얇게 깎아 풀로 붙여서 만들어진 부채를 말한다. 합죽선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부채의 하나로, 지금도 국제적으로 우리 나라의 문화, 풍류와 멋을 알리는 데 좋은 선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엄재수 선생님의 작품은, 전주의 특산품으로도 유명해, 전주 시장님이 이탈리아 피렌체 시장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유엔 반기문 총장님 선물과, 경산 단오제에 참석한 14개국 대사님 선물로도 황칠선(부채의 종류)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나무를 곱게 다듬어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정성스럽게 그림과 글씨를 적어놓은 부채는, 다른 어떤 전통 작품보다도 우리의 멋과 풍류를 가장 잘 대변해줄 수 있는 예술품이 아닐까.
우리 나라 부채의 사용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우리의 전통풍속 중 단오절과 부채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데, 경도잡지, 동국세시기,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을 보면 단오진선, 단오사선 등 단오와 부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책력이라.”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을 대비하여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선물하고, 동지가 가까워오면 달력을 선물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계절의 절기에 따라 주변인들에게 인사를 하는 풍습에서 과정을 사랑하고 즐거워했을 우리 선조의 생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문득 멋을 즐긴다는 것, 풍류를 즐긴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평범한 삶을 의미 있는 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하나 선물해도, 그 안에 조그맣게 편지를 써서 주거나,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한토막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책을 선물하는 하나의 행위에 ‘멋’을 첨가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하루 틈틈이 이런 멋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삶이 훨씬 맛깔스러워지지 않을까.
멋과 풍류를 부리고 누릴 줄 안다는 것은, 현실에 만족하고 순간을 즐겁고 행복해한다는 ‘자족’의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각각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사람이 느끼는 만족도는 다르다. 어떤 삶이 더 낫고 못하다는 판단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 순간을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삶이 다른 어떤 삶보다 행복하고 좋은 삶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부채과 관련한 이야기 한 토막은 전시를 준비하는 나에게 또 한 번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선물을 주었다. 조선 시대 임제라는 선비가 장원급제하여 임지로 가는 동안에 나이 어린 어여쁜 기생을 보게 되자, 임제는 들고 있던 합죽선(부채의 종류)에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를 써서 그 기생에게 보낸다. 그 내용을 한글로 풀어쓰면 “한겨울에 부채 주는 뜻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나이 어린 네가 알 리 없겠지만, 서로의 생각에 홀로 가슴에 불이 나면, 무더운 유월의 염천보다 더할 것이다” 이 글을 본 기생은 답하는 시를 써서 보낸다. “ 한겨울 부채 보낸 뜻을 곰곰이 생각하니, 가슴에 타는 불을 끄라고 보내었나, 눈물로도 못 끄는 불을 부채인들 어이 하리” 조선 선비의 풍류(風流)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다.
새로운 기운이 가득한 봄날, 오늘은 이 부채를 보면서 삶 가운데 한 토막의 맛과 여유로움을 톡톡 칠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여름이 다가오는 기다림에, 이런 멋스러운 글 한줄기와 함께 부채를 선물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외롭게 전통을 지켜왔을 장인의 숭고한 정신과 우리의 멋과 풍류는 아름답게 어우러져 봄의 흥취를 더욱 신명나게 해 줄 것이다.
과연 요즘엔 어떤 형식으로 멋과 풍류를 느끼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젊은이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블로그에 덧글을 달고 사진을 올리면서 풍류를 즐기는 방식으로 변해오고 있다. 방식은 변하지만 우리 멋스러움이 부채와 함께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것임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게 하는 일이 문화생산자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나는 다시 한 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분 좋은 다짐을 해본다. 또한 올 여름에는 부채와 함께 풍류를 부치면서 맛깔스런 바람을 쐬어야겠다.
(서울화랑 한소라, seoulrgo@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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