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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패션 팩토리 원문보기 글쓴이: 한우물
문정희 시인 / 바위
푸른 물로 `너는 내 지귀다' 찍어 놓은 아차산 애기중 자효스님은 새벽마다 호올로 피리 불었다. 피리 소리 청보리로 푸르러서 앞 밭의 나는 날마다 출렁였다.
자효는 흰 찻종지 향내음 담아 두 손으로 바쳤다. 출렁이는 마음 연잎 숟갈로 저어 바쳤다. `참 향기로와요' 자효는 색실 같은 그말에 그만 걸려 넘어져 연잎도 아낌없이 나에게 바쳤다.
새들도 꽃송이로 날으는 첫눈 오는 날 백팔 번 기운 누더기 하나 문 밖에 서 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백팔 번 기운 누더기 실땀마다 피가 돌아서 자효 몸은 대낮같이 빛이 솟았다. 겨울나무로 세워 놓고 나는 그 가사 벗겨 가졌다.
피리도 연잎도 가사도 없는 천둥 벌거숭이 봄이 왔다. 아차산 뜨락엔 정적이 내렸다. 정적이 싹들을 틔우기 시작했다.
큰스님 말씀처럼 꺼덕않는 부도 하나 절마당에 누워서 하늘 보았다. `이 바위 참 편하겠네요. 내가 가져가고 싶어요.' 나는 바위어깨 쓰다듬으며 지귀를 쏘아보았다. 이때 문득 터지는 뇌성! `그 욕심이나 여기다 부리고 가세요' 그리고 날 집어서 바위 위에 내동댕이치고 자효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천년이 흘렀다. 눈 하나 깜박이는 찰나였다.
가시 빠져버린 황혼의 나는 오늘 그 옛날 부려 놓고 온 욕심을 만나러 간다.
석태는 조금 끼었지만 지금도 꺼덕않는 천년의 욕심.
찔레, 전예원, 1987
문정희 시인 / 불면(不眠)
사막을 걸었다.
흐르는 모래 위의 달빛에 감기어 끈끈한 비밀들이 몸 비비는 소리.
더러는 하얀빛을 지우지 못하여 지금 모든 뜰의 꽃잎들은 흔들리고 있다.
내가 때묻은 만큼 빛나는 손톱 끝에서 바람이 변하여 비가 내리고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둘레
그 사이에 끼인 뜨거운 하늘을 이고 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떼, 민학사, 1975
문정희 시인 /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부제: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는 끌 수 없는 제 눈속의 불 천년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찔레, 전예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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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