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8시를 조금 넘은 시각 밝게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평소 보이지 않던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무당거미로 알려진 거미인데 거미줄이 좀 엉성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엉성하다는 느낌은 인간의 생각일 뿐 무당거미 입장에서는 완벽 그 자체이겠지 무당거미라 해서 굿하는 거미도 아니고 소속 정당 없는 무소속 거미도 아닐 것이다
거미는 지구 위 거의 모든 곳에 살고 있다 인류 역사가 겨우 700만 년인데 비해 거의 55배나 긴 역사에 해당하는 약 3억 8천만년 전부터 있어 온 동물이다 절지 동물로서는 결코 후순위가 아니다 현존하는 동물류 80% 이상이 절지류인데 그 중 전체 절지동물은 90만 종이다 게다가 거미만 무려 4만 여 종을 뛰어넘는 매우 다양성을 지닌 동물이기도 하다
사람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현생인류에서도 이렇다 할 집이 없었다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나 호모 에렉트스Homo erectus도 심지어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 때도 당연히 이렇다 할 주택이란 게 없었다 그런데 거미 화석에 의하면 3억 8천만 년 전 원시 거미 때도 오늘 날의 거미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미줄을 만들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거미줄은 거미가 단지 먹이를 잡기 위한 목적만으로 애써 거미줄을 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거미줄은 거미의 이동수단이면서 알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고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알을 보호하는 방어 목적도 함께 수행하는 다목적 도구다 이처럼 다양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미는 각기 목적에 맞게 변형된 거미줄을 만들어 낸다
거미줄은 이동을 목적으로 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끈적끈적한 점액이 없다 아무튼 다른 생명들은 거미줄에 걸려들면 옴짝달싹도 못하는데 거미는 끈적끈적한 거미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줄을 타고 다닐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거미 다리에 나 있는 강한 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털이 점액과의 접촉부위를 최소화하여 점액에 붙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 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으로 받아들여진다
혹시 거미줄이 강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강철보다 12배에서 20배 이상 강하다 게다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피부를 다치게 하거나 전혀 해롭지 않아 의학과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매우 유용한 신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얼마 전 고어텍스Gore-Tex를 얘기하면서 연꽃 잎에서 아이디어idea를 얻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방탄조끼를 비롯하여 거미줄이 방산산업이라든가 인공 근육을 만들어내는 데도 쓰인다 이를테면 소방복이라든가 우주복을 만드는 데도 소재가 된다 단백질이 소재이기에 소방복은 안 된다고? 혼합된 소재 폴리에스텔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인체에 해롭지 않기 때문에 거미줄은 인공 근섬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소재로 손꼽히고 있다
정작 내가 하고픈 얘기는 따로 있다 첫째, 거미와 거미줄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거미줄 구조가 으레 많은 꽃들이 다 그러하듯이 의상조사의《해인도》와 닮았다는 것이다 둘째, 거미줄을 치고 이를 이용하여 먹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셋째, 알과 새끼와 스스로를 보호하는 전천후全天候all-weather 주택이다 어떤가? 얘기가 좀 재미있지 않은가?
넷째, 거미줄과 거미줄을 치는 거미가 가령 법성法性에서의 법法에 해당한다면 거기에는 거미의 유전자에 들어있는 거미만이 지닌 어떤 특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법성에서의 '성性'에 해당한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뜻으로 확인할 수 있음이 법이라고 한다면 성은 그런 드러난 것으로 증거할 수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이 법성의 법이다
이를테면 자전거의 거장 엄복동은 조선이 낳은 일제강점기의 '자전거 왕'이나 단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엄복동 선수와 자전거를 나눌 수 있을까 이는 김연아와 피겨를 나눔과 같다 엄복동의 자전거 타는 솜씨와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솜씨는 성性이다 따라서 법에 속한 성이어서가 아니라 법과 성은 분명 두 가지이면서도 나눌 수 없는 까닭에 원융圓融하다고 한다
법성法性을 '법의 성품'이라 푼다 다시 말해서 '법에 속한 성품'이란 뜻이다 법에 속한 성품이라면 으레 하나다 겉으로 드러난 외형外形으로서의 '나'와 그 외형을 움직이는 마음이 '성性'이다 누가 뭐라든 육신과 정신은 다르다 어느 누구도 육신을 정신이라 하지 않고 정신을 육신이라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반적인 이론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은 무엇이고 성性은 무엇일까 법法의 범어梵語는 다르마dharma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우주를 비롯하여 사람과 온갖 생명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것이다 율법律法과 덕성德性이기도 하다 다르마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전이 이른바 유명한《법구경法句經》이다
그런데《법구경》이든《숫타니파타》든 초기 경전 말씀은 매우 소박하다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생人生이 무엇이며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어찌 볼 것이며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까 초기경전에는 뜬구름 잡는 말씀이 없다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가고 어떤 언어를 쓰며 어떻게 몸가짐을 가질 것인가 따위다
법이라는 게 특별하지 않다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苦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그 고가 어디에서 왔을까 끌어 모으려는 집착에서 왔다 그렇다면 중생을 넘어 부처가 된다면 으레 적멸寂滅의 세계다 적寂은 동動과 정靜을 뛰어넘은 세계며 멸滅은 고苦와 낙樂을 초월한 세계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여덟八 가지 바른正 길道은 아래와 같다 (1)올바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라 (2)올바른 판단력으로 바르게 생각하라 (3)겸허하고 솔직하게 말하라 (4)법대로 바르게 행동하라 (5)주어진 사명감을 바르게 실천하라 (6)쌓은 공덕을 부지런히 닦고 행하라 (7)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기억하라 (8)명상하고 명상하고 또 명상하라
여기《법성게法性偈》에서 법法과 성性은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외형적인 게 법法이고 그 외형 속에 내재된 정신이 성性이다 가령 이들이 본디 하나였다면 법성의 성질을 원융圓融이라 하지 않았다 본디 둘이었기에 원융이란 말을 붙였고 곧바로 이어 무이상無二相이라 한 것이다 풀이는 '법의 성품이 원융해서'가 아니라 '법과 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 없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