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法性을 더 살펴보기 전에 원융圓融에 담긴 뜻을 먼저 보자 둥글 원圓 자는 '둥글다'와 '조화'의 뜻이다 큰입구몸囗에 둥글다, 온전하다 원만하다 동그라미, 화폐 단위 엔, 둘레 따위가 있다 하나의 평면 위 한 정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의 궤적과 그 궤적이 이루는 도형圖形을 가리킨다 정점을 원의 중심에 놓았을 때 그 궤적을 '원둘레圓周'라고 한다
중심과 원둘레 위 점을 연결하는 직선을 보통 반지름semidiameter이라 한다 원의 전체 넓이를 재기 위해서는 원 그대로의 지름을 통째로 재기보다는 원의 중심에 정점定點을 놓고 컴퍼스compass를 둥글게 그려 그 궤적軌跡local을 재는 반지름을 택한다 부피나 넓이를 구할 때는 늘 반지름이다
둥글 원圓 자는 꼴소리形聲 문자다 이는 뜻을 나타내는 큰입구몸囗 부수와 소릿값인 원員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소릿값 원員에도 둥글다는 뜻이 들어있다 원員은 인원 원員으로 새기는데 여기에는 생계口를 위하여 나라에서 녹貝을 받고 일한다는 뜻에서 관원官員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회사원 직원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
아무튼 인원 원員 자가 둥글다는 뜻이나 나중에 사람 수를 세는 말로 쓰이게 되면서 둥글다의 뜻으로는 이 원圓 자를 썼다 이 둥글 원圓 자에서 나온 말이 첫째는 조화調和circle의 뜻이고 둘째는 도주거리逃走距離flight distance 뜻이다 도주거리란 생명이 위협을 느끼는 거리다 지구상 모든 생명이 지닌 본능이다 사람의 경우는 자신이 팔을 뻗었을 때 펼친 아름 안으로 들면 달아날 수 밖에 없다
원융圓融의 '융融'은 녹을 융融 자다 다리굽은솥력변鬲에 벌레훼虫 자인데 다리 굽은 솥은 다리가 3개다 부뚜막冂이 있고 그 위에 솥口이 있다 솥 위에는 뚜껑一이 덮혀있고 부뚜막冂 아래에서는 장작丷丅이 탄다 다리 굽은 솥은 아무래도 가마솥이다 가마솥 옆에는 벌레虫가 있는데 벌레는 파충류의 하나인 뱀蛇을 가리킨다
벌레 충虫 자는 또아리를 튼 뱀 모습이다 곤충도 동물에 들어가는 게 맞지만 일반적으로 벌레와 동물은 달리한다 동물은 누구나 애니멀animal이라 하지만 벌레는 인섹트insect나 버그bug로 표기한다 뱀虫은 매우 영리하고 사나운 동물이다 자칫하다가는 놓치거나 물릴 수 있으므로 철저히 가림막鬲을 설치한 뒤에 조심스레 찝어 잘 다룬다融는 뜻이다
원융圓融이란 서로서로 녹아들어감으로서 첫째 한 데 통하여 아무 구별 없음이고 둘재 원만하여 막히는 데가 없음이며 셋째 일체 법의 현상과 이치가 구별없이 널리 융통하여 하나 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법성게》의 원융은 무슨 뜻일까 법에 속한 성품이 원융하다거나 성품을 내재한 법이 원융한 게 아니라 오감五感으로 인지될 수 있는 법의 세계와 인지될 수 없는 성性의 세계의 원융이다
법法이란 흘러氵감去의 현상이다 중력의 법칙 따라 물이 흘러감이고 반중력의 법칙 따라 수증기로 오름이다 시간의 화살이 미래로 나아감이고 공간은 끊임없이 팽창되고 확장됨이다 공간의 팽창은 피부의 팽창을 가져오고 시간의 흐름은 생각의 흐름을 가져오기에 사람도 사물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야말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부처님의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은 모든諸 움직임行은 아니無 멈춤常이고 둘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칙은 모든諸 현상法은 없無는 아이디ID我다 왜 어찌하여 아이디가 없을까 아이디의 주인공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이란 말은 몇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실존을 가리키는 말이고 둘째는 겉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것이든 무아無我이긴 똑 같다 이처럼 무아의 겉모습인 모든 현상의 법과 그 현상의 주인공인 심성心性의 세계는 항상 둘로 나누어 표현되었는데 법성게에서는 둘 없는 모습無二相이다 두 모습이 없는 게 아니라 둘 없는 모습이다 가령 두 모습이 없다고 하면 원융된 뒤 어떤 모습도 없다는 뜻이지만 둘 없는 모습이라면 하나는 남아 있다
육신法과 정신性이 하나가 되었을 때 육신과 정신 두 가지가 다 없을까 육신과 정신이 하나된 모습이 있을까 내 이웃에 명장 도예가가 있다 연파 신현철 선생이다 나는 그를 통해 그의 작품을 보고 동시에 그의 작품을 통해 그를 본다 작가와 작품, 둘 없는 모습을 한 데서 본다 이것이 곧 둘二 없는無 모습相이다
연파 선생의 작품은 독특하다 이를테면 다관茶罐 하나도 숙우熟盂 하나도 심지어 찻잔 하나마저도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의 느낌까지 배려한 그의 장인정신이 배어있는 까닭이다 그러다보니 시중에는 그의 작품을 베낀 꽤 많은 모조품들이 떠돌고는 있으나 작가와 작품 세계가 서로서로 융합하여 둘 없는 모습을 아는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중국 탕 칭량산 따화이엔쓰 사문 청꾸안 唐淸涼山大華嚴寺沙門澄觀(淸凉國師) 그의《화엄경왕복서華嚴經往復序》 첫머리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화엄법계華嚴法界'에 대한 풀이를 이처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난 1978년 겨울 해인사 강당에서 이 왕복서를 읽으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화엄경 첫날 서문 첫머리에서부터 다가온 장엄한 화엄법계의 그 환희가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며 벅차오른다 10년 전인 2007년 하안거 해젯날에 36연聯의 사언절四言節로 번역했는데 특히 이처럼 첫 연이 참으로 아름답다
길이는 법성게의 5배에 가깝지만 그러나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명문名文이다 기포의 새벽 편지 1001회부터 청량국사의 왕복서를 풀이하려 했는데 의상조사의 법성게로 방향을 틀었다 많은 분들이《법성게》부터 원했는데 이는《왕복서》가 그만큼 덜 알려진 까닭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글의 성격을 얘기하면 법성게는 화엄을 압축한 파일이고 왕복서는 화엄을 소개하는 파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