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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진짜 다섯 기둥
기독교는 편의상 종교로 분류되지만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 삶에 관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에요. 토대는 성경이지요. 성경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명, 영생, 구원 등 다양하게 표현해요.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라고 하죠. 구원에 관해서는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시는 속죄,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을 교제로 부르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 마지막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에요. 다섯 기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먼저 구원의 의미를 알아야 해요. 마태복음 8장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어요. 앞의 죽음과 뒤의 죽음의 의미가 다르지요.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뜻하고 뒤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것을 뜻해요.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멸망이 뒤따르거든요. 구원이란 그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성경에서 구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아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거예요. 후자를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영생으로 얘기되고 있어요.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의미는 둘 중의 하나이에요.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지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제 다섯 기둥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알아볼께요.
첫째로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이전 상태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어요. 에베소서 2장 1절이에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죽었다고 해요.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시체라는 거예요.
양심이 있어요.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니에요.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일들로 인해 도덕에 대한 의식이 있지요. 이성도 작용해요. 이성의 작용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발달 등 인간적으로 볼 때에 유익한 여러 결과들이 도출돼요.
그렇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요. 하나님과 사랑하지 않죠. 사람 간에도 참된 사랑에서 멀어졌어요. 이기적인 사랑으로 서로 고통을 겪지요. 인간적인 욕심을 따라 자원을 이용하여 피조물들이 황폐해지고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요. 나아가지도 못하지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한 로마서 3장 10절과 같아요. 이를 전적 타락이라고 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자들을 미리 정하신 거예요. 미리 정하셨기에 예정이지요.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예정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신 거예요.
로마서 8장 29절과 베드로전서 1장 2절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있어요. 예지 예정이지요. 여기에서 안다는 단어는 아담과 하와와 동침한다고 할 때에 동침하다를 가리키거든요. 체험적인 앎이에요. 인격적인 연합과 일치이지요. 사랑한다는 의미예요. 당사자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예지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거예요.
구약에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에요. 신명기 7장 7절과 8절에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가 나와요. 그들의 수효가 다른 민족보다 많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요. 곧 이스라엘이 선택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냥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에베소서 1장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신명기의 내용과 에베소서의 내용은 같은 의미예요. 선택이 구약 시대엔 민족적인 단위로 이루어졌고 신약 시대엔 개인적인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어느 경우이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던 거예요.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선택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선택되었고 어떤 사람들을 선택되지 못했다는 구분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기 때문이에요. 선택은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사람들에게만 사용되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리고 칼뱅은 이중선택을 주장하는데요. 민족적 선택(또는 일반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또는 특별한 선택)이 있다는 거예요. 전자의 근거로 신명기를 제시하고 후자의 근거로 에베소서를 제시하거든요. 그런데 둘은 서로 다른 선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에요. 같은 의미지요. 그렇기에 이중선택은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해요.
선택은 선택 받은 사람에게 어떤 조건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시는 속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독생자를 세상에게 주셨다고 해요. 여기에서 세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그 시점의 유대인들을 가리킬 수 있고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사람을 뜻할 수도 있어요. 둘 중의 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믿는 자’보다는 넓은 개념이지요. ‘믿는 자’는 택함을 받은 자이고 세상은 그보다 넓은 개념이에요. 독생자는 세상에게 주어졌어요. 여기에는 탄생만이 아니라 피 흘리심 곧 속죄가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는 택함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이 대신한 ‘불의한 자’는 택함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에요. 처음에 살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 모두이지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는 요한일서 2장 2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신 속죄는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지요. 속죄의 범위는 모든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효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믿는 자’예요. 믿는 자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요. 곧 속죄의 효력은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이를 보편적 속죄라고 해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고 믿는 자가 그 효력을 누린다는 거예요. 보편적 속죄는 보편적 구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넷째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교제로 부르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곧 죽음에서 살리시는 것이에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이에요.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뜻해요. 신자에게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지요. 그래서 신자를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이 구원은 언제나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어요. 비신자였던 상태를 전제로 한 문맥에서 이야기되는 구원은 이처럼 관계 회복의 구원이랍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일까요?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고 하거든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던 것이지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장 48절이에요. 여기에서 영생은 회복된 관계 안에서 교제를 뜻해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곧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신 요한복음 17장 3절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요. 관계 회복의 구원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곧 예정된 사람 곧 선택된 사람은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다 믿어요. 그 생애 가운데 한 번은요. 태중에서 믿음의 자녀로 태어나거나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아니면 십자가의 한 편 강도와 같이 죽기 직전에라도요.
참고로 예정과 작정은 같은 말인데요.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 역사,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선택하신 사람을 그 생애 가운데서 효력 있게 부르시는 것에만 사용하고 있답니다. 그 외에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예정과 무관해요.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별도로 예정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 안에서 당사자들이 선택한 결과인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아세요. 예정했기에 아시는 것이 아니라 예정하지 않았지만 전지하셔서 아시는 거예요. 사실 전지하시기에 예정하실 이유도 없고요.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당사자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예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반 법칙과 인간들의 선택의 결과이고요. 칼뱅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예정 곧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은 성경의 가르침과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요한복음 1장 12절의 가르침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 그분 앞에서 죄인인 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대속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거든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지요. 이를 신학적으로 법정적 칭의라고 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분의 자녀가 된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것이에요.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8절까지의 거듭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거듭난 것이지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돼요. 성령께서 찾아오시고 함께 하세요. 내주하시지요. 외적으로는 세례를 받아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외적인 표이지요.
이에 상응하는 구약의 사건은 출애굽이에요. 구약 성경의 많은 곳에선 출애굽을 구원이라고 기술하고 있어요. 출애굽한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홍해를 건너거든요. 성경은 그 시점의 사람들이 야웨와 그 종 모세를 믿었다고 해요. 출애굽기 14장 31절에서요. 구원의 하나님과 옛 언약의 중보자로 영접했다는 거예요. 애굽에서의 열 재앙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고요. 애굽에서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난 것은 그 증거이죠.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홍해 건넘을 세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직접 베푸신 세례인 거죠. 출애굽과 홍해 건넘은 구약의 시점에서 관계 회복인 구원 받음과 세례예요.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란 없어요. 시체가 스스로 생명을 취하지 못하고 빛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과 같아요.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셨어요. 성경에서 불신 상태에서의 복음 수용을 행위로 보진 않거든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을 뜻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있었다면 자기 의, 자기 자랑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부르심을 받을 만한 행위는 전혀 없답니다. 자랑하지 못하지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역사이고 전 생애 가운데 반드시 한 번은 믿기에 불가항력적이에요. 불가항력적인 은혜랍니다.
다섯째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에요.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된다면 좋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그렇기만 하다면 너무나 좋겠어요. 과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에는 영원한 구원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냥 구원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해요. 후자의 경우는 문맥에 의해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미래형으로 기술되어 있거든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요. 이 땅의 신자에게는 미래의 일이지요.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가능하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의미예요. 효력 있는 부르심에서는 믿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었어요. 여기에서도 그런 의미라면 영접하였다면 다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 의미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전 인격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하거든요. 곧 예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영접함인 믿음과 다른 의지함인 믿음이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신자에게는 양심이 아닌 선한 양심이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지요. 종이 아닌 자녀이기에 주어지는 특권이에요. 그 역사의 내용은 다양해요.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치는 것, 성도의 교제를 통한 깨달음, 자신에게 발생한 즐겁거나 어려운 일들이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메시지 등이에요.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쉬지 않고 일하세요. 신자에게 주어지는 현재의 은혜이지요. 신자는 그 역사를 따라 살면 되요. 그런데 신자에게는 자신의 생각도 있어요. 육체의 욕심이라고 해요. 성령의 역사와는 정반대예요. 그래서 신자에게는 서로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욕심이 있게 되었어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가르침이에요. 신자는 성령의 역사를 따를 수 있어요. 이는 하나님의 현재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에요. 반면에 육체의 욕심을 따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지요. 신자는 고린도후서 6장 1절의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해요.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느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느냐. 이것은 당사자가 결정해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가 은혜이며 신자가 그 역사를 따르는 것이 순종이지요. 성령의 역사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좇지요.
구약에서도 원리는 동일해요.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들은 그곳을 정복하기만 하면 되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뒀죠. 열두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 땅을 살펴요. 결과 보고를 듣고는 그곳 정복을 포기하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해요.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하세요. 민수기 14장 13절에요.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음에 대한 지적이에요. 곧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거죠. 의지했다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주저없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했을 거예요.
영원한 구원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순종으로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해요. 두 표현은 사실상 동의어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9절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8절이에요. 이 구절만 보면 신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이란 없다고 여겨져요. 예수님보다 더 강해서 그분의 손에서 신자를 빼앗을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 말씀은 앞 구절을 전제하고 있어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에서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에요.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현재적으로 그분과 교제하며 현재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요.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히 5장 9절과 같은 의미랍니다. 그 무엇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로마서 8장 39절도 마찬가지지요. 바울 사도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로마서 8장 13절에서 진술하였거든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순종 다르게 하나님을 의지함인 믿음이 전제된 것이지요. 영원한 구원의 길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이처럼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는 순종을 전제하고 있답니다. 단 한 구절도 예외가 없지요. 이는 전쟁 중인 두 왕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지휘관과 잘 훈련된 군사 그리고 군대를 이끄는 규율이 필요하지요. 이 규율은 지휘가 잘 통용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일반사회와 달리 엄격해요. 어기면 감옥에 가거나 불명예 제대 또는 사형당하기도 하죠. 이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을 왕으로 한 세상 왕국과의 전쟁이에요. 신자는 그 전쟁에 부름을 받은 거예요. 승리하기 위해서는 규율을 따라야 하지요. 반드시. 최종적인 승리는 규율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당연하지요.
신자는 현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해요.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곧 육신대로 살지 않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자는 항상 그렇게 사는 가요? 그렇지 않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아요.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요. 육신대로 사는 것이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면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겠지요.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세요. 이를 신학적으로 관계적 칭의라고 한답니다. 순종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의롭다고 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자기 자식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감싸는 너무나도 잘못된 이 땅의 부모들과 전혀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 신자를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하세요. 당연하지요.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이며 그 결과는 영생이라고 하였어요. 육체의 소욕을 선택하면 육체를 위한 삶이며 그 결과는 썩어진 것이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6장 8절과 9절에서요. 썩어진 것은 영생과 대조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멸망임이 분명하거든요. 이러한 경우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요. 출애굽기 32장 32절과 33절, 시편 69편 28절, 요한계시록 3장 5절의 진술과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께요.
일차적으로는 배교가 있어요.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의 경우지요. 배교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믿음을 전제하고 있어요. 만약에 애초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교라는 말이 성립되지를 않아요.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때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 핍박을 피하고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을 저버리는 거죠.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상황이에요. 바보이거나 미쳤다면 모르겠지만 핍박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으면서 교회 공동체에 속할 이유는 없죠. 배교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구속을 받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이지요. 그래서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세요. 배교해서 핍박이나 죽음을 피한 이후에 다시 믿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하는 경우도 있지요. 디모데전서 1장 19절이에요. 우리 성경에는 ‘선한’이 없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있어요. 선한 양심이란 거듭난 신자에게만 가능한 거예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양심이거든요. 그 양심을 버렸다는 말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서 떠나셨다는 의미예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지요. 파선이란 항해를 하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바다에 빠져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해요. 칼뱅의 경우에는 여기에서 믿음이 구원의 믿음이 아닌 교리적 믿음이라고 풀어요. 그런데 이 믿음은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가지라고 한 믿음과 같거든요. 칼뱅의 주장을 따르면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구원의 믿음이 아닌 교리적 믿음으로 가지라고 권했다는 말이 돼요. 완전히 잘못된 풀이인 거죠. 이런 모습은 자신의 선관점을 성경에 집어넣어 끼워맞추기를 하는 것이에요. 본문에 담긴 바를 바르게 찾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요. 배교한 이가 원래부터 믿는 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이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도 해당돼요. 마가복음 9장 42절에서 48절에 나오는데요.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 낫다고 하세요. 이 땅에서 생명이 끝나게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지는 형벌이지요. 곧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잘못에 대한 벌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실족한다는 것의 의미도 확인되지요. 앞의 배교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에요. 실족하는 이나 실족하게 하는 이나 그 결국은 같아요. 여기에서 실족하게 한 이는 회개의 기회가 있어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행실을 인식하고 완전히 끊는다면요. 눈을 빼어 내버리거나 손과 발이라면 찍어 내버리는 것으로 이야기된 바예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연속되는 세 비유도 있지요.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 달란트 비유라고 하는 세 종들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 양과 염소 비유에서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이에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담긴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어요. 신랑이 늦게 올 때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8절)라고 하거든요. 신랑을 맞을 자격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는 거예요. 신자라는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지요. 다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않고의 차이가 있었지요.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돼요. 세 종들의 비유에서 달란트가 주어졌다는 것에선 차이가 없어요. 달란트는 재능에 따라 주어진 사업 자금인데,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명이지요. 사명은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이들에게만 주시거든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사명을 내팽겨치지요. 그 결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나고 슬피 울게 되지요.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은 양으로 분류되는 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해요. 그 호칭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에요. 주 예수님께서 거부하지 않아요. 그 면에선 인정하신다는 거예요. 이는 심판의 내용에 있는 “나를 떠나”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돼요. 이 표현은 그때까지 주님과 함께 하였다는 것을 담고 있어요. 차이는 약한 자로 찾아오신 주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예요. 염소로 분류되는 이들은 영접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주 예수님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돼요.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윤리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 어미와 음행한 고린도 교인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고린도전서 5장 1절에서 8절이에요.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을 출교하라고 명령해요. 출교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한 지체를 끊어내는 거예요. 예를 든다면 팔을 끊어내는 거죠. 끊어진 팔은 끝이지요. 생명과의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지요. 출교는 신자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에요. 이 표현은 그가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대상으로 핑퐁 게임을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사탄에게서 데려왔다가 사탄에게 내어주고 다시 그를 데려오는 일은 없다는 것이에요. 그럴 양이면 애초에 사탄에게 내어주시지 않지요. 정당한 교회의 권징으로 출교가 이루어졌다면 출교된 신자는 영원한 구원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윤리적 범죄를 지속하는 경우도 해당돼요.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1절이에요. 거기에 진술된 윤리적 범죄를 지속하는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효력 있는 부르심 이전에 그렇게 살았던 신자들이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거든요. 이는 그러한 삶에서 불러내신 것이거든요. 그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신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멸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물론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그렇게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5:15)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란 율법 준수를 통한 의죠. 신약의 백성은 더 나은 의가 요구되요.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간음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성에 대해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이에요. 윤리적인 범죄는 율법 준수의 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죠. 바울 사도가 언급한 구약의 광야 생활 중에서 악을 즐겨 하여 멸망한 이들도 같이 볼 수 있겠죠. 신약의 교회에게 거울이 된다고 하였지요. 우상 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으로 멸망한 경우가 언급되었어요. 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10절이어요.
여기에서의 윤리적 범죄는 개인과의 관계에서 행해지는 개인적인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100조의 이상의 국부를 유출했다고 해요. 그의 친인척이 전국 7개 시와 도에 걸쳐 보유한 부동산은 총 팔십 오만 구천 이백 사십 삼평이고 현재 시세로 23조 이상이라고 하거든요. 그 의미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고 봐요. 국가를 상대로 도적질을 했다는 거예요. 바울 사도가 말한 윤리적 범죄엔 이런 것도 포함된다고 봐요.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성경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그 내용에 대해 거부해요. 자기 자식을 절대 버리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라거나 순종의 정도에 대해 말하면서요. 전자의 경우는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그런 소리 못하죠. 구약의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시편 89편 26절은 아버지와 자녀 관계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불순종해요.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지요. 그래도 여전히 바뀌지 않아요. 결국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에 의해 멸망해요. 야웨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에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요. 후자의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몰라요. 다만 기준이 제시되면 기준을 충족시킨 후에는 나태해질 수 있기에 그냥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에서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지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과 같이요. 예수님 십자가의 한편 강도를 반대 근거로 말하기도 해요. 그가 영원한 구원을 얻은 건 명백한데, 그는 부르심을 받고난 후에 이 땅에서 삶이 있었던 신자의 본은 아니예요. 그 생애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기회를 얻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이고요. 일찍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그에 비해 더 큰 은혜가 주어진 것이었어요. 다만 그 은혜를 바르게 누리지 못해 멸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도 하는 거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인 영생 곧 영원한 구원은 의지함인 믿음을 조건으로 하고 있답니다. 이는 성령을 따르는 것 곧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어떤 신자들은 그 조건에서 벗어나기도 해요. 그래서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하기도 하지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에요.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 거죠.
잘못된 다섯 기둥들과 바른 태도
교회 역사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있어요. 지금도 그 주의를 따르는 신자들이 있지요. 많아요. 그곳에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워요. 칼빈주의에서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견인이에요. 성도의 견인에서 견인은 견딤, 참음이라는 뜻인데,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에요. 선택되어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니요. 필연적으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이 성립되겠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아닌데 성도의 견인은 맞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말은 자체적으로 모순이에요.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각각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이래요. 기독교의 다섯 기둥이라는 것이지요.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요. 각각 논리적으로는 아주 우수한 주장이긴 하지만 온전히 성경적이진 않아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반면에 성경을 잘못 읽어 생겨난 내용도 있지요.
이 경우는 앞의 언급한 칼뱅과 같이 선관점을 성경에 끼워넣는 잘못의 결과물이에요. 교리에는 신관이 담겨 있어요. 칼빈주의의 신관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시고 그들을 위해 속죄하시고 속죄의 효력을 적용시켜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신 후에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해주시는 신이죠. 그 신은 선택된 자에겐 최상이에요. 선택되기만 했다면 모든 것이 신에 의해 보장되니 말이에요. 알미니안주의의 신관은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가운데 믿을 것을 아셔서 선택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죄하신 후에 당사자가 거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믿는 자에게 속죄의 효력을 적용시키고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게 하신 신이에요. 그 신은 그나마 일반인들에게 최적이이에요. 자신들의 선택이 전적으로 존중되기 때문에요. 각 신은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에요. 우상이죠. 그 신을 전파하는 것은 우상숭배이에요. 완전하게 된 십계명의 1계명을 어기는 것이죠. 성부, 성령, 성자 삼위이시며 그 관계에 있어서 한 분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성경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전하는 죄인 거죠. 하루라도 속히 돌이켜야 하겠죠.
잘못된 내용에서 벗어나야 해요. 성경의 문맥, 문장, 단어, 문법 등을 바르게 적용하여 읽으면 가능해요. 진짜 기독교의 다섯 기둥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야 해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요. 그렇지 않는다면 예수님 당대에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강하게 책망하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겠지요.
조상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고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요. 이를 위해선 교단적으로 바뀌어야 해요. 시찰회에서 이 내용을 다뤄요. 노회에 안건으로 올려서 총회에 질의해요. 그러면 신학교에서 연구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고 총회에 그 결과를 알려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저처럼 교권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어요.
성경의 가르침은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보다 상세한 내용은 도서출판 등과빛에서 나온 <닫힌 성경 열기>에 있어요. 가능하면 꼭 사서 읽어보시기를 바래요. 특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는 목사로 살고자 하시는 분은 꼭 읽어보시기를 바래요. 성경의 가르침이 명백한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전통을 따르는 것은 결코 성령을 좇는 게 아니에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거죠. 그럼 최종적으로 썩어진 것을 거두느냐? 전 모르겠어요.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그 부분에 있어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안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거죠. 정말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속히 돌이켜야 할 죄이기 때문에요.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매우 터부시해요. 진부하고 현대에는 별 필요가 없는 고리타분한 것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아니에요. 몸의 뼈대와 같아요. 바른 주경에 근거한 성경적인 것이라면 성경의 내용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구원론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로 인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영원한 구원을 앞둔 신자로서의 두려움이 있게 되죠. 칼빈주의의 주장은 감사와 감격은 넘치는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만큼의 두려움은 없어요. 선택되기만 했다면 절대적으로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하기 때문에요. 한국교회에서 사회적으로까지 문제가 되는 모습의 목사들이 거의 대부분 장로교 쪽인 건 한 예라고 보아도 될 거예요.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은 성경이 말씀하는 만큼의 감사와 감격을 가지지 못하죠.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내가 믿기를 선택했고 부르심의 은혜에 대해 내가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양자 모두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의 친근히 하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것인 경외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는 거예요.
성경의 구원론은 그렇지 않아요. 감사와 감격과 함께 두려움이 함께 하죠. 상호 모순인 듯한 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경외로 나아가게 하는 거예요. 비록 실제적인 신자의 삶에서 이론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날 순 있지만 말이에요. 성경적인 구원론이 자리를 잡으면 우선 말씀사역자가 바른 경외자가 되도록 이끌 것이고 그 외의 지체들도 바른 경외자가 되도록 인도할 거예요. 최소한 중병에 걸린 어머니와 같다고 얘기되는 오늘날의 교회 모습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초적인 토양은 갖추어지리라고 여겨져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신자 여러분들이 기독교의 진짜 다섯 기둥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바래요. 베푸신 은혜와 잘못된 삶으로 인해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둘로 인해 하나님을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친근히 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래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지요. 여기에 진정한 평강, 하늘의 평강이 있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평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