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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원성백공 김거공(金巨公)의 영정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갈려진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一善 君) 김 추(金 錘)의 8세손 김거공(金巨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시조(始祖) 거공(巨公)은 고려조에서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년(인종 20) 금(金)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의종(毅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 2품 벼슬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원주지방(原州地方)에 세거(世居)하며 거공(巨公)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원주(原州)로 삼게 되었다.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11세손 연지(連枝)가 조선개국(朝鮮開國)과 함께 명성을 떨쳤는데, 1413년(태종 13) 생원(生員)으로 벼슬길에 나가 형조 정랑(刑曹正郞)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세종(世宗) 때 대사헌(大司憲)으로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으며, 그의 딸이 정종(定宗)의 아홉째 아들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과 혼인하였다.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말손(末孫)의 증손(曾孫)인 응남(應南)은 선조(宣祖) 때의 문장가(文章家)로 중국에 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604년(선조 37) 호성 2 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그가 자녀들에게 "착한 일은 일배를 더하고 악을 미워하기는 남보다 일배를 더하라"고 훈계한 말이 오늘날 원주 김씨의 <씨족훈(氏族訓)>이 되고 있다. 그의 조카 두남(斗南)의 아들 준룡(俊龍)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직산(稷山)을 경유, 용인(龍仁) 의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 유격전을 벌여 청(淸)나라 태조(太祖)의 사위인 백양고라(白羊高羅) 장군을 포함한 많은 적 병을 사살하여 전사상에 빛나는 전공을 남겼다. 준룡(俊龍)의 아들 경문(敬文)은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손자(孫子) 덕원(德遠)은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 政)에 올라 폐비 민씨(民氏)의 복위운동을 반대했다. 그외 덕원(德遠)의 아들 몽양(夢陽)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후손 몽서(夢瑞)는 목사(牧使)를, 조윤(曺潤)과 화제(華濟)는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대사간(大司諫) 우명(遇明), 현감(縣監) 봉년(鳳年)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