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김거공(文忠公 金巨公)
(1096~1163, 고려 숙종 원년 ~ 의종 24년)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시조이다.
원주 김씨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가 시조인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부터 분파 되었다. 처음 이름은 자표(子彪), 봉호는 원성백(原城伯)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제 15대 숙종(肅宗) 원년(1096, 丙子年) 3월 3일에 개성(開城)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주(金疇)의 6남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림학사 김미연(金亹然)이 조부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여덟 번째 아들 일선군 김추(金錘)가 7대조가 된다.
천품과 자질이 영명하고 시서(詩書)에 능통 하였으며 천문지리에 통달하여 축리(笁理)에 선발 되어 출사 하였다.
서리는 나라의 길흉화복을 미리 예상하는 직책으로 추정된다.
예종(睿宗) 9년 (1114)에 여진(女眞)부족에서 아구타(阿骨打)라는 영걸이 나와 거란족의 요(遼)나라를 격파하고 다음해에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금나라는 건국 10년만인(1125, 인종 3년)에 송(宋)나라의 수도 개봉(開封)을 공격하여 휘종(鰴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서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송나라 황족 일부가 항주(杭州)로 내려가 남송(南宋)을 세웠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고려 조정은 정리정략(政利政略)에 눈이 먼 정상배들로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물론 사치풍조의 만연으로 나라의 장래가 몹시 위태로웠다. 이때 김거공은 이 난국을 넘기기 위해서는 새로 흉기 한 금나라와의 국교 수립이 가장 시급한 사항이라고 강조 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거공의 건의를 묵살하다가 사태가 초 위급 상태에 이르자 금나라와의 교섭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금나라는 고려에서 보낸 국서에 표(表: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가 없고 말미에 신(臣)자를 거(巨)자로 가서(假書) 하였다 하여 이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혼란 상태에 빠져 버렸다.
결국 고려 조정은 실권자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의 주도로 중신회의를 연 끝에 김거공을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 하였다.
고려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김거공은 결연히 금나라로 들어가 고려 존망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인종(仁宗)은 직접 금대(金帶)를 하사 하였다.
대외적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되자 상하 불목과 정권투쟁이 또 다시 재연 되었다.
외척 이자겸의 발호가 왕권을 능멸하기에 이르자 왕은 이자겸을 제거 하려 하였다. 이를 미리 알게 된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인종의 의도를 좌절 시켰다. 이자겸은 그러나 얼마 못가 심복인 척준경과 반목하여 결국 그에 의해 축출됐고 척준경 역시 탄핵을 받아 쫓겨나는 등 내정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김거공은 이러한 와중에 이부시랑중강(吏部侍郞中講), 학사 겸 합문(學士 兼 閤門, 좌우상시(左右常侍), 참지정사(參知政事), 등 요직을 차근차근 역임한 끝에 인종 23년(1145)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의종(毅宗) 15년(1161년)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가 이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가 추밀원 판사삼사사(樞密院 判事三司事)에 올랐다. 그 후에 금청광록대부(金淸光錄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의종은 김거공의 수십 년에 걸친 충절공훈(忠節功勳)을 기리어 원성(原城 : 원주)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거공의 후손은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의종 17년(1163년) 5월 5일에 타계하니 향년 68세였다.
김거공은 풍채가 뛰어나고 말을 조리정연하게 잘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에 해당하는 합문(閤門)을 항상 겸직 하였다.
김거공이 타계한지 7년 뒤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주도로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들을 무시하던 문신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다.
이후 사람들이 김거공이 일찍 재보(宰輔 : 재상)가 되었다면 이자겸의 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정중부의 난도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개성 봉명산(開城 鳳鳴山)에 장사 지냈고 배위는 혜화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의종 24년(1170년) 12월 18일에 타계하니 합폄 하였다.
아들 윤간(允侃)도 금청광록대부 문하시중(金淸光錄大夫 門下侍中)에 올랐다.
묘소는 오랜 세월이 지난 데다 남북분단으로 애석하게도 실전하여 2000년에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초리 세곡(津東面 哨里 細谷)에 설단 하였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 대전에 배향 되었다
참고 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