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자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줄거리를 통해 전개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갖가지 장치를 심어놓습니다. 영화 <곡성>이 개봉했을 때 극 중 인물의 존재, 결말의 의미 등 여러 해석이 파다했던 것도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크린은 무수히 많은 상징을 담아 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말입니다.
영화 속 ‘상징’이란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영상 언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를 포함해 그 이상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인데요. 초등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섬세한 관계 묘사로 호평을 받고 있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에서는 어떤 상징이 드러났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영화 관람 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스포 있습니다!
1. 가위, 바위, 보 movie_image (1) 이야기의 첫 시작,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피구를 하기 위해 가위, 바위, 보로 팀원을 뽑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선’은 아무도 뽑지 않습니다. 애써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선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요. 결국 마지막으로 선을 뽑은 친구는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는 말까지 합니다. 반에서 선이 어떤 존재인지를 시퀀스 하나로 여실히 보여줍니다. 후에 선 대신 보라와 놀기를 택했던 지아가 다시 홀로 남게 되자 같은 시퀀스로 지아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2. 이름 ‘선’ movie_image (2) 극 중 주인공인 열한 살 여자 아이 선. 선은 올곧고 착한 장녀입니다. 가만 보면 선이가 하는 모든 행동의 최고 가치는 ‘선’에 있습니다. 친구가 없던 선은 방학 시기에 맞춰 전학 온 지아와 친해지지만, 개학 후 지아가 자신을 따돌렸던 보라와 학원을 같이 다니며 단짝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은 지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자꾸만 어긋나고요. 선은 의도와 달리 자신 때문에 지아가 따돌림을 받자 당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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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상처를 받는 것도 싫지만, 자신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입는 것도 싫어하는 선에게 보라가 말합니다. “왜 너만 착한 척해?” 우리는 관계 속에서 항상 선택을 거듭합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만한 선택을 하지만, 결국 돌아보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한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자신이 한 선택이 타인에게 나쁘지 않은 결과일 때, 곧 그 상대가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
얼핏 보면 보라가 전형적인 악역처럼 보이지만 선이 착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라도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합니다. 선과 보라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착하게 대했는데 상대는 왜 저러지’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스쳐지나가더라고요. 관계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선의 입장이 되었다가도, 보라, 지아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기 때문일 겁니다.
3. 오이김밥 movie_image (6) 선은 친구 지아를 위해 엄마의 오이김밥을 대접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떨어져 사는 지아는 선의 모녀 사이를 질투합니다. 선의 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먹지 않고 서운하게 만들죠. 이후 현장학습에서도 선은 지아에게 오이김밥을 건네며 먼저 다가갑니다. 지아도 마음을 열려는 순간, 보라에게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들키고 맙니다. 지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라에게 달려가고, 도시락은 바닥으로 떨어지죠. 지아는 혼자 남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오이김밥은 그런 지아의 아픔을 보여주면서 다시 혼자 남기 싫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소재로 사용됩니다.
4. 봉숭아 꽃물과 매니큐어, 팔찌 movie_image (4)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을 꼽는다면 봉숭아와 매니큐어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선과 지아가 가까웠던 시절, 함께 봉숭아 꽃물을 들입니다. 하지만 지아가 보라와 함께 놀면서 선은 또 외톨이가 됩니다. 다시 지아와 친해지고 싶지만 사이는 계속 멀어지기만 하죠. 그 때 보라와 지아의 사이에도 틈이 생깁니다. 선은 무심결에 보라를 위로했다가 보라의 매니큐어를 빌려오게 되는데요.
봉숭아 꽃물이 지어지지 않은 손톱에 매니큐어를 덧칠하는 선. 보라와 가까워질지 지아와 화해할지 고민이 가득한 선의 마음이 이미지화 된 장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선과 지아는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한 채 홀로 남습니다. 그리고 봉숭아 꽃물은 손톱 하나에만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습니다. 둘의 관계에 진전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고요. (물론 결말은 답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팔찌도 마찬가집니다. 선과 지아가 친해졌을 때 선은 직접 만든 팔찌를 선물로 줍니다. 이후 사이가 나빠지면서 팔찌를 먼저 끊어 버리는 것은 선이죠. 선은 자신과 달리 팔찌를 계속 하고 있는 지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죠. 지아가 보라와 놀면서도 팔찌를 빼지 않은 이유는 마음 한 켠에 선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잡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5. 동생 movie_image (8) 후반부로 갈수록 선은 지아와 사이가 점점 악화되면서 치고 박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영화 초중반부에서 선의 동생은 친구와 레슬링을 한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맞곤 했는데요. 시퍼런 멍이 든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선과 엄마의 마음은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에게 왜 때리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선. 그런 동생이 지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면 언제 놀아?” 천진난만하게 등장했던 동생의 한 마디로 영화의 주제가 전달되는 순간입니다. 관계는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 있지만 지지 않으려고 계속 싸우기만 하면 끝이 나지 않겠죠. 문학 시간 때 시, 소설, 수필에서 구절마다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가 처했던 환경을 대입해가며 의미를 배우고, 외우고, 시험까지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한 시인의 손녀가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손녀가 고른 보기는 틀렸답니다. 그 시인은 손녀가 틀린 문제를 보면서 학교에서 가르쳐준 정답대로 생각하고 시를 쓴 적이 없었 답니다. 문학처럼 영화도 영상언어로서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보니 관객마다 여러 생각을 쏟아 놓고는 하죠. 그리고 다수의 의견이 정답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시인의 이야기 처럼 정답은 없다는 것! 영화가 뜻하는 정답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영상언어를 해석하면서 관람과 함께 또 다른 재미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