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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1.대민(주일낮)
*하나님의 열심(사9:6-7)
무엇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열심에는 잘못된 열심도 있습니다. 혹 적지 않은 성도들이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도 없이 무작정 열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잘못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핍박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장2절에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입니다. 성도 된 자라면 모든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더라도 올바른 열정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했지만 잘못되면,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용서되거나 칭찬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도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바른 방법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조금 먹을 것이 풍족하고 넉넉하다고 느껴지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다 했다고 거드름피웁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합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얼마나 열심을 품고 모이기에 열심이었은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매달리고, 그러나 먹고 살만 하니까 심방 오는 것도 귀찮게 여깁니다. 주일날 빠져서 전화하는 것도 귀찮아 여깁니다.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들도 싫어합니다. 이것들 모두 교만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부지런할 것과 게으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장12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 '열심을 품고(프뉴마 제오)'란 '성령'이라는 뜻의 '프뉴마'와 '물이 끓듯 열정적이다'는 뜻의 '제오'가 합쳐진 말로,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열심'이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기도도, 봉사도,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고,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3장10절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으면 아 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8장 10절에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하였습니다.
잠언 10장 4절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라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손이 일하는 대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열심'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이십니다.
디모데전서2장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아주 강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응답하여 주십니다.(요엘2:18-19)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아기의 형태로 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9:6)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평강의 왕입니다. 그 분을 이 땅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열심을 다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이 열심을 만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의와 거짓 속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겪게하여 우리를 진리위에 바로 세우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열심 속에 거하는 한 넘어져도 망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열심 속에 있는 자의 넘어짐은 새로운 일어섬의 시작임을 확신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열심에 힘입어 다시 굳건하게 일어나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에 응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 속에 거하는 한 우리의 가정과 일터, 이 사회에는 소망의 빛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또 다시 새로운 기쁨과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내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열심 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1.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입니다.(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바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땅의 질서를 바로 잡고, 진정한 의(義)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몸소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아 참다운 의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예수님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첫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다스림의 사역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스림은 세상의 군왕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의 권리만을 행사하는 다스림이 아니라 백성들 밑에 내려가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다스림이었습니다.
둘째, 기묘자라 하였습니다.
기묘자라고 하는 뜻은 영어 성경에서 “원더풀”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더풀의 뜻은 와 하고 놀라는 뜻입니다. 즉 놀랍다는 뜻입니다. 이 아기 예수님의 이름이 이 아기의 존재가 정체가 참으로 귀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 아기를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아기를 놀랍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동정녀 탄생으로 시작하여 공생애, 죽음,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도 놀라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셋째, 모사라 하였습니다.
謀士(모사)”라라고 하는 뜻은 영어성경에서는 “카운셀러”라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의 뜻은 “상담가” “선비”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의논해서 옳게 지도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혜가 풍성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옳게 최선의 길로 지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완전하신 상담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지만 그분은 사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디도서2장13절에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귀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다섯째,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사랑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시고 그 자녀 된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우리 구원을 완성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이나, 근심이나,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여섯째, 평강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들이 노래한 것이 영광과 평화입니다.
누가복음2장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평강이 기뻐하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은혜와 평강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쫓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죄와 절망 가운데 한숨 쉬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시고 축복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하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언어나 관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늘 잊지 않고 감사와 찬양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입니다(7)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다윗 언약(삼하 7:13)을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상 다윗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한 왕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왕의 계열이 끊기고 말았으며, 예수님 당시의 유대 왕 헤롯은 다윗의 가문이 아닌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엘하 7장13절에서 다윗에게 주어졌던 언약이 좌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그것의 영적 후면에 있으며 그 언약의 성취자는 영적 통치자로 오실 분, 다윗이 ‘내 주’라고 고백하던 그의 후손(시 110:1)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다윗의 후손이시며(롬 1:3), 동시에 그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마 22:42-45).
본절에서 “정의와 공의로 보존할 것이라” 것은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강화시키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 재판관들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지도자의 덕목인 ‘정의’과 ‘공의’를 메시야가 소중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에 해당하는 ‘울레싸아다흐’의 원형 ‘싸아드('1'0) ’는 본래 음식을 섭취하고 쉽을 통해 기력을 회복시키거나(삿 19 :5 ; 시 104: 15), 무너지지 않도록 강한 힘으로 불들어 주는 것(시 18: 36) 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마치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견고케 하는 것처럼 영적 왕국의 틀을 다지고 그 기초를 강화시킨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이다. 즉 유대의 지도자들이나 재판관들과 달리 메시야는 정의와 공의로 결코 흔들리지 아니할 견고한 왕국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예수님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워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부모의 사랑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편견이 있을 수 있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는 내 자식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자식들을 때로는 홀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식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다른 자식의 손해를 감내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대학 입시 보면 꼭 자기 자식만 합격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른 집 자녀들은 어떻게 되라는 말인가요? 그것이 부모의 편견이고 편협 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기로 오신 그 분의 사랑에는 공평과 정의가 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치지 않고 누구든지 풍요로운 그런 놀라운 사랑이 계속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로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마치 이스라엘의 다윗 왕국처럼 무너지지 않는 왕국이요 영원히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공평하심으로 그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공평하심으로 그 나라는 불의와 거짓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자들은 모두 정죄 받아 멸절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메시야 왕국에는 오직 참되고 올바르며 진실 된 것, 곧 공평과 정의만이 하수같이 넘쳐흘러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서5장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잘사는 선진 복지국가는 대체적으로 정의와 진리가 그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으며, 부패한 나라는 일반적으로 관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이 불의와 불공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의는 단순히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도 정의입니다. 정의는 마치 산소와 양분으로 가득한 신선한 피와 같다 할 것입니다. 이 신선한 피가 잘 공급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편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이것이 곧 불의입니다. 이런 불의를 마음에 품고 그 길을 가는 자는 곧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곧 정의의 마음을 품은 자와 같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할 것입니다. 마음에 의를 품은 사람은 눈이 밝습니다. 의인은 장수합니다. 의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소리가 큰 사람이 이깁니다. 정의보다 폭력이 앞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체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 시대에 공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의로운 마음입니까? 양심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양심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공의가 물같이 흐릅니다.
성도 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자연스레 시행되는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우리가 부여받았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과 의무와 책임에 충실한 사람이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면에서 정의와 공의가 약한 것이 큰 약점입니다. 아모스서5장15절에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고 법을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도들의 삶이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가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이를 이룰 것입니다.(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세우실 나라는 평강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정의와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이 그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에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시는 것도 만군의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십니다. 허무와 절망 가운데 사는 백성들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것도 '여호와의 열심'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열심만으로 충분히 그 놀라운 사역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열심이 메시야 사역의 원동력임을 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불로서 이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여호와의 열심인 성령의 불과 능력 받아 이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왜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신다고 합니까? 여호와의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왕기하19장31절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유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하나님께서 하루아침에 송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리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즉 기어코 하나님의 계획은 이뤄지고 마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열심인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열심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교회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가장 중요한 전초 기지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지금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사역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사역,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아 세례 받게 하고 가족으로 영입하는 교제의 사역은 지금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나중 된 자들을 인도하며 훈련하여 예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우는 양육 사역, 교회 밖의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저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 섬기는 봉사와 전도의 사역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중요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부름을 입은 존재로서의 구별된 신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의 일을 맡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 사회에서도 중요한 일은 아무나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신뢰 할 수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책임감 있고 확실하게 잘 할 수 있는 사람에 맡깁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 사람들 아무에게나 일을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는 하나님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은 단 한번 뿐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뿐인 삶을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귀한 존재로서 가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는 오직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이 세상 구원사역에 동참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성도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지구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길 잃은 양을 찾기를 원하시며, 지금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이 일을 먼저 믿은 우리들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모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 한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할 때 마치 마른 풀에 불붙듯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재물과 인간관계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좇아가는 일입니다. 이 일에 순종하려면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일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올 수 도 있습니다.
성도 된 우리를 통해 영혼구원을 이루어 나가시고 구원 받은 백성이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도 모두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심이 너무나 절실하여 그 때문에 지불해야 될 엄청난 대가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열정을 다해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열심은 성도들에게 영원 무궁히 행복한 나라를 주시기 위하여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경에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약속하였으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는 그 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나라에서 예수님을 찬송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입니다.(6)
2.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입니다.7)
3.이를 이룰 것입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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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도 열심이시니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