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를 닮은 고비
글·사진 오현식 | 농민신문 기자
어릴 때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고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나물에 속한다. 그래서 산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고사리를 채취한 흔적은 어렵잖게 볼 수 있지만 고비는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마트 등에서는 고비를 그냥 고사리로 판매하는 실정이다. 주로 먹는 부위인 줄기는 부드러워 식감이 좋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산나물 강연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고민한 적이 있다. 왠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어른조차 산나물을 잘 모르는데 어린이들 앞에서 산나물을 이야기해봤자 입만 아플 것이란 얄팍한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대부분 초등학교 1∼3학년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난감했다. 호불호를 즉각 표현할 뿐 아니라 주장과 개성이 강한 요즘 아이들을 대상으로 ‘재미없는 산나물’에 대해 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강의 자료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옳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문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기심을 끌 만한 산나물을 찾아보았다. 많은 산나물 중에서 고비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고사리는 알아도 고비는 잘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 하면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고비의 한 살이를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새싹부터 완전히 다 자란 모습까지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 같이 여러 장의 사진으로 강의 자료를 만들었다. 아뿔싸! 고생한 보람도 없이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라는 모습의 사진을 차례대로 반복해서 보여주자 한 아이가 “헐, 풀이 나무가 됐어”라며 관심을 보였다. 흥미를 잃었던 아이들이 덩달아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산나물 먹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선입견에 불과하다. 어린이들이 일찍이 산나물을 자주 보고, 관찰하면 자연스럽게 먹게 될 것이다. 고비는 완전히 자라면 마치 나무같이 키가 크고 잎과 줄기가 빳빳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새싹이 올라올 때는 꼭 동물이 새끼를 잉태하고 있는 모습이다. 누에고치처럼 흰색 줄 같은 솜털로 둘러싸여 있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어린 줄기 끝은 돌돌 말려 있어, 간난아이처럼 곧 첫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다. 봄 햇살이 점점 따뜻해지면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줄기는 용수철처럼 펴지면서 푸른색으로 변한다.
돌돌 말고 있던 줄기 끝에서 잎이 나오고 있다. |
고비는 완전히 자라면 어릴 때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란다. |
점점 자라면서 쓴맛 내 곤충으로부터 보호 고비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봄이 언제 왔다 가는지 모른다. 새잎과 줄기는 점점 자라면서 곤충들이 먹지 못하도록 쓴맛을 내뿜으며 새로운 방어 전략을 펼친다. 줄기는 점점 자라 딱딱해지고 개미 등 작은 곤충들이 주둥이를 이용해 즙을 빨아먹지 못하게 방해를 한다. 햇살이 따뜻하고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고비에게는 생사를 넘나들 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는 시기다. 대개 식물도감이나 산나물 관련 자료에서는 고비는 높은 산에서 자란다고 나온다. 무슨 근거로 이같이 설명하는지 알 수 없지만 고비는 산의 높음과 낮음을 크게 따지지 않는다. 서울 인근의 낮은 산이나 강원도의 높은 산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다. 산에 들어가 물기가 있거나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의 경사면 근처를 잘 살펴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고비는 물 빠짐이 좋고 약간 촉촉할 정도로 수분이 유지되는 토양을 좋아한다. 취나물이나 수리취처럼 같은 지역에 모여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채취할 수 없다. 여기저기 발품을 많이 들여야 겨우 한 줌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고급 산나물로 취급된다.
고사리보다 더 귀하게 취급받는 산나물 강원도와 경북 지방에서는 고비를 즐겨 먹는다. 이 지방 사람들은 고비를 깨치미라고 부른다. 고비라는 이름은 줄기가 말려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강원도 일부 지방에서는 제사상에 고사리 대신 고비를 올린다. 고사리보다 고비를 더 귀하게 여기는 셈이다. 울릉도에서는 제사상에 빠뜨리지 않고 올리는 고급 산나물로 취급한다. 대형 마트 등에 가보면 고비가 판매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고비와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고사리만 판매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마다 중국 등 외국에서 생산된 고비가 적잖게 수입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고비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트에서는 그냥 고사리로 판매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비처럼 곤달비가 곰취로, 파드득나물이 참나물로 잘못 이름이 붙여져 판매되는 경우가 있다. 고비는 쓴맛이 강해 생것을 그냥 먹을 수 없고 삶거나 삶아 말려 두었다가 요리해야 한다. 비타민 B1을 파괴하는 성질이 있는 아네우리나아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으므로 삶은 다음 물에 여러 번 우려내고 먹는 것이 안전하다. 이 물질이 들어 있어 못 먹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잘만 요리하면 아무 탈이 없다. 산나물은 대개 끓는 물에 데치면 부드럽게 되고, 알레르기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이 빠져나간다. 고비는 삶은 다음 멍석 같은 곳에 펴놓고 양손으로 비빈 다음 말리면 한결 부드러워진다. 말린 것을 요리할 때는 솥에 넣고 약한 불에 데우면서 손으로 비벼주면 생나물처럼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올라 음식 맛을 더한다.
솜으로 둘러싸인 듯한 새싹국물 맛을 깔끔하게 해주는 천연 조미료 말린 것은 육개장을 끓일 때 넣으면 기름기를 빨아들여 국물 맛을 깔끔하게 한다. 또 고깃국물이 밴 고비는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좋다. 갖은 양념을 넣고 무치거나 들기름을 둘러 볶아 먹어도 일품이다. 질기지 않게 잘 볶으면 나물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잘 먹는다. 고사리처럼 비빔밥을 요리할 때 다른 산나물과 함께 이용하면 좋다. 고사리보다 부들부들하고 구수한 맛이 나고 다른 산나물과 궁합이 잘 맞는다. 고비의 주요 영양 성분은 100g 생채 기준으로 탄수화물 6.2g, 단백질 2.1g, 섬유소 1.5g, 회분 0.8g, 지질 0.1g 등이다. 그밖에 인 164mg, 나트륨 6mg, 칼슘 14mg, 철 3.7mg, 칼륨 385mg 등의 무기질과 베타카로틴 859㎍, 비타민 33mg, 나이아신 0.4mg, 비타민 B2 0.11mg, 비타민 B1 0.03mg 등이다. 칼로리는 23kcal로 낮아 다이어트 식품이라 할 만하다. 인스턴트 식품을 즐겨 먹는 현대인에게 고비는 권장할 만한 식품이다. 섬유질이 많이 들어 있어 장 속 내용물이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도록 하고 장의 연동 작용을 활발하게 하므로 변비를 예방하고 장 속 독소를 흡수해 배설시키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잎자루에는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등이 들어 있고 특히 회분 함량이 많아 치아 관련 질병을 예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비의 생약명은 자기(紫箕) 또는 미채(薇菜)라고 하는데,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약재로 쓴다. 감기로 인한 발열과 피부 발진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예부터 민간에서는 봄과 여름에 줄기와 잎을 채취해 목구멍이 아플 때 차처럼 마시며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이용했다. 뿌리는 임질·수종·마비증과 허리 및 등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비가 속한 고비과에는 고비·꿩고비·음양고비 등 생김새가 비슷한 것이 있다. 또 풀고사리과의 풀고사리 또한 생김새가 비슷하다. 이들은 잎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평생 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지낼 수 있다. 일부 농업 기관의 유전자원 포장이나 식물원에서는 꿩고비와 구분하지 않고 두루뭉수리하게 그냥 고비로 설명하고 있다.
관상 가치 높아 학습용과 조경용으로 이용 최근 들어서는 고비를 관상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화단 같은 곳에 심어 원예용으로 재배하기도 한다. 한번 심어놓으면 잘 죽지 않는 데다 여름내 싱싱하게 자라 관상 가치가 높다. 요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자연 학습장이 인기를 얻으면서 식물원이나 체험 농장에서 고비의 인기는 더해가고 있다. 전북도농업기술원이 재배 기술을 개발해 보급에 나선 적이 있지만 고비를 재배하는 농가는 많지 않다. 경북 울릉도 지역에서는 일부 농가가 1990년부터 재배하여 지역 특산품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아직 소비자들은 고비를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산에서 고사리는 마구잡이로 뜯어 가도 고비는 내버려 둔다. 남녘으로부터 봄소식이 날아올 무렵이면 낙엽 아래서 고비는 이미 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사람들은 3월, 꽃샘추위에 춥다고 호들갑을 떨지라도 고비는 개의치 않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솜털로 싸인 새싹을 땅 위로 힘차게 밀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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