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나무도 사람처럼 어린 시절과 어른 시절의 피부가 사뭇 다르다. 그래서 어린 나무만 보거나 어른 나무만 볼 경우 자칫 다른 나무로 여길 수 있는 나무가 적지 않다. 회화나무의 경우도 그렇다. 어린 회화나무 껍질만 본 사람이 어른 회화나무 껍질을 보면 다른 나무로 여길 만큼 다른 모습이다.
소통과 회화나무
겨울 산은 쓸쓸하다. 겨울 산이 쓸쓸한 이유 중 하나는 갈잎나무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겨울 산도 다른 계절 산만큼 좋다. 내가 겨울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산의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나무들이 빽빽해서 산의 속을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러나 겨울 산은 잎 떨어진 나무 때문에 ‘은밀한’ 산의 속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갈잎나무는 다른 존재와 소통하게 만든다. 소통은 상대를 인정할 때, 한 쪽을 비워둘 때만 가능하다. 어느 한 쪽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겨울을 기다린 뒤에야 진정 산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갈잎나무를 볼 때만 진정 나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상대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갈잎나무를 알아볼 때만 나무를 진정으로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회화나무를 진정으로 아는 시기도 잎 떨어진 겨울일 것이다.
회화나무는 주위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지만, 관찰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다. 사람들이 회화나무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이 나무가 아까시나무와 아주 닮았기 때문이다. 두 나무는 같은 콩과이기 때문에 쌍둥이처럼 닮아서 나무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다.
회화나무의 이름은 이 나무를 뜻하는 한자 괴(槐)의 중국 발음 ‘회’에서 유래했다. 이아주소(爾雅注疏)에 따르면 괴는 회( )와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회는 잎이 크고 색이 검은 것을 일컬었고, 그렇지 않은 것을 괴라 했다. 중국인들이 회화나무를 회라 부른 것은 성장한 이 나무의 껍질에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무도 사람처럼 어린 시절과 어른 시절의 피부가 사뭇 다르다. 그래서 어린 나무만 보거나 어른 나무만 볼 경우 자칫 다른 나무로 여길 수 있는 나무가 적지 않다. 회화나무의 경우도 그렇다. 어린 회화나무 껍질만 본 사람이 어른 회화나무 껍질을 보면 다른 나무로 여길 만큼 다른 모습이다. 어린 회화나무의 껍질은 밝은 색이지만 어른 회화나무 특히 나이를 많이 먹은 회화나무는 껍질이 검다. 나무 목과 귀신 귀를 합한 한자도 나이 많은 회화나무의 껍질을 보고 만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회화나무와 관련해서 꼭 염두에 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의 한자를 느티나무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 나무의 학명을 붙인 린네는 원산지를 일본으로 표기했다.
봉건사회와 회화나무
린네는 회화나무의 원산지를 일본으로 표기했지만 한국의 식물도감 중에는 이 나무의 분포지를 중국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일본이나 중국 모두 회화나무가 아주 많다. 중국 북경을 비롯한 곳곳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게 회화나무다. 특히 회화나무는 중국의 봉건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나무이다. 중국의 주나라 때 존재했던 봉건사회는 땅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게 특징이다. 중국 주나라의 봉건사회는 천자, 제후, 경대부, 사 등이 지배층을, 사 아래에는 백성들이 피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천자에서 사까지의 지배층은 혈연을 통해 아래로 각각 땅을 나눠준 후 조공과 군사 지원 등 일정한 의무를 부과했다.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천자의 군사력이지만 예적 질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대사회의 예적 질서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 나무도 예적 질서를 드러내는 중요한 메타포였다. 고대 중국인들은 관직의 높낮이를 표시할 때 나무를 이용했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삼공을 ‘삼괴(三槐)’라 불렀다. 삼공[三公: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은 중국 주나라 외조(外朝)에 심은 회화나무를 향해 앉았다. 『주례(周禮)』와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삼괴의 좌우에는 붉은 가시나무를 심었다. 흔히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례를 모방해서 만든 조선시대의 ‘삼괴정(三槐亭)’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회화나무는 중국 고대의 공공기관과 아문(衙門), 그리고 전정(殿庭)에 흔히 심었던 나무였다. 특히 한나라 궁중에는 수많은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회화나무를 ‘옥수(玉樹)’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승문원(承文院) 앞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승문원을 괴원(槐院)이라 부른다. 창덕궁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을 바라보면 아주 오래된 회화나무 세 그루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의 회화나무도 이 나무가 갖고 있는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1년 전 내가 만난 창덕궁의 해설사는 창덕궁 내의 회화나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뒤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해설사를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창덕궁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문화유적지에 살고 있는 나무들은 모두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전통시대에는 한 그루의 나무를 그냥 심지 않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덤과 회화나무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무덤까지 나무로 구분했다. 흔히 지금까지 회화나무를 ‘학자수’로 부르고 있는 것도 중국 주나라 봉건사회의 유풍이다. 중국 고대인들이 무덤까지 나무로 구분한 것은 생전의 모습이 죽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중국의 봉건사회 지배층들은 천자의 무덤에 소나무, 제후의 무덤에 측백나무, 사의 무덤에 회화나무를 심도록 했다. 천자와 제후의 무덤과 사의 무덤에 심은 나무는 각각 다르다. 그 중 천자와 제후의 무덤에 심은 나무는 늘 푸른 나무인 반면, 사의 무덤에 심은 회회나무는 갈잎나무다. 늘 푸른 나무와 갈잎나무의 차이는 곧 권력의 차이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존재했던 회화나무의 상징적 의미는 우리나라에도 아주 강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소위 선비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가면 쉽게 회화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중국의 유풍에 따라 곳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 나무를 통해 ‘정신’을 닦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주변에 살고 있는 다른 존재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회화나무는 소나무나 매·난·국·죽처럼 선비들의 글과 그림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진 않지만, 그들의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다.
이른바 선비정신은 나무가 살아가는 태도와 아주 닮았다. 나무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다. 선비도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는 자신의 삶이 곧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준다. 철저한 이기성은 늘 이타성(利他性)을 전제한다. 처음부터 이기와 이타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가 이타를 전제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 누구도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칭송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정신도 그렇다. 선비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은 중국 북송시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다. 이 작품 중 마지막 구절, 즉 ‘천하의 근심은 누구보다도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한 뒤에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는 내용은 언제나 내 마음을 추스르게 만든다.
누구나 근심걱정은 먼저 하고 싶지 않은 반면, 즐거움은 그 누구보다 먼저 하고 싶다. 보통사람처럼 사는 것도 어렵지만, 반대로 사는 것은 한층 어렵다. 선비도 보통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즐거워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 미룰 수 있는 사람이다. 선비도 보통사람처럼 근심걱정을 피하고 싶지만, 먼저 세상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어찌 생각하면 선비의 삶은 참 쉬운 듯하지만, 빡빡한 세상살이에서는 결코 녹록지 않다. 결국 아주 사소한 삶의 태도가 군자와 소인,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을 갈라놓는다. 결국 ‘터럭의 차이가 천리를 어긋나게 하는 이치(毫釐之差 千里之繆)’와 같다.
고향의 회화나무
내 고향 마을 이곳저곳에도 회화나무가 살고 있다. 초등학교시절까지 살았던 초가집 언덕에도 꽤 큰 회화나무가 아직 나를 반긴다. 회화나무의 꽃은 대략 음력 7월 경 연한 황색으로 핀다. 이렇게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 중국에서는 과거(科擧) 시험 중 하나인 진사(進士)시험을 치렀다. 그래서 진사 시험 시기를 괴추(槐秋)라 불렀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러 가거나 합격했을 경우 집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고향 집 언덕의 회화나무는 집안에 과거 시험에 응시한 사람도 없었기에 큰 뜻으로 심은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다닌 고암초등학교 남쪽 담 쪽에도 한 그루의 회화나무가 200여 년 동안 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초등학교 시절 그 나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 회화나무 근처에서 늘 씨름하느라 정신없던 탓이기도 하지만, 식물의 이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려준 선생님도 없었던 시절이라 알 턱이 없었다. 내가 모교에 아주 멋진 회화나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나무 공부를 시작한 후 초등학교 교정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간 뒤였다. 실로 37여 년 만의 일이었다.
회화나무는 괴안몽(槐安夢)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장춘몽(一場春夢) 혹은 남가일몽(南柯一夢)과 같은 단어를 낳은 나무다. 나는 정말 일장춘몽 같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린 시절부터 회화나무와 더불어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만에 함께 갔던 가족들과 초등학교의 회화나무를 안고 지난 세월을 얘기했다. 나는 회화나무와 옆의 느티나무가 나와 친구들의 추억을 먹고 자랐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아주 나쁜 추억을 먹고 자란 나무들도 적지 않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읍성 안의 회화나무는 아주 나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 중 하나다. 60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이곳의 회화나무는 ‘교수목(絞首木)’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나무를 이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조선 말 병인사옥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다. 몇 차례 이 나무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이제 이곳의 나무도 나이가 많아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해미읍성은 한 그루의 ‘교수목’으로 아름다운 성(城)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