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辭
-큰 당숙모님 靈前에 告합니다
오늘 큰 당숙모님 마지막 가시는 靈前에 청주 고향에서 올라온 큰 堂姪 무릎을 꿇고 눈물로 弔辭를 올리옵니다. 돌이켜보건대 큰 당숙모님께서 저희 집안에 시집오실 때 모습이 저로서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되건만 그것이 벌써 80여 년이 가깝게 흘렀는가 보네요. 그간 回甲을 지나 古稀, 米壽, 卒壽까지 자손들과 행복하게 넘겨오셨는데 어떻게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손들과 정을 무정하게 끊으셨나요.
白壽 平生을 지내오시면서 남다른 苦生이 많으셨지만 오늘이 있기까지를 어찌 짧은 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함께 가까이서 뵈었던 당숙모님 모습을 제가 지은 책에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떠나시는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매사에 집념이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농촌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시며 작은 샘골로, 원봉산으로 논밭을 찾아 밤을 낮 삼아 손끝이 다 닳도록 일하시면서 4남매를 장하게 키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재실 고개 넘어 다니시며 첫 새벽부터 반송 음식점을 찾아 걸지도 않은 구정물까지 모두 걷어 오시며 돼지 키워 새끼 내셔서 4남매를 훌륭히 대학까지 공부시키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장한 어머니셨습니다. 여자는 약하다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당숙모님한테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로 孝를 몸소 실천하신 어머니셨습니다. 청춘부터 홀 시아버님을 극진히 섬긴 효부였기에 큰 효부상도 받으셨고 배가 몹시 고플 때 먹을 것이 있다 해도 할아버지 먼저 드려서 잡수셔야만 먹는 것으로 아는 철두철미한 어른존경과 효행을 몸소 실천하시며 자녀들을 가르치신 어머니셨습니다.
조부, 증조, 고조부 제삿날에는 한 번도 빠지심 없이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함께 매운 연기 쐬시며 도란도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도 정답게 나누시며 도와주셨던 그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고 머리가 숙어지며 어머님을 더욱더 그립게도 합니다.
‘母母子子’ 란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다워야 자식 또한 자식답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효성이 지극했던 어머니 밑에 어찌 삐뚤어진 자식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당숙모님께서 지으신 洪福의 덕인 줄 압니다. 그러기에 당숙모님 같은 예의범절이 바르고 솜씨 좋은 며느님이 들어왔으며 큰사위는 큰사위답게 둘째 사위는 둘째답게 막냇사위는 막내다운 훌륭한 사위들을 보신 줄 압니다.
세 번째로 당숙모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기억력이 대단하셨습니다.
동네 사람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생일 날짜는 물론 뉘 집 제삿날, 품앗이 날 마당질 날 심지어는 아무개네 송아지 낳은 날까지도 그렇게 훤하셨는지요. 무언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은 동네 사람들도 토계 댁 대모님께 물어보면 알 것이라 했을 정도니 대단한 기억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네 번째로 집안을 항시 챙겨주시고 아울러주셨습니다. 항시 집안의 안녕과 무사함을 염려해주시고 큰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면 손수 먼 곳에서 먼저 별일 없느냐고 챙겨주시고 전화해 주시는 큰 어른이셨습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인 줄 압니다. 요즘 젊은이들께 귀감을 보여주심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조선 시대의 여성의 거울이요, 본받을 분이라면 ‘신사임당’을 일컫지만, 오늘의 사임당을 뽑으라면 저는 단연 우리 당숙모님이신 정정숙 어머니가 아닐까?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苦盡甘來’란 말이 있습니다. 쓰고 괴로운 것이 다하고 나면 단것이 온다는 뜻으로 당숙모님께서 지난날의 힘겹고 고생하신 보람이 오늘에 福을 지어낸 것인 줄 압니다. 인천에 올라오셔서 자손들 남부럽지 않게 키우신 보람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洪福을 누리시고 지내오신 줄 압니다.
堂叔母님 이제 이승에서의 모든 인연은 모두 훌훌 털어버리시고 저세상에 가셔서 그간 못 뵈었든 堂叔님 만나 편히 쉬시옵소서.
머리 숙여 冥福을 빌면서 큰 당숙모님 가시는 길에
2020년 8월 4일
청주 고향의 큰 당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