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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화 시인의 소시집 서평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다
유 진 (시인)
‘야마천궁의 천인들은 연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밤낮을 삼는다.’
시인이 시작노트에 명시한 구절이다. 야마천궁이란 불교에서 그리는 연화장세계의 모습이다. 교파와 종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뜻은 연꽃에서 태어난 세상 모든 번뇌의 근원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번뇌가 없어진 지혜의 밝은 경지를 일컫는다.
남정화 시인이 신작소시집으로 묶은 「차마, 고도에서」 외 8편의 시적 관점은 오롯이 고통과 갈등에 맞서는 알아차림으로 향해있다.
인생에서의 가장 큰 난제는 행복과 불행을 반복해서 겪게 된다는 것이다. 번뇌의 근원이 탐욕(貪)과 성냄[瞋] 어리석음[痴]에서 비롯되는 오견이나 집착에 있다는 점이 그렇고, 행복에 집착할수록 불행이 커진다는 점이 그렇다. 좋고 싫고(愛惡), 옳고 그르고(是非), 아름답고 추하고(美醜)...등등의 분별을 하게 되고, 그것들로 인해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게 되지만 기실은 모두가 마음작용에 불과하다.
고통과 갈등이 외부의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냉정히 꿰뚫어보면 외부의 요인이 고통을 준 것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발생한 번민이다. 결국 마음이 문제다.
희로애락에서 초탈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세상과 생은 오롯이 행위만 남는다. 행위만 남겨진 알아차림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게나 자유롭다.
시인은 알아차림을 경험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빛과 어둠으로 하루를 인식한다는 시인의 자전축은 규칙적이지 않아도 거침이 없다.
목으로 걷는다
요령을 울리며
네 발은 아뢰야식에 저장해두고
목으로 걷는다.
함부로 난 길을 따라
목을 흔든다.
끄덕 끄덕끄덕…….
자꾸 흔들어댄다
초원을 기억한다.
초원은 끄덕거리는 목덜미를 타고 등을 타고 내려가
꼬랑지에서 춤을 춘다.
말은
걷는다.
무스탕으로 가는 말은
언제나 목으로 걷는다.
초원은 무스탕만큼 멀고도 길다
ㅡ「차마, 고도에서」 전문
차와 말의 교역로였다는 차마고도, 은둔의 땅이라고도 하고 바람의 땅이라고도 하고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척박한 오지라고도 하는 무스탕은 현재 네팔의 영토에 속하면서 자치 왕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곳으로 티베트의 종교, 문화, 생활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산과 산 사이의 좁고 험한 골짜기 가파른 길이지만 협곡의 풍치를 가진 길이다. 참아야 갈 수 있고 목이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이다.
협곡을 걷는 말은 길들여진 말이다. 길들여진 말이 푸른 초원으로 돌아가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길은 멀고도 길다.
아뢰야식은 제8식으로 자아의식의 뿌리가 되는 심층의식을 뜻한다. 불교 유심론에서 제1식부터 제7식까지의 인식은 대상을 대할 때마다, 기분에 따라 바뀌며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자아의식보다도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그 모든 것의 진리를 성찰하는 인식을 말한다. 자신의 아뢰야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모든 행위의 근원을 알 수가 없다. 세상에 길들여진 마음이 자신의 아뢰야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차마고도의 협곡을 걷는 것처럼 멀고도 긴 길이다.
이른 아침 집을 빠져 나간다
산책이라고…….
그러나 이건 드라이브
주파수를 맞추니 just when I needed you most가 나온다
레오 세이어가 부르지 않아도 좋구나
이어지는 로보타 프랫도 좋구나
아, 이런 게 드라이브였구나
나는 왜 이제야 드라이브를 하는 걸까
논두렁에 잡초가 예쁘다
참 푸르다
그리고 미황사 일주문은 새 명찰을 달았다
그 사이 새로운 부처님 들어오신다
ㅡ「변상도」 전문
변상도(變相圖)는 불교경전과 교리 내용을 그림으로 압축하거나 부처님 일대기나 불교설화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한 그림이다. 변상(變相)이란 바뀐 모습이나 형상을 말한다.
늘 지나던 길이 달라 보이고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하나하나가 생경하게 다가온다. 성(性)과 상(相)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시인에게 일어난 변화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는 랜디 반 워머(Randy Vanwarmer)가 부른 올드팝이다. 리오 세이어 (Leo Sayer) 가 불러도 좋고,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0이 불러도 좋다.
자신이 일으키는 상(相)에 따라 외부의 모습은 갖가지 모양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마지막 여정에서
주작 현무 청룡 백호가 쉬어가는 꿈을 꾼다
길상한 기운 등 뒤에 두고 자전축을 돌린
1270년
네 운명은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그 무수한 항하의 모래수와 같구나
ㅡ「와당을 본다」 전문
와당의 끝막음으로 기와지붕은 완벽해진다.
백구대간의 끝, 달마산(達摩山)에서 만난 사찰의 기와와 마구리는 예사롭지 않다.
동서남북의 네 방향,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 하늘 사방의 28별자리의 음양조화를 지키는 신령스런 사신(四神)이 여유롭게 앉은 사찰은 길상한 기운이 돈다.
1270년 주체의식이 강렬했던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몰락 이후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몇 개 종파가 고려시대에 합쳐지기도 하는 등, 불교사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선종인 9산은 중국의 고승인 혜능선사(慧能禪師)가 있었고, 조계종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있었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황실에서 주를 이루었던 화엄종(華嚴宗)을 비롯해 귀족들의 법상종(法相宗), 천태종(天台宗)은 물론 선종까지 포섭하여 교단의 통합을 시도했었지만 내면의 통합이 아닌 외면상의 통합만을 이룬 교단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고, 그 뒤를 이은 지눌은 교리를 통한 진정한 교단의 통합을 시도하는데, 때마침 무신의 집권으로 황실의 교종이 퇴락하고 선종이 지눌의 사상을 타고 완벽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려 800년을 사이에 두고 교종(敎宗)과 선동(禪宗)의 논쟁이 있었고,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주장이 엇갈리기도 했다는 불교의 역사는 무신정권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시인은 무수한 세월을 함께 흘러왔을 와당에서 불가의 무량함을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애호박은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애호박이다
늙은 호박은 애초부터 늙은 호박으로 자란다
해남군 송지면 산정가는 길
네 몸뚱이는 이미 늙어 홀로 영글었구나
늙어야 살 수 있는 네 종족은
어떤 꿈을 가졌기에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냐
ㅡ「호박」 전문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생명은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암수가 다르고, 장미와 민들레가 다르다. 장미는 장미만큼 예쁘고 민들레는 민들레만큼 예쁘다. 애호박은 애호박의 방식대로 누렁호박은 누렁호박의 방식대로 생로병사를 겪는다.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생태환경에 따라 모습이 바뀌어 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 이 또한 성(性)과 상(相)의 비유로 읽힌다.
나무는 몸에 새겨놓았다
가장 강력한 충격을
그는 빅뱅을 전해 들었고
최초의 생물이 출현하는 걸 목격했다
짚신벌레와 고비식물, 선캄브리아를 몸속에 저장해 두었다
대대로 나무의 유전자는 그것을 몸 속 깊숙이 옹이로 박아놓은 채
태연하게 참선하고 있다
나는 오늘에야 그걸 알고
나무에게 절하는 것이다
나무라는 절 한 채
그 무수한 미황사에게
ㅡ「나무의 기억」 전문
달마산 미황사는 묵언수행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749년(경덕왕 8)에 의조(義照)가 창건한 신라시대 고찰로써 사적비에 따르면, 의조의 꿈에 나타난 금인이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던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해 미황사라 이름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시인이 찾은 수행처가 미황사이다.
대대로 부여받은 유전자를 몸 속 깊이 박은 채 온갖 시련을 묵묵히 견디는 나무에게서 의연함을 배운다. 입 밖에 내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묵언 정진이다.
당신, 내게
눈길 주지 않는 군요
눈길은 겨울에나 있는 거지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눈길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중의 불가능이란 걸 알지요
당신, 내게
손짓 한 번 않는 군요
그러나
저 도도한 팽나무는 팽 팽 돌며
바람 속에서 나를 위해
오직 하나인 나를 위해 손짓하는 군요
당신, 내게
발길 한 번 주지 않는 군요
그러나 나는 그 발길 붙잡고 싶지 않아요
돌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 길을 가시고
나는 당신의 발길을 따라 걷겠어요
ㅡ「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전문
미황사 팽나무는 한결같아서 도도해 보인다. 나무의 우듬지는 오로지 해를 향해있다. 다른 삶을 기웃거리거나 방황하지도 않는다.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본연의 생태대로 살아갈진대 삶의 기본권, 자유, 평등을 보장받기 위한 제도나 위선, 갈취, 투쟁 따위로 행·불행을 구분하는 건 인간들뿐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샘 속의 달을 노래한 이규보의 시 ‘영정중월(詠井中月)’을 떠올려 본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山僧貪月光)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甁汲一壺中)
절에 다다라 문득 깨달았다네 (到寺方應覺)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甁傾月亦空)
고려말 무신정권 때의 대문장가인 이규보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결같아서 도도해 보이는 미황사 팽나무는 오직 한곳만을 향한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너는 내게 굳이 노을을 보여 준단다
타오르는 눈빛 허공에 잠시 둔다
네 이마는 언제나 반짝이는 명경 같구나
너는 또한 다른 이에게 말을 걸며
마치 내게 건네는 것처럼 하는 구나
나는 입을 다문 채
노을을 본다
바다는 붉은 선지를 풀어 놓은 것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해는 맹골수도를 돌아 여기까지 와서야 몸을 푸는구나
그래 몸 풀기 딱 좋은 곳
바로 여기 만하당이지
ㅡ「만하당」 전문
달마산(達摩山) 능선의 어느 지점일 것 같다. 해질 무렵 그곳을 지나는 이들은 누구라도 서해에 펼쳐놓는 낙조의 진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맹골도(孟骨島)와 거차도(巨次島) 사이의 호랑이처럼 사나운 물길을 거슬러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해넘이를 보고 있노라면 광활한 경이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풍경에 몸과 마음의 피로를 내려놓게 되는 능선의 해질 무렵....
그렇다, 만하당!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상징적인 이름은 ‘상징’이 숨긴 진실을 알까
그러나 오빠
알고 보니 모든 게 상징이었어
어디에도 상징 아닌 게 없어
은유의 비참함을 알아
마음이 호수 같다느니
푸른 하늘같다느니
그게 무슨 날벼락이야
마음을 너덜너덜한 헝겊조각으로 만들고 있잖아
어쩌면 오빠
이 세상은 은유와 상징으로 만들어졌나봐
진리마저도 은유와 상징너머에 숨어 있잖아
그래서 오빠 환상이 필요한 거야
세상은 환상 속에서 환장하고 있지
어쨌든
난 오빠를 믿어
ㅡ「오빠」 전문
이 세상은 은유와 상징으로 만들어졌고, 진리마저도 은유와 상징너머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외부에서 찾는 자아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전부이라고 여긴다. 내 안에 숨겨진 인간 본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럽고, 고통과 갈등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존엄도 신령스러운 환상도 상(相)이 만들어 내는 마음작용일 뿐, 알아차림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게나 자유롭게 오롯이 남겨진 행위만을 살아가는 것뿐일진대....
물,
너는 좋겠다
이미 뚫었으니
구름,
너는 좋겠다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니
바람,
너는 좋겠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나무,
너는 좋겠다
그토록 태연하니
ㅡ「너는 좋겠다」 전문
( 鳥飛空而 不知空 · 魚在水而 不知深 · 人在道而 不知道 · 眞在中而 不知覺 )
‘새가 허공을 날아도 허공인 줄 모르고, 고기는 물속에 있어도 그 깊이를 모른다. 사람은 도에 있어도 도를 모르고, 진리 속에 있어도 깨닫지를 못한다. ㅡ서산대사.’
마음의 작용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시다.
바람이나 나무나 구름이나 물이나 행위로만 존재하고 생멸(生滅)의 섭리에 순응할 뿐이다.
알아차림은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게나 자유롭다. 하지만 몸을 떠난 알아차림은 없다. 알아차림은 환희심(歡喜心)에만 머물지 않고, 오욕칠정을 떠나지도 않는다. 더러운 것은 더럽고, 사랑스러운 것은 사랑스럽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고, 마음에 상을 내거나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으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어디서 문득 온 거야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너의 세상엔
대체 무엇이 살고 있니
그토록 사랑하던 너의 북극곰은 어디서 잃어버린 거야
달빛도 풀벌레소리도 쩔쩔 끓게 만드는
불덩이를 부둥켜안고
죽어도 죽지 못하는 불길을 날아
끝내 닿고 싶은 그곳은 어디지
사람냄새 물큰한 소줏집 화덕 앞에서
불쑥 내민 네 손을 잡았다 온 밤은
명치가 후끈후끈 아렸어
뙤약볕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치설 다 닳아버린 달팽이처럼
가까이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아득하기만 한
너는 또 내게 무엇이기에
책갈피 깊숙이 넣어둔 푸른 깃털하나를
자꾸만 꺼내보게 하는 건지
ㅡ졸시 「불새 · N시인에게」 전문
언젠가 필자가 남정화 시인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마음에게 놓여나는 것이며, 마음이 마음을 놓아주는 것이다.
이번 소시집 「차마, 고도에서」 외 8편을 읽으며, 가끔 벅차올라 길가의 풀들에게 예배를 한다는 시인의 감사에 동참했다. 지난 12년간 시인과의 인연을 남달리 여기고 있는 필자로서 기쁨과 고마움을 숨길 수 없다.
마침내는 알아차림까지도 놓아버리고, 물이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나무처럼 다만 행위로서만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게서나 자유롭게 여여(如如)하기를 ...... ♧
ㅡ『우리詩』 2019년 12월호
첫댓글 선생님의 해설이 한 편의 드라마와 같고
법문과도 같아서
여기저기 일 이 년 뜸했던 사람들에게까지 퍼다 날랐어요.
호탕하게 읽어내렸습니다.
제게 다시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문장입니다.
언제나 소홀한 저를 이리 품어주시니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치없지만
언제나 깃듭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