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상반기〈우리詩 신인상〉당선작
당선작 : 최선숙「바닷가에서 기다리다」외 4편
바닷가에서 기다리다
저리 동글동글 빛나는
농소해변의 몽돌들, 돌멩이는
수수만년 공양 중인 바다 경전이다
소용돌이치는 바다 한가운데
니르바나의 불빛을 찾아 헤매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티던 날들,
내 옆구리에 출렁이는 물결
맵고 짠 파도의 기록이 촘촘하다
코끼리가 우두둑 달려오는데 도망치다
절벽의 넝쿨을 움켜쥐고 간신히 매달렸던
꿈을 꾼 적 있다
오온五蘊의 안쪽에서 새어 나온 신음소리
귀 대고 들어보면 조약돌에는
그 소리들이 들어 있다
어디를 향해 우리는 가고 있는가
해일 같은 희망은 도착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미명인가
흔들흔들 미로 속으로 우리는 흩어지고
설산의 심장을 뚫고 나온 유빙이 떠다니는
겨울은 텅 빈 적막 눈바람 속
두꺼운 허물을 벗어놓고
흰 조약돌의 사리 한 알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별은 하마 적멸궁 들었는지
가지에 걸린 달을 허공으로 힘껏 당기고 있다
폐경기의 바다
꽃잎이 온몸을 휘감고
붉은 물결 출렁거리던 날
햇살도 바람도 얼마나 눈부셨던가
잠시 눈 감았다 떴을 뿐인데
보리수 늘어선 길을 한 번 건넜을 뿐인데
여자의 꽃 진 자리, 자국이 선명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에서 얼음 알갱이가 만져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붉은 꽃 피울 수 없다
온통 그늘로 뒤덮인 숲처럼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처럼
아무리 뒤척여도
꽃망울 터뜨릴 수 없다
한바탕 웃음보 터지듯
달아오르던 그 꽃잎들 어디로 갔을까
해당화도 유채꽃도 피지 않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서성이던
검은 염소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뭉게뭉게 구름의 신발들은 갈 길 잃고
마른 바람에 코끝이 아려오지만
꽃잎 없이 견딜 수 있다고, 다시
푸르게 차오르는 파도의 꿈을 꿀 수 있다고
소래포구 음악회
관객의 갈채를 꿈꾸며
숨을 고르고 있는 저녁 무렵,
길게 성호를 그으며 달리던
몇 그루의 별똥별을
불러 세우는 소래포구
정갈한 노래 부르던
백만 송이 별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떠나지 못한 별들이, 낡은 커튼 속에서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한다
짧은 날개 파닥이며 흐르던 바람이
퉁퉁마디의 허리를 휘감고 지휘하면
평온했던 기억 안쪽을 더듬다
더욱 붉어지는 화음을 펼치고
아흔아홉 개의 활을 문지르며
보글보글 하얀 음표로
물비린내 뭉쳐 내뱉는 농게
아르페지오 걸음으로
군악대처럼 행진하다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동백꽃
낙화의 허밍에 귀 기울인다
그림자 쪽으로 설핏 기우는
바람의 숨결 따라
초롱초롱 꽃잎 하나
툭, 떨어진다
저 초연한 식물성,
동박새 연둣빛 등 같은
햇살 아래
몸이 천천히 식어간다
사십여 년 전, 불현듯 출가한 2대 독자 외아들의 편지에 아버지는 천천히 주저앉아 거북선 줄담배를 피우셨다 명절날 들려오는 옆집 아들 웃음소리에 먼 산만 바라보시더니, 뇌에 때 이른 동백꽃이 피었다
붉은 흙으로 스며드는
저 혼신의 몸짓
그때 아버지 오래 누운 볼기 아래 욕창에도
피던 동백꽃이 아니던가, 아니던가
그날 이후 환하고도 또렷하게
내게 와 살고 있는 꽃
항아리
뚜껑을 열면,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흥얼흥얼 흘러나오네
참숯과 대추와 햇살과 바람으로
뭉긋이 익어가던 시절이 있었고,
때로는 안팎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흰 곰팡이꽃 아슬아슬 피어날 때도 있었지
동그란 흔적만 남아 있고
도시로 보내진 작은 항아리들,
영산강변에서 조개 캐다 꽃망울 터지듯
쏟아지던 웃음소리 그리고 있을 거야
홍어를 삭히는 동안
발효된 슬픔이 한 겹 한 겹 걸어 나오면
흔들리다, 독한 술로 간신히 다독이던
닷 섬 항아리는 지금 어느 강을 건너고 있을까
아귀가 맞지 않는 틀니가
잇몸을 쿡쿡 찌를 때의 통증처럼
홀로 여위어 가는 항아리 속 적막이
팽팽히 당겨져 부풀어 오르다
마침내 쪼글쪼글 금이 간 늙은 항아리,
노인정 나들이에 모란꽃무늬 브로치 달고
곰탕 내기 민화투 치러 가는
열프름한 웃음이 기우뚱,
기우뚱
2019년 상반기 〈우리詩 신인상〉 심사평
매번 신인상 심사 때 느끼는 바이지만, 심사자는 가슴 설레는 기대를 안고 최종심에 오른 원고를 대한다. 이번에는 어떤 천재가 나의 무릎을 딱 치며 탄성을 자아내게 할 것인지. 위대한 시인의 탄생을 목전에서 누리고 싶은 심사이리라.
그러나 심사의 시간이 길어지고, 원고를 넘기는 손길이 무뎌지며, 작품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둥, 신인다운 패기기 부족하다는 둥, 군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자기 존재를 온전히 투사하는 그들의 언어는 나름대로 진지하고 정성이 배어 있으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한 무엇이 있다. 심사란 으레 기대와 현실 사이의 피하고 싶은 고민의 시간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심사자의 기대란 덧없는 환상이다. 그것은 애초에 없거나, 있다 하여도 크게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진 작품이라면 신인상이라는 타이틀에는 어울리지 않다. 다소 어설프고, 세련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부족하기에 성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기 앞의 드센 물살과 수많은 밤의 가슴앓이를 통과하여 시를 낚는 노련한 어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심사에 임하는 자의 부담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들이 맞이할 대해를 생각하면 오히려 가슴이 탁 트이고 즐거운 마음마저 든다.
올해 상반기 〈우리詩문학상 신인상〉에 응모자는 모두 70 명이었다. 이 중 기준편수에 모자라거나 형식 요건을 갖추지 못한 10 명을 제외하고 평론 부문 두 분과 시 부문 58명이 우리詩 편집위원들의 예심을 거쳐 시 부문 네 사람이 최종심에 올랐다.
김효정 님의 「소멸」 외 9편은 시어의 유려한 맛으로 보건대 공들여 많은 습작의 시간을 거친 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언어의 깊이가 다소 부족하고 각 편의 수준이 들쑥날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안창섭 님의 「드므의 밤」 외 9편은 시에 알레고리가 풍부하고 시 세계가 다양하다. 그러나 산문시가 너무 길어 시다운 맛을 오히려 삭감하고 있으며, 소통이 불가능한 시편도 많았다. 최영철 님의 「재 아래에서」 외 9편은 환유적인 표현의 남발로 언어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표면에 범람하나, 그 이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가벼움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반면에 최선숙 님의 「바닷가에서 기다리다」 외 9편은,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며 이를 내면화하거나, 자기 안의 것을 시적 대상에 실어 표현하고 있다. 비교적 전편의 수준이 고른 것도 장점이며, 그의 관조적인 언어들이 앞으로 넓이와 깊이를 가질 때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신인다운 패기가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상 최종심의 검토를 거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선숙 님께 2019. 상반기 〈우리詩 신인상〉의 영예를 안겨드리기로 하였다. 아쉽게 낙선하신 분들도 나름의 훌륭한 장점과 개성을 지니고 있으니 실망하지 말고 분발하여 다시 한번 수준 높은 작품을 보여 주기 바란다. 아울러 당선자께는 아낌없는 축하와 함께 신인상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시인으로 우뚝 서기 바란다.
심사위위원 < 임보, 洪海里, 임채우, 전선용>
첫댓글 축하합니다, 최선숙 시인님!
훌륭한 시인으로 우리 시단에 우뚝 서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 쓰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최선숙 시인님!
진솔한 시편들 잘 읽었습니다. 문운이 창대하시길 소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시인학교 특강 '단순하고 다양한 나의 숲'
참 좋았습니다.
@최선숙 고맙습니다. 최선숙 시인님! 늘 무탈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축하합니다, 최 시인님!
좋은 시와 시인님 자주 뵙기를 희망합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알몸으로 내리는 비』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