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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자리에서 오래 머물기
ㅡ 시와 시 쓰기에 대한 단상
● 이영광
1.
일반 문장과 시의 문장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시의 운율과 비유, 독특한 언어 운용법과 시어의 함축성 등을 근거로 대답을 내려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의 이러한 요소들의 합으로도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할 때가 있다. 시 언어의 의장을 걸치기 이전에 이미 시의 문장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한 편의 시를 시로 성립시켜주는 시적인 문장들이 있지 않을까.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그 가운데서 마치 감전된 듯 찌르르한 느낌을 받는 곳이 있다면 예외 없이 시적인 것이 들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감전의 느낌을 먼저 받았는데도 그 부위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러한 낱말, 시구, 시행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시의 이런 부위는 비유하자면 압축파일이라 할 수 있다. 압축파일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려면 열어보아야 한다. 이 열어봄이 결국 시적인 것, 시를 시다운 것으로 만드는 요소를 감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예전 시인들은 풍크툼을 자안(字眼)이라고 했다. 시에는 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시의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고려시대의 시인 강일용은 몇 달 동안 천수사 골짜기에 가서 해오라기를 보다가 “날아서 푸른 산의 허리를 가르네(飛割碧山腰) ”라는 시구를 얻었다. 여기서 가를 할(割) 자가 바로 자안이다. 이 한 글자가 이 구절을 시로 만드는 시의 중핵이다. 해오라기가 산의 중턱을 날아가는데 시인은 그때 산의 허리가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산의 허리를 가른다는 이 한 글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면 깨어지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1)
시적인 문장들은 한 편의 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것은 진술, 묘사, 비유 등 시적 발화의 모든 형식들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시적인 것, 시적인 인식이 무엇인가를 제시문의 자안(字眼), 풍크툼(punctum)과 같은 용어들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풍크툼은 부지불식간에 찔러와 마음에 아픔과 감동을 유발하는 무의식의 공격이다. 우리는 자안을, 마음의 일상적 무감각 상태에 균열을 내는 ‘시적 인식’이 담겨 있는 발화 자체라고 일단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비할벽산요(飛割碧山腰)’의 ‘할(割)’ 자는 이 구절의 시적 긴장이 모였다가 풀리는 핵심 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 전체의 구조적 완결성을 좌우하는 지점이다.
자안의 존재를 근거로 시의 시다움을 설명한 건 한시의 오랜 전통이다. 확실히, “가르네”는 여느 낱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사물에 침투하는 지각의 비상한 힘이다. 집을 짓고 전선을 연결하고 등을 달아도 불을 켜지 않은 집을 집이라 할 수 없듯이 눈이 없는 시는 그저 말 없는 말들의 모음에 그칠 것이다. 자안은 우리 시에서는 음절 단위에 한정되지 않고 행과 연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 문장들의 특징은 일종의 비문이라는 데도 있다. 비문은 비문법적이거나 부정확한 문장들이다. 하지만 시적으로는 정확한 문장일 수 있다. 이 문장들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비근한 설명 사례의 하나로 키츠의 소견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키츠는 “사실과 이치를 애태워서 추구하지 않고 불명확, 불가사의, 의심에 그냥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하였다. 분명한 생각의 회피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키츠의 이 문장은 언뜻 보면 시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창작의 실제에서 볼 때 귀담아 들을 만한 충고를 담고 있다. 모호한 자리에서 오래 머물라는 말은 말이 안 나오는 곳에서 자주 막히곤 하는 시인들의 고충과 노력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뚜렷한 자아나 명백한 의식의 작용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시 창작의 핵심임을 꿰뚫어보았다고 할까.
비슷한 사례들은 다른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은 실러를 모델로 한 「힘든 시간」이란 단편에서, 성마르게 생각하지 않는 정신의 개방상태가 창작의 신비에 닿는 방도임을 강조하였다. 생각하면 이미 늦다는 것이다. “골똘히 생각하기에는 그는 너무 깊은 곳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라는 문장이 알려주듯 만은 만족을 모르고 깊은 곳에서 오래 견딜 수 있는 힘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라고 보았다. 궁극 실재인 도를 이른 말이지만, 『도덕경』의 “불가명(不可名)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 시위무상지상(是謂無狀之狀) 무물지상(無物之狀)”이란 문장 역시 시와 관련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이름 붙일 수 없어 무물로 돌아가는 도는 모양 없는 모양이고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이다. 무한한 도를 유한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은 시인의 막힌 자리가, 시의 무한에 직면한 데서 생기는 불가피한 곤경임을 암시해준다. 키츠나 만이나 노자에게 개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개성이 되기 전에 먼저 오는 것, 개성을 끌어안고 양육하며 개성 없는 얼굴로 오는 것, 개성들의 얼굴 없는 어머니로 미리 와 있는 어떤 것이 중요하다.
2.
막힌 자리는 결국 침묵이 지배하는 곳일 터이다. 이곳에선 막혀보지 못한 말들의 발언권이 약하다. 침묵을 스치지 않고 나온 말, 침묵에 고여 보지 않고 급히 나온 말들은 음향에 가까워진다. 그것은 제 마음 속에도 잘 살지 못하는 말이므로 밖으로 나오자마자 머물 데가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다변이 무람없고 느슨한 의욕이라면 침묵은 정신의 험악한 모험이다. 침묵이 무수한 말들을 떠올렸다 죽이고 떠올렸다 죽이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침묵이 끝내 죽이지 못한 말들은 바깥으로 뱉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주위를 침묵시킨다. 막힌 자리가 곧 뚫린 자리라는 점에서 막힘과 뚫림은 동시적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막혀서 괴롭고 뚫려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괴로운 즐김의 상태에 가까워 보인다.
이규보는 이 괴로운 즐거움을 구시마문(驅詩魔文)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시킨 것이다.”2)
시를 쓰는 일이 현실 부적응자를 낳는 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마(詩魔)에 들린 시인의 모습은 시를 쓰는 주체의 노력의 결과인 듯도 하고, 외부의 강력한 실체가 시인을 압도하고 있는 모습인 듯도 하다. 하지만 시인이 일상의 질서와는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시마라는 존재에 대해 시인은 무척이나 수동적인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작(詩作) 과정에서 이러한 상태는 사실 아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지만, 더하든 덜하든 시 쓰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상태를 체험하는 듯하다. 시인은 열정적으로 시에 다가서지만 시를 자기 뜻대로 소유하거나 부리지 못한다. 쟁기에 매인 것이 소가 아니라 사람인 형국이다. 시가 언제나 시인보다 더 큰 것이기에 시인은 열정에 있어서 적극적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수동적 적극성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시인의 정신적 태세가 곧 시를 불러온다. 시마는 곧 시에 대한 열광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의 지은이는, 자신의 문명과 지위가 다 제 공이라는 시마의 주장을 받아들여, 꿈에 사람으로 나타난 시마를 스승의 예로써 대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이어 가면 시를 쓰는 것은 시=영감이고, 시인은 시라는 타자의 낯선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몰입이다. 시인은 영감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금고에 든 돈처럼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꺼내 쓸 수가 없다. 영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시인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감이 찾아오도록 온갖 궁리를 다하는 것이 시인의 할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양미자 씨가 한 편의 시를 쓰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다. 그녀는 서울 근교의 소읍에 사는 가난하고 평범한 할머니다. 어느 날 시를 써보려고 구청의 시 창작 교실에 등록하는데, 그 교실의 강사인 시인은 사물을 제대로 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그녀는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 본다는 것은 그러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일의 방해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손자가 연루된 성폭행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사물을 보는 일에 현실을 보는 일의 중요성을 포개 놓는다. 사과와 꽃과 나무를 보며 ‘시상=영감’을 찾아다니는 일과 성폭력 희생자의 고통을 감당하는 일이 둘이 아니라는 것. 양미자 할머니는 귀신에 홀린 듯 죽은 여중생의 생전의 흔적을 고통스럽게 찾아다닌다.
아이의 영결미사가 집전되는 성당, 범행 장소였던 학교의 과학실, 아이가 몸을 던졌던 다리를 두려움에 떨며 찾아다니는 할머니의 궤적을 영화는 치밀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이 모든 괴로움을 껴안고 숨은 진실을 찾는 일 자체가 한 편의 시를 쓰는 과정임을 사뭇 분명하게 전한다. 죽은 아이의 고통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곧 시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과정에서 관찰법과 표현법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치를 수 있는 거의 모든 고통과 희생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를 쓸 수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꽃과 살구를 보고 만지고 맛보는 일이 의식과 감각의 활동이라면, 꽃에서 피를 보고 떨어진 살구에서 밟힘의 아픔과 다음 생의 기약을 떠올리는 것은 그녀의 무의식의 활동, 랭보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의 작용에 관계되어 있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일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투시한다는 뜻이고 가짜 현실 너머의 현실, 그러니까 죽은 소녀의 고통과 절망을 마음으로 앓는 일이 된다. 영화의 말미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 앞에 양미자 할머니가 서 있으리라는 사실을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통에 다가서기, 죽은 넋의 영접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녀의 시적 기투는 어떤 불가해한 공감능력과 극한의 상상력을 일러준다. 「아네스의 노래」는 첫 연에서는 양미자 할머니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 첫 연의 목소리에는 양미자 할머니의 처지와 노력이 깃들어 있다. 죽은 아이에게 다가서려는 마음이 간절한 물음으로 잔잔히 펼쳐진다.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
하지만 그 다음부터 낭송은 이렇게 아이의 목소리로 바뀐다. 이것은 양미자 할머니가 아이가 되어서, 또는 아이가 그녀에게 빙의되어 말하는 목소리다. 이 지점에서 시인과 죽은 여중생은 적어도 상상적으로는 한 몸이 된다. 양미자 할머니는 “너무 깊은 곳”, “불명확”하고 “불가사의”하고 “의심”스러운 곳에서 어떤 “무물지상(無物之狀)”에 접촉한 것이다. 그녀는 시마(詩魔)에 붙잡힌 채 쟁기를 끄는 노역을 다한 끝에 한 편의 시를 쓰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3.
시인의 막막한 정열이 낯선 시적 주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질적 전환의 순간은 시의 오랜 신비이다. 좋은 시의 좋은 문장들이 태어나는 지점은 언제나 희미한 베일에 싸여 있지만, 드물게 그 경계의 표지석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최선의 말을 찾아 헤매는 시인의 번민은 단 하나의 표정을 찾아 무수히 얼굴을 바꿔보는 배우의 연습과 비슷하다. 개인적인 독서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그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길 발걸음마다
뿌려노흔 그꽃을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 「진달래꽃」 전문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이런 모습이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연 3행의 쉼표이다. 쉼표의 존재로 인해 이 판본은, 그저 운율을 고려하여 '눈물 아니'를 도치한 표현으로 읽기가 곤란해진다. 쉼표는 "~아니"와 그 다음의 문장 서술부 사이에 의미의 단절, 태도의 번복과 철회를 만들어낸다. 눈물을 흘리겠다는 뜻이다. "아니"는 화자의 정체와 시의 상황까지도 고쳐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별의 사태를 받아들이고 꽃 따다 바치면서도 울지 않는 순종적인, 그러나 초인적인 여인으로 화자를 보기도 하고, 사랑의 절정에서 저도 모를 두려움에 언젠가는 닥칠 이별을 상상하는 것이라 상황을 파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에 기대어 좀 비틀어보고 싶다. 이 시의 여성화자는 사랑을 나누지도 가지지도 못한 인물 같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엔 사랑이 있으나 그 대상을 가지지는 못하는 사랑의 약자 같다. 사랑이 제게 없을 때 사랑에 빠진 이의 공상은 흔히 상식의 한계를 넘어선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는 네게 무엇이든 다 해줄 텐데. 그러다가, 이 사랑의 약자는 제 감정에 취해, 심지어 이별까지도 저 지경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고, 날 버리고 떠난다 해도 나는 원망하지 않고…. 그러나 저 혼자 불타는 사랑의 절정에서 문득, 다른 손의 방해가 일어난다. 그의 의식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희미하게 다짐하려 했을 테지만, "아니"가 발음되고 쉼표가 찍힌 순간, 그의 무의식은 그걸 단호히 거부하며 의식의 발언권을 빼앗아 가버린다. 아마도 그것까지 받아들여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살려고 하는 눈물이 화자 스스로도 몰랐던 진심이었을 것 같다. 울지 않겠다는 말은 가라앉고 울겠다는 말은 문면에 떠오른다. 두 목소리는 겹쳐 울리며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의 진실을 드러낸다.
"아니"의 사례를 윤동주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病院)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女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女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病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女子)의 건강(健康)이―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병원」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아파서 병원에 왔지만 의사는 그에게 병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마음의 병일 테지만, 모든 인간이 다 이 병을 앓는 건 아니다. 시대의 어둠이든 인간의 불우든 아픈 걸 보면 걸음마다 피가 나는 이 젊은이는 그러나, 아프고 싶어 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병든 이를 오래 주시한 끝에 그는 그 여자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아니"에 의해서 그의 손쉽고 편하고 습관적인 바람은 급격히 철회된다. 모르는 이의 모르는 병세를 함부로 요량한 자신의 섣부른 생각에 스스로 깜짝 놀라서, 그는 병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제 마음의 병을 엉겁결에 꺼내 놓는 중인 것 같다. 이 당황과 무마의 순간에 깃든 섬세한 떨림은 청진에 잡히지 않던 그의 깊은 환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발화이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그녀의 아픔에 제 것을 포개 함께 앓을 수 있게 된다. 이 시의 화자는 영화 「시」의 양미자 할머니와 흡사한 인물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내 병 네 병의 구분이 아니라 모두가 아프지 않은 세상 자체이다. "아니"는 안이한 시심에 경종을 울리는 '심층의 방해자'를 불러오는, 시의 부적 같다.
김수영은 생의 착잡하고 답 없는 부조리를 거칠지만 섬세한 감성으로 기록하려 애썼다. 그 솔직함은 때로 이런 과격한 말들을 낳는다.
남에게 희생(犧牲)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殺人)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四十)명가량의 취객(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犯行)의 현장(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죄(罪)와 벌(罰)」 전문
영화 보러 나갔다가 중인환시리에 우산대로 아내를 때려눕힌 "범행"을 저지른 인간이 여기 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시로 쓸까 하는, 그 아무나 안 되는 지점이 김수영에게는 흔히 시의 출발선이 된다. 그는 아마 누구보다도 더 '좋은 평판을 받는' 시인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가 그를 자주 다른 데로 끌고 가버렸던 것 같다.
이 사람은 돌아와서 우선 다른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한다. 술 취해 정신을 잃었다가 잠 깨어 일어나, 기억나지 않는 간밤의 술자리를 절망적으로 복기하는 주정꾼의 아침을 보는 것 같다. "아니" 다음의, 지우산에 연연하는 화자의 태도를, 흔히 말하듯 그의 소시민 의식의 투영이라고 봐야 할까? 그런 것만은 아닐 듯하다. 그는 지금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이고, 지우산은 그 지푸라기다. 그의 의식은 지푸라기를 쥐려고 하나 그의 무의식은 그를 붙잡고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지우산 따위에 연연하며, 연연하려 애쓰며, 제 야만이 초래한 절망과 자책의 늪에서 벗어나려 하나,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죄 지은 자의 상태 자체를, "벌"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상태는 손쉬운 빈말 반성문들이 닿지 못하는 깊은 반성의 언어를 환기해준다.
위 시편들의 "아니"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듯하다. "아니"는 시가, 의식과 무의식의 무심결의 협업이란 사실을 암시해준다. "아니"는 통상적인 생각의 흐름을 저지하거나 뒤집어엎으며, 우리가 품었으되 모르고 있던 낯선 생각을 불러오거나, 낯설고 갑작스런 말들에게로 끌고 가버리는 경계에 선 말, 그러니까 시가 출몰하는 문지방쯤에 놓인 말이다. ‘아니’는 아름답고 무섭다. 아니, ‘아니’ 너머에 시의 비무장지대가 있다. 무장은 시가 아니다. 시는 늘 의식의 해제를 요구한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시적 천품의 증거로 보았지만, 비유가 늘 ‘시적인 것’의 보증수표인 것은 아닌 듯하다. 비유가 무엇을 통과하느냐가 문제여서 어느 땐 시가 되고 어느 땐 시에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시적인 문장과 비유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서로 끌어안는 관계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어떤 시적인 인식은 비유에 실려 표현되고, 좋은 비유는 이미 시적인 진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유를 시의 요체라 한 사례를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 포스티노」는 이탈리아의 한 섬에 망명 온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루폴로를 주인공으로 하여 사랑과 우정, 시와 인생의 문제를 잔잔히 풀어낸 영화이다. 시인을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라 여기는 마리오는 제 사랑을 얻기 위해 네루다에게 시를 배우려 한다. 시인의 가르침은 시가 은유(metaphor)라는 것이다. 여자를 꾀려고 시를 읊는 마리오와 그걸 알고도 “은유라는 백색무기”를 전수하는 시인과 또 그 유혹에 넘어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웃고 울게 만든다.
떠나간 시인이 오래 섬을 잊은 동안 배달부는 그가 남긴 축음기에 섬의 아름다움을 녹음한다. 이것을 은유의 실천이라 볼 수 있겠다. 그는 절벽의 바람소리, 성당의 종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소리, 그리고 아직 뱃속에 든 아들의 심장 박동을 차례로 담는다. 그러다가 이 영화의 ‘은유=시’는 놀라운 도약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리오가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마이크를 갖다 대는 순간이다. 그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음악처럼 녹음해버리려는 그 순간에 시는 어떤 통상적인 유비의 궤적을 넘어서버리고, 은유는 다른 은유가 된다. 요컨대 ‘아니’라는 문지방이 지워져버리고 그 너머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메타포의 사례로 황지우의 이런 짧은 시는 어떨까.
마른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 「서풍 앞에서」 전문
두 번의 직유로 간신히 몇 발짝 이어간 단 두 문장. 하지만 이 짧은 중얼거림은 제 실존적 결단의 힘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누름으로써 피로 얼룩져 거덜 난 시대를 구출하여 역사의 반열에 받들어 올린다. 겨울바람 앞의 마른 나무는 수난 받는 인간을 적실히 비유하지만, 정작 시상의 중핵은 일견 말이 안 돼 보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에 들어 있다. 이것은 어떤 뜨거운 마조히즘이다. 예정된 고통을 한사코 외면하던 화자는 어느 순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기 양심의 깊은 소리, 그러니까 다이몬(daimon)의 명령에 기쁘게 붙들려버리는 것 같다. “박해받는”에서 “박해받고 싶어 하는”에 이르는 인식의 질적 전환 과정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지상의 마이크 사이의 거리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처럼 비유가 시가 되려면, 정신의 격렬한 압착이 필요하다. 시인은 제 언어를 행복하게 고문하여 언어 너머로 가버리는 사람이다.
미당 서정주의 초기 시편들에는 정신분열의 소산이라 볼 만한 작품들이 더러 있다. 「서풍부(西風賦)」는 그러한 작품 군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의식의 동요와 해제를 통해 문지방을 아예 넘어가버리면 이런 시가 나오지 않을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 발톱에 상채기와
퉁수 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 서풍부(西風賦) 전문
시의 화자는 환각에 시달리는 듯한데, 그것은 죽은 “나의 여자”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서풍은 저승의 바람이고 여자의 넋은 생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춤을 춘다. 아마도 무속 제의의 장면인 듯 요란한 악기음이 무대에 가득하다. 무악은 본질적으로 강신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무당이 도무하면 악사는 연주하고, 무당이 신을 받고 멈추면 악사도 멈춘다. 신을 불러 내릴 때의 춤은 격렬하고 음악은 요란하다. 무당은 의식의 흥분과 해리 상태를 초래함으로써 정신을 신에게 내준다. 이 시는 여기에 참여하는 춤과 음악 및 모종의 정신 분열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는 이런 상황의 무의식적 기술과 관련돼 있다.
3연의 “서서 우는 눈먼 사람”은 화자 자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음’은 환각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고, “눈먼”은 환각에 완전히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의 역설적 표현이자 그것이 치유하기 어려운 질환임을 암시한다. 그는 불력(佛力)에 기대어 병을 치유해 보려 한 것 같다. 그러나 자비의 화신인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은 눈 감고 잠들어 있다. 관세음보살마저도 도와주지 못하는 극도의 고통이기에 화자는 이를 “정신병”이라 부르고,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병의 근원을 “한바다”로 은유하는 한편,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감옥이기에 “징역시간”이라 규정하였다. 이러한 내면의 상태를 가장 잘 요약한 것은 서정주 스스로가 이 시에 대해 밝혔듯이 “지옥의 긍정”3)일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침묵 속에 깊이 내려가
마음의 어둠에 명멸하는 빛을 건져 오는 일
5.
서정주의 마음의 지옥은 끝까지 가보려 하는 시인들에게는 곧 시의 지옥이기도 하다. 무엇이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는가,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상대를 명확히 한정하는 건 모든 일에 필요하다. 하지만 시에는 복서로 하여금 링 한복판에서 자꾸 제 코너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은 어떤 멈칫거림이 있다. 말리는 손이 있다. 시는 그의 모든 적을 흐리고, 적 앞에서 눈 감는다. 시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를 선언한다. 그것은 어쩌면 절박하고 대책 없는 피신 같은 것이다. 시의 적은, 시의 내부에 있다. 총성과 함께 튀어나가려는 스프린터를 출발선에 주저앉혀버리는 무력(無力)의 손길 같은 것. 그래서 그의 질주를 미칠 듯한 슬로모션으로 바꿔놓는 안 보이는 힘이 있다. 시의 망막에 뿌옇게 먼지를 끼얹는 이 내부의 방해자를 나는 ‘시의 하느님’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침묵 속에 깊이 내려가 마음의 어둠에 명멸하는 빛을 건져 오는 일과 비슷하다. 시인이 수동적 적극성으로 이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으므로 시는 늘 낯선 더듬거림이거나 뜻밖의 단말마이거나 말이 안 되는 말인 때가 많다. 말이 막힌 자리야말로 시인에게는 언제나 새 말이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침묵의 미궁에 빠진 영혼이 어쩔 수 없어 토하는 취한 말들은 시의 문지방을 한량없이 넘나든다.
* 이 글은 반년간지 《푸른시》 16호(2017, 2)에 발표한 원고를 일부 개고한 것이다.
1) 김인환, 「스투디움과 풍크툼」, 『의미의 위기』, 문학동네, 2007, 88쪽.
2) 이규보, 「구시마문」, 『동국이상국전집』; 정민, 『한시 미학 산책』, 솔출판사, 1996, 199-200쪽에서 재인용.
3) 서정주, 「花蛇集 시절」, 『현대시학』, 1991년 7월호, 37쪽.
[출처] [시를 찾아서] #2_ 막힌 자리에서 오래 머물기 / 이영광|작성자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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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공부 많이 했습니다. 침묵 속에서 건져낸 말은 주변을 침묵 시킨다
새해 시복 많이 받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