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世 資贍副使公 之衡
완담지
2006/07/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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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資贍副使公 之衡
족보와 가록에서 모두 자섬부사라 했을 뿐으로 생졸과 사관년대 및 배위성씨과 묘소 모두 전함이 없다.
자섬사는 고려때 楮貨(저화)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데 백관지에 1308(충렬34)년에 충선왕이 제용사를 설치하여 정오품인 지사 이인과 使 4인 및 정육품인 부사 2인이니 사와 부사의 반수는 겸관이고 정칠품인 승 이인의 관원을 두었다가 1310(충선2)년에 관청의 이름을 자섬사로 고쳐서 지사를 없애고 사를 종사품으로 하고 부사는 정오품이며 丞을 주부로 바꾸었으니 정팔품인데 공은 이무렵의 정오품관인 자섬사의 부사요 오래지 아니하여 이 관청이 없어졌다. 1392(공양4)년에 자섬저화고로 복설되었으나 이 해 칠월에 고려 멸망으로 없어진다.
一子 承源
二子 承甫 藝文應敎
예문응교 興德宮(혹은 興福宮) 도감별장이다. 失系한 적이 오래되어 여러 성보들에 동래정씨의 우일파에 대호군 絪이라 기록되어 후손들을 안타깝게 하다가 1837(헌종3)년에야 드디어 고적의 뜻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후손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도움을 얻었도다. 이해 시월11일에 옛 한성부호적에서 “예조판서 정흥사의 부는 증 이조판서 ??이요 조는 대호군 인이요 증조는 예문응교 승보”라는 기록을 찾았기 때문이다. 또 “정인 우계도호지군사 대호군이다. 부는 승보이니예문응교이고 조는 지형이니 자섬부사”라고 했으며 또 만성보에는 “동래정씨 시조 회문의 구대손인 종은 실문제학 좌찬성이며 자에 지형은 자섬부사이며 자에 승원은 예문응교이고 승보도 예문응교”라 하고 승보 아래에 “자에 絪은 대호군”이라고 했다.
또
1362년(공민31)榜目에 “성균진사 정가종은 年이 21인데 본은 동래이고 자는 子因이며 예조판서인데 부는 연덕궁녹사 昇이요 祖는 절대사 絪(인)이며 증조는 흥복도별감장 승포이고 외조부는 동정 문극검이니 본이 남원”이라고 했다. 이렇게 종합하여 昭穆(소목)을 밝힌 것이 1837년이다.
예판 興嗣(흥사)의 장남 坤(곤)은 대사성이고 세종께서 復齋(복재)로 賜號(사호)했으며 복재 곤의 육대손인 膺昌(응창)은 호가 柳巷(류항)이며 덕천서원에 모시고 또 판서인 가종(十三世)의 장남 守弘은대헌이고 사호가 楓川 인데 학천서원에 모시며 풍천 수홍의 후에 장남 俊이 병판이며 손자 克善도 병판이고 현손인 懶菴(라암) 彦臣이 문과하여 좌의정으로 己丑獄事에 被誣(피무)하고 謫所에서 졸하여 潚陽書院(숙양서원:경북 문경군)에 모시며 나암의 손자 世規는 호가 東里이고 이판으로 景憲公이며 또 판서 가종의 육대손인 兵使 見龍이 임란공신으로 彰烈祠에 모시며 또 판서공의 이씨 可安의 손자 이판 崗(강)은 輔國功臣으로 蓬原君이다. 다만 修撰 汝立이 己丑獄事에 伏誅(복주)했으나 재조명되고 있다. 금석문에서는 공을 응교공이라고 하면 형제의 관작이 혼동될까봐 장공으로 받들고자 했으며 공의 후손을 대호군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