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世 判司僕寺事贈戶曹參議公 諧
완담지
2006/07/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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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 判司僕寺事贈戶曹參議公 諧
족보와 가록에 모두 문과하여 판사복사사로 증호조참의라 했으며 가첩에는 奉善大夫神虎衛保勝護軍判司僕寺事 증호조참의라 했고 동국문보에는 “고려 충정왕 2년 경인(1350)에 문과한 정해의 본은 동래”라고 했는데 방목에는 공의 姓諱(성휘)가 안보인다. 백관지에 사복사의 판사는 정삼품이고 고려의 관직에 참의가 없으니 참의는 증직된 조선조의 벼슬이다. 참의도 정삼품인데 삼품관에게 삼품을 가증한 것은 매우 모호한 일이지만 조선조의 추정에 고려조의 관직이 무슨 상관이 되랴. 이는 반드시 동래군이 희선일 때 삼대의 追恩에 참의이었을 터이고 동래군이 자헌인 때에는 마땅히 사조참판으로 다시 가증이 되었어야 하는데 족보와 비와 지에 모두 기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생졸과 사관의 년대는 상고할 글발이 없고 묘는 용궁의 고현산 자좌원 곧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고현산에 있다. 배위인 용궁전씨는 현감이던 順守의 따님이고 할아버님은 仲倫이고 증조는 少尹인 强이며 竺山君 元發의 오대손인데 合지이고 세정은 매년10월16일이다.
일자를 두었다.
子 龜齡 贈吏判 三樹公이니 사적은 완담세덕에 실렸다.
묘표
옛 묘표는 칠대손인 남봉상공 芝衍(지연)이 경상관제사이던 1579(을묘)년 사월에 세웠는데 전면에 대자로 판사복사사동래정해지묘라 했다.
고쳐세운 묘표도 전면에 대자로 판사복사사증호조참의동래정해묘 라하고 그 뒤쪽은 공의 구대손인 지금의 영의정 태화가 일찍 본도의 관찰사 일 때 묘갈이 허물어진 것을 가슴아파하면서 돌을 다듬어 새로 세우려 하다가 임기가 차서 갈려가고 외 구대손인 의성현령 안응창이 이어서 이 일을 이루어 1657년 11월에 세웠다.
또 그 다음 1705년에 세운 묘표는 판사복사사증호조참의동래정해묘라 대자로 쓰고 그 옆줄에 재용궁고현산자좌원이라고 좀 작은 글씨로 썻으며 뒷면은 응교공 묘표의 내용과 같다.
判司僕寺事贈戶曹參議公墓誌
부군의 성은 정씨요 이름은 해이니 계관은 동래에서 나왔으니 호장으로 이름이 지원인 어른의 십대손이시다. 호장이 이름 문도를 낳으시니 역시 호장이며 무덤이 동래의 화지산에 있고 목을 낳으시니 고려의 좌복사이며 그 아드님 택은 문하검교찬성사이고 그 아드님 숭은 검교태자담사이며 그 아드님 지형은 자담사부사이며 그 아드님 승원의 처음 이름은 비 인데 예문응교이며 무덤은 용궁현의 위봉촌에 있으니 이 어른이 부군의 아버님이시고 부군의 무덤은 용궁현 고현산의 자좌오향이며 배위인 용궁전씨는 현감 順守의 따님인데 이 지역에 오래 살아 예부터의 이 지방 사정에 밝은 노인들이 대대로 이어 전하기를 부인의 무덤이 본디 어디 있는지 모르다가 얼마 후에 무덤 주위를 고쳐 다음을 때 묻혀 있던 墓誌가 나타나서 비로소 같은 壙中에 합장된 줄을 알았다고 한다.
부군이 언제 과거하고 벼슬했는지와 생졸한 연월일을 모두 고증할 수 없고 다만 묘표에 판사복사사증호조참의정해지묘라 쓰고 뒤쪽에 공의 구대손으로 지금의 영의정인 태화가 일찍 ..... (중복되어 생략)
고현제사중건기
세상에서 우리나라 사대부 집안의 조상 묘소로 명산을 말할 때 반드시 동래정씨의 용궁 오명산을 드는데 고현도 그 중의 한 곳이다. 우리 십구대조인 고려 판사복사사부군의 묘가 여기 계시고 연이어 후손이 혹은 가까이에 혹은 멀리 종장하여 서로 건너다 볼만한 곳에 있고 수많은 자손들이 서울과 시골에 널리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고 세상에 이름이 들리는 이가 대대로 이어져 빛나는 것은 조상의 음덕 아님이 없나니 세정에 소손이 여기 모이어 제물을 올리고 절하는 것은 조상을 받드는 정성이 대가 지나도 시들지 아니한다. 산하의 좀 떨어진 곳에 본디 띠를 이은 두어 간 되는 劑舍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술해 져서 성묘하고 묵어 가려할 때 매우 어려움이 많아서 원근의 여러 겨레들이 항상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고쳐 지어야지 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1934년에 제사 터가 새로 파는 신풍지에 편입되므로 할수없이 못 뒷의 산 끝에 좀 높은곳을 가려 옮겨 지으면서 헌재목을 버리고 새재목을 사들여서 간살을 옛보다 넓혀 지으면서도 짧은 시일 안에 일을 마쳤으니 진실로 온 겨레가 정성과 힘을 다 바치지 아니했다면 어찌 오늘처럼 새로운 집을 지음에 수월할 수 있었으랴 마침 이 때 내가 기수포와 함께 종중의 유사로서 물력이 모자라서 지붕은 기와를 이지 못했더니 그 사이 기수포가 유명을 달리하니 어이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 아드님 용구군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힘써 주선한 보람으로 몇해가 지난 1946년에 이영을 벗겨 내고 기와를 이었다. 처마끝이 날아갈 듯하고 술숲 사이에 은은한 모습이 선산에 빛을 더하니 모두들 서로 칭하하여 진선진미 라고는 살 수 없어도 여러 대를 두고 경영하던 뜻을 거의 이루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이 어찌 추원보본하는 도리를 다했다고 하랴.
여기 이 제사에 모이고 쉬고 하는 이들은 모두 세월이 오래 흘러도 무너질까 걱정이 없게 하고 제사를 받듦에 모자람이 없게 정성을 다하며 송추를 보살펴 나의 살깟처럼 아끼고 땔 나무꾼과 꼴베는 이들을 경계하여 이 묘역을 보호하고 조심조심하여 잊지 말고 게을리 말아야 비로소 추원하고 보본하여 조상의 뜻을 이어 받든다고 이를 것이다. 시경에 이른 바 조상을 생각하는 효도하는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라 하리니 무릇 우리 종족인 자 어찌 힘쓰지 아니할까보냐.
십구대손 石山 升 謨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