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한말글이름들을 보고
- 이 봉원 (한말글이름을사랑하는사람들 이끔빛)
지난 해 세밑에 국립한글박물관은 『문자혁명(Letters in Print)』이라는 제목으로 매우 아름다운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 책 88, 89쪽에는 ‘백성의 이름을 최초로 한글 활자로 인쇄한 책’이라며 15세기 중엽에 인쇄된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세종 31년, 1449)』의 일부를 사진판으로 소개했다. 세종 임금의 명으로 궁 안에 불당을 짓고 낙성식을 개최하는 과정과 사리(舍利) 분신의 이적 따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훈민정음 사용과 불경 보급의 일등 공신인 김수온(1410-1481)이 편찬한 책이다. 그런데 종이에 활자 인쇄된 이 책에 한자로는 정확히 표기하기 어려웠던 고유어 인명 47개가 한글 활자로 적혀 있다. 한글이 창제 반포되고 3년 뒤에 나온 문헌인데, 지금까지 발견된 고문헌들 속에서 사람이름이 한글로 적혀 있는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어서, 한말글이름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매우 가치가 큰 사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나를 반갑게 한 사실은 15세기 중엽에 우리 조상들은 많은 사람이 한말글이름(토박이말로 짓고 한글로 적은 이름)을 지어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후삼국 시대까지는 모든 계층이 토박이말로 이름을 지었고, 고려 초부터 상류 지배 계층이 이름을 중국식 한자로 짓고 쓰면서, 그때부터 민초들만 토박이말로 이름을 지었다. 평민들이 중국식 한자 성씨를 쓰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로 보이는데, 14-15세기에 이르러선 그것이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에 한자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다.
사리영응기의 이 자료가 두 번째로 내 흥미를 끈 것은 이 책에 한말글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신분인가 하는 것이다. ‘법당 건립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건축비를 지원한 재력가, 건축기술자, 담당 관리, 노역자 들 가운데 어느 사람들일 것이다. 한자 성이 있고 이름만 한글로 적은 것을 볼 때 일단 양반계급은 아닌 듯하고, 농어민 같은 상민이나 천민도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남은 신분은 중인계급으로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목수 같은 건축 기술자 또는 불상이나 범종을 만든 조각가나 불화를 그린 화공일까...? 그런데 중인이란 용어는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썼고, 그 이전의 조선 전기에는 중등 정도의 품격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을 뜻했다는 연구가 있는 것으로 보면, 아무래도 재력가일 가능성이 많다. 요즘도 절에 가면 법당 신개축이나 불상과 범종의 주조와 같은 큰 불사에는 예외없이 재물을 시주한 불교 신자들의 이름을 만세보전토록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사리영응기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대부분이 불당 신축을 금품으로 지원한 당시의 재력가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등장한 이름들의 뜻이 궁금하다. 15세기 무렵 조선에 살고 있던 중인급 신분(양반과 천민 사이의 계급)의 사람들은 어떤 이름을 선호했고,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지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토박이말로 이름을 지을 때 용모나 성격을 드러내는 말, 태어난 장소, 동식물 이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었다. 그런데 사리영응기 47명의 사람 가운데서 같은 이름 7개를 제외하면 40개의 다른 이름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시점에서 이것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림짐작으로나마 그 뜻을 헤아려보자면... 강쇠(강한 쇠), 검동(검은 아이), 고소미(고소한 이), 도티(돼지), 돌히(돌맹이), 막동(막내둥이), 실구디(구덩이), 아가지(아기), 우루미(울보), 타내(탄 애, 검은 아이)... 대충 이쯤 될까 싶다.
* 한글새소식 583호 (2021. 3.)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