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1449년) :
『사리영응기』는 세종 31년(1449)에 간행된 것으로, 내불당(內佛堂) 조성의 과정과 사리(舍利) 분신(分身)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親制新聲’은 세종이 지은 7곡의 악곡과 9편의 악장을 가리킨다. 세종의 ‘친제신성’은, 단순한 노래가 아닌 가(歌).무(舞).악(樂)으로 구성된 정재(呈才)이다. 이 정재는 연꽃·작약꽃.모란꽃을 든 무동의 춤과, 다수의 아악기 및 동발이 포함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점들은 ‘친제신성’이 제 례악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불교의례와 일정정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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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한글박물관 간행 '문자혁명 (Letters in Print) 2020. 12. 29.'에서
* 김슬옹 박사 주석
<사리영응기>는 훈민정음 사용과 불경 보급의 1등 공신인 김수온이 세종 31년(1449)에 지은 책이다. 말년에 세종을 궁지로 몰아갔던 내불당 사건 관련 기록서이다. 불상을 조성하자 바라던 사리가 출현 사실을 기록했다. 책 끝에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는데 한글 표기 이름이 47명이 된다.
김영배․김무봉(1998:주석 16)에서는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1449)>나 <금양잡록(衿陽雜錄, 1492)>,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1471)> 등은 번역을 거치지 않았으나 정음으로 된 부분이 일부(부록)에 지나지 않으므로 책 전체를 정음 문헌으로 보기는 어렵다.”라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세 책 모두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기 전인 15세기 문헌이다. 글자 한 자라도 정음 표기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넓은 의미의 정음 문헌으로 보아야 한다.
“韓실구ㆍ디, 金막”처럼 성은 한자로, 이름만 한글로 적었다. 성별, 이름별 가나다순으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_김슬옹(2012).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역락. 109-110쪽
* 조선 조의 한글 이름을 살필 수 있는 자료 (최범훈 박사 작성 1996)
김수온 | 1449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 47명의 사람 이름이 성(한자)과 함께 한글 이름(서로 다른 이름 : 40명)으로 나와 있음 |
| 1596 |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俉冊) | 성씨가 있는 병정 이름 856명, 성씨가 없는 남자 노비 이름 816명 |
| 1617 |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絳行實) | 효자 이름 1,212명, 열녀 이름 796명, 충신 이름 99명 이중 하층민(노인, 천인) 289명 |
| 1687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言解) | 21명의 이름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음 |
| 1745 | 노비보(奴婢譜) | 노비의 족보로 76가구 200여 명의 노비 상황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