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로커(The Heart Rocker) 혼자 남은 느낌이 들었다. ‘미친개’는 모래바람이 익숙하다. 잠깐이지만 꿈도 꾸었던 것 같다. 라이더 재킷을 입은 어린왕자가 여럿 있었다. 린킨파크의 노래가 울렸고, 어린왕자들은 엉덩이를 씰룩대며 흥을 돋우었다. 노란 스포트라이트가 거꾸로 헤드뱅잉을 했다. 미친개는 저 중에 하나를 골라서 밤새 재미를 보고 싶었다. 비운의 프랑스 작가에게 도덕적 가책을 느끼겠지만, 사랑스러운 보리밭과 푸른 눈, 로큰롤, 흉부외과의 광부들, 그 모든 것. 미친개는 눈을 떴다. 전류가 탁 막히는 소리와 함께 제 임무도 완수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괜찮다. 위험지역을 안전지역으로 바꾸는 일은 매력적이다. 조물주의 산하에서 일하는 사채업자가 된 기분! 빨간 놈과 파란 놈 중 무얼 자를까. 매양 하게 되는 고민이지만,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황무지에서 고작 그런 잡동사니 같은 고민을 하는 꼴도 멋쩍다. 미친개는 정말 미친 개처럼 웃었다. 눈썹에 붙은 모래알이 우수수 떨어져나간다. 빨갛고 파란 전선의 색깔은 동맥과 정맥을 연상케 한다. 자, 근본적으로 자신과 언니의 직업은 같아진 셈이다. 다를 것도 없다, 다만 군복과 수술복, 방독면과 마스크, 황무지와 수술실, 지뢰와 심장. 언니도 빨갛고 파란 걸 잘라본 적이 있어? 우스운 질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록 스타를 위한 무대가 있습니까?’란 질문이 훨씬 그럴 듯했겠다, 미친개는 뒤로 드러누우며 등허리를 태웠다. 애완견 크레이지가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는 꼬리를 흔든다. 사랑하는 팬들 가운데 개를 닮은 사람이 있었지, 아마. 미친개 언니, 사인해주세요. 사인이 없는데 도장도 괜찮나요? 지장이라도. (지장 없습니다.) 그렇다면 혈서라도. 팬들은 ‘미친개 밴드’의 히트곡 ‘발목지뢰’를 요청했고, 여성보컬 미친개는 피까지 쏟아내며 정말 발목을 다 잘라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막 악상이 떠오른다. 나는 왜 아프가니스탄에 와 있는가? 조물주의 앞잡이 노릇이 뭐 그리 재밌다고. 델타, 델타. 열두 시 방향, 중형 지뢰 확인. 제거 바람. 미안하지만 악상을 적어둘 종이가 없다. 마침 새 임무도 생겼다. 버릇없는 무전기는 꼭 ‘델타’라고 부른다. 미친개의 언니도 이름으로 불린 적은 없는 듯하다. ‘야!’라든가, ‘신참!’이라든가, ‘창녀!’라든가. 미친개는 무전기를 두 동강 낸 후 열두 시 방향으로 도마뱀처럼 기어갔다. 아프가니스탄 향신료 냄새를 맡으며, 린킨파크의 연주가 재개되었다. 미친개는 고혹적인 어린왕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발목지뢰’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빈 잔에 술병을 기울여주었다. 술병에서는 술은커녕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별안간 뎅그랑, 소리를 내며 언니의 머리가 떨어져 나왔다. 술잔은 수줍게 잘린 언니의 머리들로 가득 채워졌다. 팔뚝에 불독 문신을 한 어린왕자가 미친개의 왼손에는 술잔을, 오른손에는 가위를 쥐여 주었다. 모든 이들이 술을 권했다. ‘거나하게 취하자!’ 빨갛고 파란 벌레가 안에서 기어 나온다, 무얼 자를래? 여기. 중형지뢰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일전에 변명하기를, 여기 오래 있다 보니 모래를 하도 삼켜서 그렇다고. 미친개는 숨을 참았다. 나 좀 봐봐. 정체는 쉽게 탄로 났다. 멀리서 모래바람이 회오리친다. 돌돌 말린 양피지가 모래바닥에 꽂혀있다. 미친개는 가련한 옛 남자친구의 두상(頭像)과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이네. 나는 평생 쉽게 가지며 살았어. 어렵게 가진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고, 0과 1로 나뉜 이진법처럼 내게는 가진 것 혹은 못 가진 것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날 너의 꽁무니를 밟다가 자갈밭에 넘어진 것 기억나? 피 흘러도 참 좋았었는데. 집 어디엔가 입국허가서가 있을 거야. 네가 끓여준 미역국도. 박제된 목소리와 곡조도. 로커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많은 걸 가질 수 있어서 좋았어. 미친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아서라, 이젠 키스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머리만 남은 너. 위대한 군인은 지뢰제거반의 임무에 착수했다. 빨간 줄, 파란 줄, 동맥, 정맥, 아프가니스탄 국기가 ‘미친개 밴드’ 새 앨범에 수록되었다. 안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냈다. 수술용 가위와 메스가 딸려나왔다. 무전기가 ‘야!’하고 우짖었고, 언니는 녹색의 수술복을 입었다. 같이 자를까? 수술대 위로 왼손이 두 개, 오른손이 두 개 교차되었다. 벙커 안에서는 린킨파크가 재즈를 연주했다. 언니, 언니가 낚싯줄에 물고기 말고 모가지를 매달던 날부터 나는 로커가 되었어. 능숙하게 파란 줄이 술술 잘려나간다. 언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흉부외과 수술실 302호의 알코올 썩는 내는 파란색이었어. 지금 먼 아프리카의 심장에서는 지상 최대의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애초부터 미친개와 언니의 직업은 같지 않았는가, 실은 협업이랄 것도. 어릴 적부터 두 자매는 블루베리를 혐오한 모양이다. 미친개는 미친 개처럼 웃기 시작했다. 언니가 ‘발목지뢰’의 후렴구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리리라리라, 라라라라리라리라라리라, 라라릴리라……. 빨간 줄이 잘렸다. 중형지뢰는 이차돈의 머리처럼 허연 모래를 분출하며 푹 솟아올랐다. 두 자매는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모래가 잔뜩 들어갔다. 목이 무사한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곤히 잠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통 밴드가 장송곡을 연주하고 미친개는 잠에서 깨어났다. 황무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애완견 크레이지가 모래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핥아주었다. 무전기는 부하의 임무 완수를 축하(안도)하고 있었다. 델타, 델타! 언니가 있던 자리에는 웬 CD 한 장이 남아있다. 미친개는 모래로 범벅이 된 CD를 핥아주었다. 거기에는 빨간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미친개 밴드 2집 타이틀곡, 흉부외과 피처링. |
첫댓글 모티프가 된 영화보다도 더 생생하고 강렬한 이미지!!!
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