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도 사
- 고(故) 전봉주 선생님을 기리며 -
이 자리를 빌려 감히 외람되게 고(故) 전봉주 선생님을 한 마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저는 ‘열정’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보다 더 전봉주 선생님과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요? 자신의 열정으로 우리 모두의 허함을 채워주셨던 선생님. 부산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해 왔던 수많은 일들이 전봉주 선생님의 열정이 없었더라면 과연 가능했을까요? 전봉주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진심 가득한 관심과 애정, 그것이 없었다면 저는 인문학연구소에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전봉주 선생님께서 제게 짧은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속에 ‘삶을 매듭지으려 한다’는 표현이 있었지만, 저로서는 이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과 연관된 그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봉주 선생님의 ‘형님’이셨던 이부현 교수님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 표현이 상상하기 어려운 그 표현이 맞는가?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제 문자 메시지를 통해 부음을 들으신 거의 모든 선생님들도 저와 마찬가지였으리라 느낍니다. 그저 ‘이건 아닐 거야?’, ‘아니 이럴 수는 절대 없지’, 이런 생각의 도돌이표 안에서 공황 상태에 빠지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선생님께서는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전봉주 선생님께서는 타고난 철학자였습니다. 누구보다 정치하고 세심하게 텍스트를 해석해 내셨고,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아름답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내셨습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눈과 마음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이런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인문고전대학’이라는 시민 인문 강좌를 부산을 대표하는 인문학 강좌로 만드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문고전대학에 대한 수강생들의 깊은 애정은 이부현 교수님과 전봉주 선생님의 인격과 학문적 깊이 때문이었겠지요. 장례식장까지 찾아오셔서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었던 인문고전대학 여러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10주년을 맞는 인문고전대학을 더는 전봉주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 절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정치한 학문적 이해를 학생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표현해 주신 선생님의 강의는 말 그대로 명강이었습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선배 학생들이 후배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하는 교양 강의 1순위가 전봉주 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선생님 강의를 들으려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 초롱초롱 빛내는 어린 제자들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혼자 떠나실 수 있었던가요? 그 어린 제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두려울 뿐입니다.
성실하고 탁월한 연구자였지만, 안타깝게도 선생님의 연구는 결과물로 우리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성과 사랑’이라는 강의용 책자 하나가 출판된 연구 결과물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선생님께서 연구하신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전봉주 선생님께서 다 전해주지 못 하셨던 마음을 누구나 엿보고 감동할 수 있도록 결과물을 생산하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선생님의 마지막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아니라 새로운 위로와 격려, 세상을 전망하는 새로운 눈을 갖게 만드는 일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전봉주 선생님. 한참 나이 어린 제가 슬며시 ‘봉주야’라고 부를 때면 늘 부드럽고 인자한 눈웃음으로 ‘그래 와?’라고 응답해주시던 선생님을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쯤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지금도 제 곁 어딘가에서 찬찬히 저를 쳐다보고 계실 것 같은 선생님을 어떻게 먼 곳, 저 먼 곳으로 보내드려야 할까요?
그러나 제 슬픔을 억누르고 이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잘 돌아가십시오. 가볍게, 평안하게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이 부르면 언제나 꼭 대답해 주십시오. 우리들이 무슨 고함을 지르든 잘 들어주십시오. 우리에게 선생님은 영원히 돌아가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영원한 자유 속에 평안함을 누리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016년 3월 10일
후배 이동문
첫댓글 지금..영락원에 계실 시간이군요.
혼자서 책으로만 대하던 인문학을 처음으로 강의로 접한것이 10년 전, 인문고전대학 제1기때의 전봉주 교수님의 하이데거 강의였습니다. 두 시간 강의 중 잠깐 주어지는 휴식 시간까지 교수님께 평소 궁금해하던 것들을 질문드리곤 했습니다. 다른 수강생한테 선생님의 휴식을 방해하는 무례한 학생이라고 야단을 맞았습니다만,교수님께서는 나무람은 커녕 기쁜듯이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셨습니다.당시의 교수님 모습은 이후로도 한결같으셨고 지난 달 모임에서 뵐 때까지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무엇이 전봉주 교수님을 그렇게 서둘러서 가시게 했을까요? 이해도 안되고 아직도 먹먹하기만 합니다.
저도 사람을 통해 인문학을 처음 접하면서 첫 만남이 전봉주 교수님이었고, 인문학이란 참 따뜻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학문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바로 전봉주 교수님에 대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 시월 밀양에서 도끼로 나무를 패면서 "마님"놀이도 하며 재밌게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합니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로 집에 돌아오면서 독서토론모임에 대해 같이 얘기나누며 함께 쭈욱 하면 좋겠다 했었는데 이제 어쩌나 싶습니다. 백화경님 말씀대로 항상 중심을 잡아주시면서 독서토론을 참 잘 이끌어주셨는데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안 계신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이럴수가~~!! 저는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직장암) 모든것을 잊고 다른생각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늘 걱정하여 주시며 병문안도 해 주시고 참으로 다정하신 교수님 이셨는데 그저 할말을 잊고 맙니다.앞으로 제가 어떻게 처신 해야할지 조용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삶에 회의와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인문학 강좌를 기웃거렸습니다. 2년 전 인문고전대학에서 전교수님을 만났고 털털한 미소와 조금은 촌스러운 아저씨의 모습으로 삶에 대해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같은 해맑은 미소와 산을 좋아하시는 모습에서 삶을 긍정하신 분이라 여겼었는데 우리를 향한 미소 뒤에는 어떤 고독과 단호함이 있었던걸까요~~왜그리 가는 길 서두르셨냐고 혼잣말을 해보았지만 답없는 메아리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낯 설고 물 선 서울로 갑자기 오게 되니 익숙치 않은 환경이 주눅들게 합니다. 다들 그립습니다.그곳에 전교수님도 함께 계실 것만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