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 모르는 지혜 -김형석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옛날 아라비아의 어떤 상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세 아들을 불러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라고는 말이 열일곱 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습관에 따라 똑같이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까 맏아들 너는 열일곱 마리의 반을, 둘째 아들 너는 전체의 3분의 1을, 그리고 막내 아들 너는 전체의 9분의 1을 갖도록 해라."고 유언을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할 삼형제 간에는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해결할 길이 없었다. 맏아들은 열일곱의 반으로 아홉 마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홉 마리는 2분의 1이 넘으니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덟 마리 반이 되지만 반 마리는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여섯 마리를 가져야 한다고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형과 동생은 다섯 마리밖에는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막내 아들은 두 마리를 가져야 한다고 욕심을 부렸다. 그러나 형들은 두 마리는 열일곱의 9분의 1이 넘으므로 우리들만 손해를 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싸움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누구도 만족스러운 해결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들의 집 앞을 한 목사가 지나갔다. 세 아들은 그 목사에게 아버지의 유산 문제를 해결지어 주도록 청을 드렸다. 누구도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목사는,
"그러면 이렇게 합신다. 내가 타고 온 말 한 마리를 당신들에게 드리지요. 그러면 열여덟 마리가 될 것입니다. 맏형은 그 2분의 1인 아홉 마리를 가지시오. 둘째는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여섯 마리를 가지시오. 그리고 막내는 9분의 1에 해당하는 두 마리를 차지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네 세 사람은 모두가 아버지의 약속된 유산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 아들은 모두 만족했다. 목사가 얘기해 준 대로 자기들에게 돌아올 말들을 찾아가졌다. 일을 끝낸 목사는,
"그러면 나는 다시 길을 떠나야겠습니다."는 인사를 하고 걸어서 대문 앞을 나섰다. 바로 그 때였다. 한 아들이 뒤따라 나오면서,
"목사님, 말을 타고 오셨다가 어떻게 이 사막길을 걸어가실 수가 있습니까? 외양간에 가 보니까 아직도 한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이 차지할 것은 다 차지했는데도 한 마리가 남았으니 이 말을 타고 가십시오." 라고 말했다. 목사는,
"그렇습니까? 나에게 한 마리를 다시 주신다니 타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을 탔다. 타고 보니 그것은 조금 전 타고 왔던 바로 그 말이었다. 아들들은 목사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목사는 아까와 같이 자기 말을 타고 갔다. 생각해 보면 세 아들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젊은이들이었다. 목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라도 싸우다가 무슨 결과를 가져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세 아들만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해 가고 있지 않은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정치가들이 정당 싸움과 감투 싸움을 하는 꼴도 비슷하고, 경제 사회에서 이권을 다투는 사람들의 심정도 거의 마찬가지다. 삼형제의 싸움 때문에 선조들의 뜻을 버리고 집안이 망해 가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선조들의 정신적 유산을 짓밟고 불행을 향해 달리고 있다.
왜 그런가? 한 가지 마음의 결핍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기보다 이웃에게 주려고 하는 사랑의 결핍이다.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은 둘 다 잃어 버리지만 주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잘 살게 된다는 원칙을….
여기 두 사람의 장사꾼이 있다고 하자. 갑은 '어떻게 하면 싸고 질긴 물건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물건을 생산하며 판다. 이에 반하여 을은 '좀 나쁜 물건이지만, 속여서 이득을 얻을 수 없을까?'하는 생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5년, 10년 후에는 결과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날까? 갑과 같은 실업인이 많은 사회와 을과 같은 실업인이 많은 사회는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과거에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가지려고 애써 왔다. 이웃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찾아 누리는 사람이 그만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이웃들과 더불어 소유하며 한가지로 즐길 수 있을까를 모색해왔다. 오늘 우리는 그만큼 못 살고 있으며 그들은 그만큼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수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이러한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목사가 한 마리의 말을 싸우는 형제들에게 주었듯이, 우리들도 무엇인가를 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자신에게도 손해가 없음 이웃에게도 도움이 되는 무엇을 남겨줄 수 있는 삶의 자세와 바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문제는 누가 먼저 그 뜻을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 이해와 감상
이 수필은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해 버릴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수필이다. 작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라도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이 범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삼형제의 유산 분배 과정에서 보여주는 행태는 단순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작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 형제간의 우애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을 것이고, 언젠가는 후회의 쓰라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화 속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은 복잡하고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현실적인 이익보다는 사랑과 이해를 지켜나갈 수 있는 지혜로움이 필요할 것 같다.
앞부분의 우화와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다소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우화가 가지는 속성상 충분히 숨겨진 의미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것 또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 요점 정리
◆ 성격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시사적 수필
◆ 주제 :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의 여유와 지혜로움
◆ 출전 : <김형석 에세이집>(1968)
■ 생각해 보기
1. 앞부분의 이야기, 즉 우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⑴ 왜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집행하지 못했는가?
→ 아버지가 원한 형제간의 우애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고, 다만 수학적으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⑵ 유언은 어떤 이유에서 형제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는가?
→ 수학적으로 배분하였기에
⑶ 아버지가 그러한 유언을 남긴 이유는?
→형제간의 사랑과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
2. 앞부분의 이야기(우화)와 뒷부분의 주제와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잘 되는가?
→ 얼핏 보면 다소 어색한 면이 있지만,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화는 꼭 한 가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 여러 부분의 지혜를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