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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청원 : 탈출 32,30-35
탈출 32,30 직역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그 백성에게
바로 너희들이 그 큰죄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올라갈 것이다 야훼에게
혹시 내가 속죄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의 죄를 위하여
구약에서 속죄하다, 라는 개념에는 두가지가 공존합니다.
구약의 속죄의 개념
① 정화 ② 화해
또한 구약에서 속죄하다, 는 제의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죄로 인해 부정한 상태가 된 사람을 정화하는 의식, 그리고 죄로 인해 틀어진 관계를 화해하기 위한 의식이라는 의미가 속죄하다,라는 개념 안에 내재합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아, 그러니까 모세가 다시 하느님께 가서 속죄 의식을 거행하겠다는 이야기구나.' 라는 뜻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정화되고 그리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겠구나. 라는 뜻으로 30절을 이해하게 됩니다.
탈출 32,31 직역
그리고 모세는 돌아왔다 야훼에게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금의 엘로힘
금송아지라 아니라 금의 엘로힘, 금신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엄청난 역설인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상을 만들지 말고 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말고 이런것들을 계명으로 내려주는데 금신을 만드는 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우리도 같은 생각을 해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70년대말 80년대 초반에 젊은이들이 많이 불렀던 '금관의 예수'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민기라는 분이 쓴 노래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금관을 그 예수님 상에 씌워 놓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어떤 세상의 불의함 또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 이런 것들이 그 안에서 묘사되는 따라서 구약의 금송아지 사건이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세속적인 모습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에 그런 잘못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아픈 마음으로 이 구절을 저희는 읽게 됩니다.
31절은 아! 라는 탄성으로 시작하는데 이 탄성은 모세의 청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드러냅니다. 백성의 큰 죄는 금의 엘로힘을 만든겁니다.
수송아지라는 단어는 발견되지 않고 그 수송아지가 야훼를 상징한다는 진술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이 다른 신의 신상을 만든것 처럼 야훼에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백성은 어떤 신의 신상을 만든겁니까? 아론의 변명 안에서는 야훼의 신상을 만든겁니다.
하지만 어떤 신상도 야훼의 신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신상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긴 것이다. 라는 모세의 이해를 31절에서 보게 됩니다.
구약에 있어서,
모든 속죄 행위의 중심의 출발은 범죄에 대한 엄격한 고발과 고백 입니다. 그것이 속죄 행위의 출발점입니다. 만약 고백 성사에 들어가셔서 '신부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그것도 죄가 됩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죄에 대한 충분한 성찰 내지는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왜 죄인지....
'제가 뭘 잘못했어요.' 라고 한다면 죄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지를 모르는.... 그것을 분별할 수 없는 '그게 왜 죄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와 같은 모습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어떤 불편한 진실일 것 같습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내가 이정도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라는 겁니다.
'내가 이정도 돈을 갖고 있으면 그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내가 이정도 지위를 갖고 있으면 그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어떤 우리 사회에 그런 모습이 지도자 층에서는 사실 우리 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그런 어떤 모습들, 신부님이 사제 생활 하시면서 딱 한번 어느 신자분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어느 본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시는데 그래서 식판을 들고 음식을 받아 먹어야 되는데 어떤 봉사자가 '신부님도 여기 서세요!' 그 말씀을 듣고 참 기분이 좋으셨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은 본당에서 그런 행사가 있을 때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참석하시는 그러한 특권에 익숙해 지셨는데, 그런데 그날은 그분의 말씀에 기분이 좋으셨다고 합니다. 몇번 그러한 것을 하다보면 사제들이 그것에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모습들, 아무튼 여기서는 구약에 속죄 행위에 대해서 그 범죄에 대한 엄격한 고백과 고발이 필수적인데 31절에서 바로 이렇게 모세가 백성의 큰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31절 : 모세가 백성의 큰 죄를 고백함
탈출 32,32 직역
그러나 이제
만약 당신이 이제 그들의 죄를 들어 올린다면
문장이 이상합니다.
탈출 32,32 직역
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를 지우십시오 제발
당신의 책에서
당신이 쓴
여기서 만약 당신이 그들의 죄를 들어올린다면, 죄를 들어올린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들어 올린다 : 용서한다
죄 지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 숙인 고개를 '괜찮아.' 그러면서 다시 들어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을 용서해 주신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겠습니다. 라는 주절은 생략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죄를 들어올린다면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도 지우십시오. 제발, 나를 지우십시오. 당신의 책에서, 당신이 쓴,
이렇게 모세는 이 대목에서 백성의 운명과 자신을 함께 묶습니다. 묶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의 연대의 개념입니다.
야훼의 책에서 자신을 지우라고 하는 것은 '죽음' 을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각 민족의 신은 자신에게 속한 인간의 운명을 적은 판( 일종의 토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일정한 구성원들에 명단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1장~4장, 에제 13,9절
에제 13,9
º 거짓 환시를 보고 속임수 점괘를 말하는 예언자들에게
나는 손을 대겠다.
그들은 내 백성의 모임에 들지 못하고
이스라엘 집안의 명단에 오르지 못하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명단에 없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라는 대목입니다. 또는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은 아마도 잊지 않기 위해, 분명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백성의 범죄와 같은 사건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사 65,6
º 보라, 이것들이 내 앞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기어이 되갚으리라.
그들의 품에다 되갚으리라.
예레 17,1.13
º 유다의 죄악이 철필로 기록되었다.
금강석 촉으로 그들의 마음 판에,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
º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예제 2,9-10
º 그래서 내가 바라노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º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았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결국 에제키엘 예언자는 그 두루마리를 받아 먹습니다. 하느님의 비탄, 탄식, 그리고 한숨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탈출 32,33 직역
그리고 야훼는 모세에게 말했다
누구 나에게 죄지은
나는 그를 지울 것이다
나의 책으로부터
여기서 얘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은 했지만 그런데 잘못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거 가지고 벌은 주겠는데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만 잘못한 만큼만 벌을 주겠다. 라는 그런 뜻으로 따라서 단체 기합이 아닙니다.
모세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벌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은 함꺼번에 벌받는 그런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테마가 34절부터 바껴 나갑니다.
탈출 32,34 직역
그리고 이제 인도해 가라 그 백성을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보라 나의 천사가 갈 것이다
너의 면전에서
여기까지가 34절의 전반부입니다.
탈출 32,34 직역 (후반부)
그리고 나의 셈의 날에
나는 셈할 것이다
그들에 대해
그들의 죄를
하느님이 두고보자고 한것 입니다. '아직 셈 안끝났어.' 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송아지를 갈아서 재로 만들어서 빻아가지고 사람들에게 마시고 그 다음에 레위인들이 진영에 들어가서 왔다갔다 하면서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려 3천명이나 죽이고 그랬는데 아직 또 셈할 것이 남아있는 겁니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본다면,
이 명령은 이스라엘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려는 야훼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야훼는 시나이 산에 그냥 남아있게다는 겁니다. '난 여기있을께. 야! 이제 제발 좀 가..' 라는 하느님의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그런 어떠한 상태임을 전해 줍니다.
그것이 백성을 부를 때 '그 백성을' 이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도해가라, 그 백성을' '내가 약속한 것은 있으니까, 그것은 줄께.' 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풀렸다면 '내 백성을' 이라고 해야 합니다. 라는 그런 어떤 어감입니다. 모세는 그들을 인도해 야훼로부터 떠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야훼가 아니라 천사가 모세 앞에서 가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야훼가 다시 백성을 찾는 날, 야훼는 백성의 죄를 셈할 것입니다.
그 백성이 먼저 갈거고 천사가 인도할거고 그리고 나서 그쪽에 가 있을 거고 그 다음에 언제가 야훼 하느님이 백성을 다시 찾아가지고 옛날에 셈하지 못한 그 외상값을 다 받을 거다. 라는 말씀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탈출기 23장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탈출 23,20
º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분명히 그 앞선 대목에서도 하느님이 직접 가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보내겠다. 라는 뜻으로 그런 내용이 어렴풋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왜 ? 야훼는 이스라엘을 스스로 인도하지 않고 천사를 보낸다고 하는 것일까?
① 이런 이스라엘의 죄때문에 야훼가 실망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요 대목에서는 우리가 어떤 뜻을 알아들을 수 있냐하면 하느님은 하늘 나라에 있고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천사가 요청되는 그와 같은 이중적인 틀로 우리들이 천사의 등장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셈하다 라는 동사의 본래의 의미는?
방문하다, 찾아오다(상벌의 개념이 내포됨)
그 방문의 목적은 옳고 그름을 따져 셈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동사에는 상과 벌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셈의 날은 언제일까?
가깝게는 모세의 시기에 있었던 어떤 재앙의 날을 뜻할 것이고 멀게는 베텔과 단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던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탈출 32,35 직역
그리고 야훼는 해쳤다
그 백성을
그들이 그수송아지를 만든 것에 대해서
아론이 만든
이 35절의 내용은 현재 일어난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 언제가 야훼께서 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고,
탈출기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코멘트처럼 붙인 것입니다.
'아! 너희도 알지 나중에 진짜로 이런일이 일어났던 것. 그게 뭔줄 알아? 왜냐하면 우리들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자마자, 이런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짓고나서 하느님께서 나중에 셈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나중에 셈한 결과가 바로 이 재앙이야. 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확히 저자가 독자들에게 하는 그 말이 35절인데, 어떤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몇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유다 전통은 속죄의 날이라는 일종의 특별한 날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욤키푸르 라고 부릅니다.
욤(יום)은 날이라는 뜻이고
키푸르(כיפור)는 속죄한다는 뜻입니다.
속죄의 날(יום כיפור 유다 전통) : 단식과 기도를 하며 한해의 죄를 속죄하는 날
카파르(כפר),라는 동사와 함께 욤키푸르 라는 날이 있습니다. 단식과 기도를 하며 이날은 한해의 죄를 속죄합니다. 근데 그게 유다 달력으로 보면 어떤 뜻을 갖고 있냐하면? 유다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시작이 두 번입니다.
유다 전통의 옛 달력은 한 번은 춘분을 중심으로 시작을 하고 한번은 추분을 중심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이 욤키푸르의 전통은 추분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달력과 관계가 됩니다.
일곱 번째달을 히브리 말로 티슈레이(תשרי)라고 하는데 그 일곱 번째 달에 첫번째 날을,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한해의 머리라고 합니다.
▶ 로쉬: 머리(ראש),하샤나(השנה):한해 우리로 얘기하면 새해입니다.
티슈레이의 첫번째 날이 로쉬 하샤나 이고 열 번째 날이 욤키푸르 입니다.
따라서 1월 1일부터 1월 10일까지, 1월 1일은 새해고 1월10일이 속죄의 날인데 이때 유다의 전통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냐하면 그 열흘동안 야훼 하느님이 생명의 책이라는 책을 기록합니다.
새해 첫날~ 10일( 속죄의 날)
º 야훼께서 생명의 책을 기록하심
º 한 해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를 기록함
어떤 데이타를 바탕으로 기록하냐면 그 전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로 일종의 셈을 하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주고, 열흘 동안 하느님이 적습니다. 일종의 채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마지막 날인 욤키푸르 입니다. 따라서 이 열흘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속죄 행위를 하는데 이 열흘 중에 마지막 열번째 날인, 욤키푸르때 단식과 기도로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 날을 그렇게 비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하는 기도와 비슷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판공 성사를 받을 때 마다 '주님, 지금까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라는 그런 어떤 하느님의 용서와 그 하느님의 그런 축복을 비는 따라서 한해를 시작해서 열 번째 날인데,
왜 열 번째 날이냐? 그 열째 날동안 하느님이 기록하는 날이고 그 하느님께서 그 생명의 책에 잘 기록해 줘야지, 한 해의 삶이 평안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 전통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어떤 민간 전통이라고 하는 유럽에서 보면은 12월 31일을 실베스타 라고 부르는데 어떤 성인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성인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폭죽을 터뜨립니다.
유럽 전체에서 엄청난 양의 폭죽을 터트립니다.한해 동안 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에, 그런데도 하여튼 도시가 떠나가라 폭죽을 터트립니다.
그게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악한 악령들을 놀래켜서 쫓아보내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새해가 되면은 옛날에 쥐불놀이를 했습니다.
쥐불놀이가 갖고있는 의미는?
악한 영들을 마을로부터 쫓아낸다. 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구약에만 생명의 책이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생명의 책이 언급됩니다.
필리 4,3
º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지여, 이 여자들을 도와주도록 그대에게도 당부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었던 생명의 책, 그것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우리가 하느님께서 생명의 책을 갖고 있다고 볼수 있겠다. 이런 식의 어떤 생각이 필리 4,3에서 엿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생명의 책은 묵시록에서 반복되서 언급됩니다.
묵시 3,5 ; 13,8
º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 할것입니다.
º 세상 창조 이래 땅의 주민들 가운데에서, 살해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생명의 책은 야훼 하느님이 아니라 살해된 어린 양의,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책에 무언가를 적어 넣을수 있는 그와 같은 권한, 그 신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묵시록은 고백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복음에서도 발견됩니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72명의 제자를 파견합니다.
어떤 사본들은 70명의 제자라고도 합니다. 구약에서 70명, 72명 왔다갔다 한다. 여기서도 같은 숫자에 혼용을 볼수가 있습니다.
루카 10,17-20
지상에서 나쁜 영들이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너희가 기뻐할 것은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들의 이름도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세례받는게 바로 하늘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름은 기록되어 있는데, 학교에서 보면 그 밑에 담임 선생님의 의견란이 있습니다. 출석부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쓰여있을까?
생각해 보면 잘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한해를 살아오면서 지금까지를 되짚어 보면 금년 한해 신앙인으로서 계획한 것들을 잘 이루면서 살아왔는지 그렇치 않은지 오늘 배운 텍스트에 동사를 사용한다면 “셈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삶 전체를 보면서 신부님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하시는데요. 신부님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안에서 굉장히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신부님을 위해서 목숨 잃은 돼지들. 그리고 많이 죽어간 소와 닭들, 많은 풀들이 땅으로부터 뜯겨져 나왔고,
그리고 많은 농부들이 농사를 지었고 그것을 또 누군가가 밥상까지 올려주었고 그리고 신부님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운전해 주었고, 많은 이들이 함께 해준 시스템으로 오늘 이렇게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데 단지 돈의 가치를 떠나서 그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수고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수고해 주고 있는 만큼 나도 그럼 세상을 위해서,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의 어떤 수고로움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위해서 사용되는지 또 그와 같은 것들을 위해서 나의 삶과 그런 시간과 노력과 이런 것들을 세상을 향해서 나도 함께 베풀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신부님도 자신을 성찰해 보셨을때 많이 받으신 것에 비해 작게 돌려준 것 같으시다고 …
사제 생활을 하시면서 더 큰 딜레마는 작게 돌려드렸는데 많은 칭찬을 받으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조금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 그리고 내년을 계획하면서 조금 다르게 살아야 겠다.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 같다고,
33장의 이야기를 1절~2절 보시면서 마무리 하시겠습니다.
“올라 - 가라” 탈출 33,1-6
탈출 33,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과 함께 이곳을 떠나,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네 후손들에게 이것을 주겠다.’ 하며 맹세한 땅으로 올라가거라.
여기서 ‘올라가라’ 라는 명령의 목적지는 지금까지는 올라와라, 그러면 무조건 시나이 산이였는데 여기서는 올라와라가 아니라 올라가라 입니다.
그러면서 시나이 산이 아니라 야훼가 맹세한 땅입니다. 야훼가 약속한 땅입니다.
이 명령은 민수 10,11절 이하에서 비로소 실행에 옮겨 집니다.
여기서 올라가라, 그러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민수 10,11절에 가서야 떠납니다.
민수 10,11-28 시나이 광야를 떠나다
따라서 그 사이에 있는 지금부터 등장하는 탈출기의 텍스트 또 레위기 전체 그다음 민수 10,10까지는 아직까지 ‘떠나가라.’ 라는 야훼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는 실행하기 전까지의 상황입니다.
어떻게보면 지루하게 떠나가라는 명령과 명령의 실행 사이에 굉장히 많은 율법 텍스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탈출 33,2
나는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족,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몰아내겠다.
이 구절은 탈출 32,34절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앞에 누구를 보내겠다, 함께 가지는 안겠다는 겁니다. 탈출 23,23. 28절 과도 유사합니다.
민족들의 이름은 동일하고 순서는 뒤바껴있습니다.
가나안족이 뒤에 있는 순서가 바뀌어 있고, 여기서 천사라는 개념은 구역에서는 1차적으로,
천사 : 야훼의 군대(구약)에 속한 존재입니다.
천사는 천상적 존재이지만 신으로서의 권능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천사는 신은 아니지만 천상적 존재입니다.
물론 지상적 존재도 천사라 불릴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탈출 23,28 에서도 말벌을 보내서?
말벌이 천사일 수도 있고 민수10,29에서 언급되는 모세의 장인 호밥이라고 표현되고, 이 호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야훼의 천사라고 불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천상적인 존재뿐 아니라, 인간에게 파견된 지상적인 존재도 천사라고 불릴수 있다. 라는 천사라는 개념이 폭넓게 사용될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야훼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않고 천사를 보내겠다고 한점입니다.
뒤따르는 내용에서 그 점이 분명해집니다.
탈출 33,3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거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므로, 도중에 내가 너희를 없애 버릴수도 있기 때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풍요롭다는 의미로, 젖은 동물성 식품으로 제일 풍요로움을, 꿀은 식물성 식품중에서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신부님 번역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것을 1절과 연결해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1절의 목적어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1절과 3절을 연결 시켜서
그리고 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올라가라 이곳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라고 이해하신다고 하셨고 이 부분은 다음시간에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로 ….
탈출 33,3 ( 첫번째는 양보적인 의미로)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 비록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오르지 않더라도
그리고 두번째는 인과적인 의미로
탈출 33,3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므로
⇒ 네가 목이 뻣뻣한 민족이기에
내가 너를 없애 버리지 않도록, 그 길에서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는 않을 지라도 너는 그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라. 그런데 내가 함께 가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 길 위에서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3절의 말씀을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게 전체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됩니다. 마싸와 므리바 대목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 야훼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우리 가운데 있는가? 그렇치 않은가? 였고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도 야훼는 어디있는가? 우리에게 야훼를 알려준 모세도 도대체 시나이 산에 가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야훼 하느님의 함께 있음이” 중요한 문제 입니다.
나중에도 계속해서 질문이 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가? 그렇치 않은가? 입니다.
후에 아시리아 공격과 함께 유다가 큰 위험에 쌓였을 때도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 임금을 찾아가 ‘ 젊은여인 하나가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아들의 탄생의 의미가 뭐냐? 그 이름이다.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임마누 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더 나아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예수 사건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신학적 의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그 예언의 실현으로서 마태복음사가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완성의 이야기로 우리가 알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교회 안에서 텍스트 33장의 문제점,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지 않고 나는 여기에 있겠다. 대신 천사를 보내 줄께. 라는 의미를 들으면서 생각해야 할것은?
과연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런데 이 질문을 우리가 반대로 알아 듣는다면 우리는 과연 하느님과 함께 하려고 하는가?
하느님을 우리 삶으로 초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지 아니면은 성당 감실 안에 가둬 놓고 우리는 필요할때 마다 성당에 와서, 신앙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나의 세속적인 행복, 탐욕들을 채워가면서 하느님 없이 예수님 머리에는 금관을 씌워 놓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려 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려 하는가? 그런 아픈 질문으로 탈출기의 질문이 계속 되고 있음을 알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
아멘!
최베네딕도 신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