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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시, 그 상상력의 미학적 구축
박제천
좋은 시를 읽으면 긴 여운이 남는다. 시에 나오는 낱말들의 의미를 음미하기도 하고, 시에 나오는 화자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의 심정과 후일담을 내 안에 오래 새기게 된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김광균의 「설야」처럼 또다른 이야기나 장소가 곧이어 이어질 것같아 시에서 눈을 떼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서정시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임경하 시인의 첫시집 『슬픔의 해석』을 읽을 때 역시 시 한 편 한편이 마치 누군가의 자서전 한 대목 같아 시집을 덮고도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풍선에 물을 넣는다 물은 잘 들어가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옆으로 새어 흐르고 물은 조금씩 풍선 안에 고여 간다
물이 어느 정도 차면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축 쳐져서 아무 데로나 널부러진다
그렇게 슬픔이 나를 채운 적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슬픔을 안고 나는 허물어져서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흙투성이 바닥에 뒹구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물이 풍선 목까지 차올라 더는 들어가지 않았을 때 풍선이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물을 토해낸 풍선은 착하게 접혀 납작해졌다
참을 수 없게 들어찬 슬픔을 나도 왈칵 쏟아냈다
다시 풍선에 물을 넣는다
차오르면 쏟아낼 수 있다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슬픔의 해석」 전문
풍선을 바람을 넣는 기구다. 하지만 시인은 풍선에 물을 붓는다. 놀이의 대상이 아닌데,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 물을 채운다. 아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풍선에 물을 부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풍선에 물이 가득찼다.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인에게 주어진 현상이다. 시인은 고백한다. “그렇게 슬픔이 나를 채운 적이 있다/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슬픔을 안고 나는 허물어져서/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고. 어디서 온 슬픔인지, 누구로 인한 슬픔인지도 모른다. 늪 안에 빠져들 듯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물로 가득찬 풍선이 되어 “흙투성이 바닥에 뒹구”는 것이었다. 시인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었다” “물이 풍선 목까지 차올라 더는 들어가지 않았을 때 풍선이 물을 토해내”듯 시인도 슬픔을 쏟아냈다. 이때 시인은 깨우친다. “차오르면 쏟아낼 수 있다/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시인도 모르게 목까지 들어차는 슬픔 따위는 언제든지 쏟아내면 된다.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시인이 마음 먹으면 한순간 풍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풍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슬픔 역시 시인이 조종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풍선이나 슬픔 따위는 언제나 절대자인 시인의 도구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1. 시적 상상을 촉발하는 사물로서의 오브제a
임경하의 시들은 상실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깊은 슬픔이나 상실에서 오히려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원해내는 몸부림이다. 그것은 곧 떠나간 존재들로부터 리비도를 회수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체험의 기록이다.
나에게 봄은
버드나무 가지에서 시작됩니다
겨울빛이 채 가시지 않은
회색빛 하늘에 연두색 물감을 칠하듯
마른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
마른 가지가 연두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봅니다
막무가내로 그대를 향해 달려가던 그 봄,
그 언덕에 서 있던 버드나무
내 마음속 겨울을 한순간에
연두빛 환희로 물들이던 버드나무
봄이 오면
버드나무 아래 걸음이 멈춰집니다
연두색 가지들이 봄바람에 흔들려
마음속 빈 들판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봄은 아득하게, 아직도 그대에게서 번져옵니다.
―「봄은 아득하게」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막무가내로 그대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그 언덕에 서 있던 버드나무”를 발견한다. 여기서 버드나무는 ‘물자체’인 동시에 ‘오브제 a’이다. 오브제 a는 “마음속 빈 들판에 물결을 일으킵니다”라고 한 표현에서 보듯 주체로 하여금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이기에 “내 마음 속 겨울”을 한순간에 “연두빛 환희”로 물들인다. 화자의 내면에 있는 화자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 바로 “그대”이며 그 대상을 환기하는 사물das Ding이 ‘버드나무’라는 시적 표상이다.
팽팽하게 당겼다가 풀어놓고
뒤로 보냈다가 앞으로 멀리
너에게로 날아가는 은빛 줄
너는 수면 아래 잠잠하다
수면 아래 잠자는 너를 깨워야 한다
내 마음은 조급하다
더 멀리 던진 찌가
물속의 키 큰 물푸레나무 그림자에 걸려
푸른 잎들이 한바탕 흔들린다
잎들의 그림자가 수면 위에 어지럽다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처럼
네가 내게로 올 때까지
햇빛을 부수며 물 위에 흩어지는 시간들
긴 줄을 감았다가 풀고 풀었다가 감는다
내가 던지는 은빛 줄
수면 위에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시를 낚다」 전문
위의 시에서 그 대상은 ‘너’라는 지시대명사로 대치된다. ‘너’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수면 아래 잠잠”하다. 라캉에 의해 ‘오브제 a’라고 명명된 이러한 사물은 분리와 소외로 점철된 상처의 흔적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창출해내며 상실의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이것을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부른다. 주이상스는 우리의 인생에 그 가치를 부여하는 본질로서 쾌락과 고통의 결합체이며, 고통 속의 쾌락을 의미한다.
용산 박물관 공원에서
오월의 잎들과 만났다 //
이제 막 초록을 뿜어내는 소사나무 잎
물 위에 닿을 듯 치렁한 버드나무 잎
하얀 구름꽃을 피워내는 이팝나무 잎
햇빛 화사한 공원
바람이 불어 잎들을 흔들고
잎들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그늘도 빛으로 어룽거렸다
공원길을 따라
통일신라 시대의 남계원 칠층석탑을 지나
고려 시대의 홍제동 오층석탑을 돌며
나뭇잎들이 쏟아내는 수다를 들었다
나도 마음 한구석에 두었던 말들을
나뭇잎처럼 쏟아냈다
산사나무 한그루 내 안에 있었다.
―「나뭇잎들과 수다」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화창한 오월의 “박물관 공원”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며 솟구치는 깊은 열정을 느낀다. 소사나무, 버드나무, 이팝나무의 잎들은 하나의 사물들로서 인간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시적 상상을 촉발한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과거의 유물들을 거쳐 “나뭇잎들의 수다”를 듣는 순간 쏟아내는 화자의 “마음 한 구석에 두었던 말들”은 주이상스의 말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서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게 될 그 이상의 어떤 말들이며, 상징계 안에 존재하는 실재계의 중핵에 자리하고 있는 빈자리를 메우고자 하는 시도의 결실이다. 위의 시에 나오는 사물들은 근원적인 상실을 채우려는 시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들로 주체성과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들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타자의 언어, 타자의 시간을 벗어나 주체의 언어, 주체의 시간을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임경하 시인을 비롯해 모든 시인들이 시를 쓰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등꽃 아래 앉아 있었다
따스한 오월 햇빛 아래
아이가 노래하며 놀고 있다
등나무꽃이 피어 있다
꽃등처럼 환하게 피어 있다
향기가 바람에 실려 날아다닌다
아이가 자라고 어른이 되고
세월 지난 후의 어느 오월에도
햇빛은 변함없이 따스하고
보라색 등꽃은 피어나고
지금의 나처럼 내 아이도
등나무 아래 앉아서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를 맡겠지
내 엄마가 아이인 나를 부르듯이
바람이 나를 가만히 스쳤다
문득 아득히 먼 시간 후의 내가
한 그루 등나무꽃으로 피어올랐다.
―「등꽃 아래」 전문
무의식적 욕망들은 종종 백일몽과 같은 환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문학을 낮에 꾸는 꿈, 즉 예술가들의 백일몽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환상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두 극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혼합물로서 정신적 현실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환상의 주체는 시인이며 항상 무의식적 소원의 성취를 대표하는 상상된 장면으로서 풍경과 이미지를 창출한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따스한 오월 햇빛 아래” 먼 후일의 시인이 “한 그루 등나무꽃”으로 비상하는 몽상을 보여준다. 다음의 시에서도 화자의 무의식적 소망과 주이상스를 보여준다.
낮술 한 잔에 얼굴이 주홍빛이다
얼굴에 박힌 까만 점도 부끄럽게 웃는다
꽃잎에 앉았던 나비가 춤추며 날아오르듯
마음속 말들이 춤을 춘다
우듬지 나뭇잎들이 간지럼 태우는 하늘
나비구름 꽃구름 말구름이 피어난다
햇빛이 폭죽을 터트리며 반짝인다
그대 향해 붉어진 마음이
활짝 피었다.
―「주홍산나리」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주홍산나리”의 모습을 “낮술 한 잔”에 취해 얼굴이 “주홍빛”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시키면서, 황홀한 몽상의 순간을 보여준다. 시인은 인간이 친숙한 상징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실재계의 외상과 공백 안으로 추락하기보다는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상징계 안에서 어떤 경험이든 참아내려 한다는 설리번의 말처럼 “낮술”의 도움을 받은 화자의 부풀어 오르는 몽상은 “마음 속 말들이 춤을 추”고 “나비구름 꽃구름 말구름”이 피어나고 “햇빛이 폭죽을 터뜨리며 반짝이”는 주이상스의 순간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대 향해 붉어진 마음”이 활짝 피어나는 기쁨을 노래한다. 위의 시에서 “주홍산나리”는 아마도 화자가 잃어버렸던 순간으로서 주체성과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메우면서 생성된 사물이며, 화자의 가장 깊은 열정의 원인이자 근원적인 사물인 오브제 a일 것이다.
2. 실재계의 편재와 슬픔의 초월
시인은 이미지의 사냥꾼이다. 이미지는 사물표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매는데, 그것은 대부분 상실된 대상이다.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이 결여되었거나 상실되었다는 지속적인 느낌을 주는 그것을 자크 라캉은 오브제 a 혹은 대상 a라고 부른다. 존재는 사고와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라는 상징계는 하나의 대타자로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억압한다. 실재계는 상징계와 상상계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양자 모두의 한계로 설정된다. 그것은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욕구의 형태로 우리의 상징계적 현실에 침입하는 것으로, 억압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기능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어디선가 본 하늘이다
구불구불한 언덕 사이 작은 마을
마을을 뒤덮고 있는 검푸른 하늘
소용돌이치는 구름 노란 별 노란 달이 어지럽다
산동네 막다른 집, 방 한 칸에
동생들 셋과 엉켜 잠들었을 때
좁은 부엌에서 새어나온 연탄가스는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검게 타올라, 나를 덮치곤 했다
파도치듯 흘러가는 잿빛 구름 속을 떠다녔다
둥근 달무리 속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엄마는 살얼음낀 동치미국물을 내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비탈진 골목에 서서 엄마는 등에 업은 나를 흔들었다
검푸른 하늘에 별들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이
고흐의 하늘처럼 어지럽게 빙빙 돌며 오고 있었다.
―「검은 사이프러스 나무」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라는 작품을 매개로 하여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끔찍한 경험을 떠올린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때의 경험과 고흐의 그림을 중첩시킨다. 고흐가 고갱과 헤어진 다음, 귀를 자르는 소동을 일으킨 후에 입원했던 요양원에서 그린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는 고흐의 정신적 고뇌가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시인은 고흐의 그림 속 풍경을 자신의 연탄가스 중독체험과 연계하여 “검푸른 하늘에 별들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검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고흐의 죽음 충동 혹은 타나토스의 표상으로 볼 수 있듯이 이 시에서 그것은 느닷없이 상징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실재계의 모습을 표상한다. 이처럼 실재계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안으로 침입할 때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환상’이며 이러한 환상은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하는 이러한 과정을 라캉은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부른다.
해당화 꽃잎차를 마신다
해당화 꽃향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진 이별의 냄새가 있다
뜨거운 찻물 속에서
다섯 갈래 붉은 꽃잎이 핀다
새벽에 울컥 쏟은 코피 같은 색이다
해당화 꽃향기 속에
해당화 지천으로 핀 백령도 절벽길을
가시덤불에 긁히며 걷던 기억이 묻어 있다
홀로 끙끙 앓다가 삼켜버린 울음이
해당화 덤불 속에 걸려 있다
해당화 꽃잎차를 마신다
벼랑을 타고 뜨거운 붉은 기억이 핀다.
―「해당화, 꽃의 기억」 전문
시인은 “해당화 꽃잎차”를 마시며 서글픈 이별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진 이별의 냄새”를 시인은 차의 향기 속에서 회상한다. 그러한 향기 속에서 시인은 추억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새벽에 울컥 쏟은 코피 같은 색”을 지닌 꽃잎을 바라보며 시인은 처절했던 고통의 기억을 실감한다. 이별이란 삶의 고통 중에서도 절절한 것이기에 그것은 “붉은 기억”이 된다. 시인은 지난날의 슬픔을 한 잔의 차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의 추억제가 “해당화 꽃잎차’를 통해서 만개한다.
3. 예술을 통한 치유와 구원에의 소망
니체는『비극의 탄생』에서 삶은 예술을 통해 구원되며, 세계는 오직 미적으로만 정당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 중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는 삶 속에서도 제우스를 속일 줄 아는 예술적 계략과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를 사용할 줄 아는 신이 있다. 그는 바로 실존적 삶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이다. 그가 전해 준 불로 인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평가 엘리엇이 보들레르를 ‘고통의 천재’라고 불렀듯이 시인은 인간 존재의 숙명인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승화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고 그러한 운명을 사랑하는 자가 시인이요, 예술가요, 철학자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몸이 가볍다는 것이다. 시가 언어의 춤이라면, 그 춤을 추려면 몸과 마음이 모두 가벼워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몸의 소리를 듣는 자, 몸속의 자연을 수용하는 자가 시인이다. 몸은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기 때문이다.
임경하의 시적 감성은 매우 여리고 순수하지만 그 순수함 속에서 타오르는 상상력은 은하계의 별들처럼 빛나고, 그 풍경들은 별세계처럼 발랄하고 화사하다. 시인은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한다. 세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자세를 지닐 때 가능한 일이다. 「은하 에너지」와 「장미별 요정」은 평범한 일상조차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신화세계나 우주까지 증폭될 수 있다는 실증을 보여준다.
유리포트에 맑은 물을 넣어 끓인다
달빛도 별빛도 한줌씩 넣는다
비등점이 가까워지면
바닥부터 푸른 물방울이 솟아오른다
물은 마침내 은하계처럼
달과 해와 크고 작은 수백의 별들로 성좌도를 만든다
의자에 앉은 카시오페이아가 물구나무를 서듯
마음속이 끓는 물처럼 어지러울 때
은하탕을 끓인다
끓어올라 폭죽처럼 터지는 물
내 가슴에서 초신성이 떠오를 때까지
순백의 물꽃이 피워내는 별빛, 달빛, 햇빛
은하탕을 마시면 온몸의 혈관이 열리고
보이지 않는 구멍까지 다 열려
은하 에너지를 흠뻑 받아들인다
물이 된 내마음에
또 하나의 새로운 별자리가 뜬다.
―「은하 에너지」 전문
오월이다
어느 별의 요정들이 소풍 왔나
햇빛 아래 왁자지껄
웃음소리 요란하다
얕은 담장에 모여 앉아
초록별 지구가 아름다워요
빨간 치마 들추는 바람이 짖궂어요
햇빛이 눈부셔 눈부셔요
깔깔거린다
오월이 가고
장미꽃 진 자리에
별이 왔다 간 자국이 선명하다.
―「장미별 요정」 전문
옛사람들은 맹물을 끓여 ‘백비탕’이라 이름지었다. 『동의보감』은 백번을 끓이면 맹물도 약이 된다고 말한다. 임금들이 마시는 음양탕은 여기에 냉수를 반 섞은 물이다. 아무튼 유리포트 속에서 끓어오르는 백비탕은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유리포트에 푸른 조명을 주면, 마치 천체 쇼와 같은 장관이 펼쳐지기도 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마침내 은하계처럼/ 달과 해와 크고 작은 수백의 별들로 성좌도를 만든다.” “내 가슴에서 초신성이 떠오를 때까지/ 순백의 물꽃이 피워내는 별빛, 달빛, 햇빛”의 “은하탕을 마시면 온몸의 혈관이 열”린다.
「은하 에너지」가 거시적이라면 「장미별 요정」은 미시적 상상력이다. 화창한 봄날의 풍경을 한 떼의 어린이들이 소풍 나온 것처럼 생동감 있는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 화자의 감성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린 아이를 닮아 있다. 니체가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자기창조의 세 가지 변신과정 중 맨 마지막 단계를 ‘어린아이’의 단계로 본 것도,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아이들의 놀이를 높이 평가하여 한 말일 것이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놀이인 동시에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와 같은 거룩한 긍정을 의미한다.
이번 시집의 제2부에서 시인은 예술을 통한 자기 구원과 치유와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고호나 뭉크,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 혹은 이중섭이나 김현정 화가의 그림들이나, 비발디의 음악, 나아가 백석의 시나 카와구치 도시카즈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들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하고 지루한 일상적 삶의 피로와 답답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창문 역할을 한다.
비발디의 『사계』를 듣는다
창문을 열고 밤새 잘잤는지
창가의 화분에게 인사를 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겨울 악장의 짧은 음표처럼 콧등을 스친다
소리의 볼륨을 높이자 바이올린의 선율이 풍성하다
2악장의 라르고, 느린 선율을 듣는 잎
잎들이 기지개를 켠다
움츠려 있던 세포들이 숨구멍을 열고
달콤한 햇빛처럼 쏟아지는 선율에 몸을 맡긴다
밤새 누렇게 변한 잎을 따서 창밖으로 날려 보낸다
오늘 아침 내게 날아온 슬픔 한 잎도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가볍게 창밖으로 날아간다.
―「비발디를 듣는 화분」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창가의 화분”에게 인사를 건넨다. 비발디의 ‘사계’는 음악치료에서 많아 사용하는 곡이다. 고주파의 음들이 세포를 자극하여 잠자고 있던 교감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조직을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부교감신경을 자극하여 혈압, 심장 박동, 호흡수, 뇌파, 피부반응 등을 안정된 상태로 이끈다고 한다. 이처럼 비발디나 모차르트의 음악은 사람들의 신체건강과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고 정서적 통합에 기여한다고 한다.
이러한 음악의 효능은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의 성장에도 기여한다고 한다. 화분에 비발디를 들려주면 “잎들은 기지개를 켜”고, “움츠려 있던 세포들이 숨구멍을” 연다는 표현은 바로 예술의 치유 기능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화자 역시도 음악을 통해 “오늘 아침 내게 날아온 슬픔 한 잎”을 날려 보냄으로써 생활 속에서 예술을 통한 마음의 정화에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화자 역시 삶의 무상성을 넘어서는 불멸의 음악, 불멸의 예술에 대한 소망을 피력한다.
봄의 끝자락
연보라색 종 모양의 오동나무꽃이 툭툭 떨어져내렸어요
우리가 지나가는 봄을 바라보던 그날이
그때였는지 아득합니다
나는 저 오동나무가 되고 싶었어요
당신의 손에 베어져
열두 줄 명주실에 묶인 가야금이 되고 싶었어요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가야금 소리가 되고 싶었어요
당신이 튕기는 가야금이 되어
천년만년 아름다운 운율로 흐르고 싶었어요
오동나무꽃이 피어 있는 길
언제나 놀랍게 가슴 두근거리는 길입니다.
―「오동나무꽃길」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연보라색 종 모양의 오동나무꽃”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저 오동나무가 되고 싶었어요”라고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다. 화자가 오동나무가 되고 싶은 것은 “당신의 손에 베어”져서 “가야금”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화자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야금이 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변해가는 세상의 무상함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인간에게 근원적 상실과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화자의 진정한 소망은 “당신”의 가야금이 되어 “천년만년 아름다운 운율로 흐르고 싶”기 때문이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인은 불변의 실재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다.
임경하 시인은 수채화처럼 순수하고 밝은 감성을 지녔으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한 동심을 지녔다. 그의 시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 떠나간 존재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리비도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체험의 기록이다. 시인의 시적 열정은 불변의 실재에 대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으며 분리와 소외로 점철된 상처의 흔적을 구성하는 사물과 이미지를 창조한다. 또한 그것은 주체성과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들로서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며 삶의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만나게 한다. 느닷없이 상징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하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시인은 불멸의 시, 불멸의 예술을 꿈꾼다. 시인은 미술작품과 음악, 혹은 시와 문학작품과의 동일시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답답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임경하 시인의 이러한 시적 열정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고향상실로 인해 방황하고 고통 받는 현대인들의 삶에 위로가 되는 작품들로 하나씩 결실을 맺는다. 불멸의 시를 꿈꾸는 미학적 구축, 그것이 곧 모든 시인의 궁극적인 희망이 아니던가. 한 걸음씩 그 희망에 닿아가는 시인의 시정신에 경의를 표한다.(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