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 두고 읽어야 할 시집
이영식(시인)
최영규 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
리토피아 포에지
높아질수록 거칠어질수록
돌부리에 채이며 쓰러질 뻔한 숨소리가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침묵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어둠일까
눈뜰 수 없는 설원의 밝음일까
겹겹이 껴입었지만
불편하도록 두꺼운 장갑과
삼중화를 스미고 들어오는
바라보는 눈빛을, 소리를,
만용과 깍지 꼈던 자신감까지 얼려버리는
저 비탈의 정리되지 않은 높이의 힘
처참한 사고의 상상
걸을수록 그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 안 깊숙한 곳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덜그럭거리고 있는,
새파랗게 질려서
투명한 알몸처럼 감춰지지 않는다
그러나 있지도 않았던 일 같았던
없을 곳에 대한 사라지지 못한 끌림이
없던 소리가, 없어진 소리가,
오르기로 오르겠다고 결정했던 처음 그것이
걸음이 되어 걸음이 되어
여기를 오르고 있다
―「높이의 힘」 전문
최영규 시인의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를 받고 솔직히 말해서 시작품보다 시집 속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진들을 먼저 펼쳐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산 사내가 직접 몸으로 기어오르며 부딪던 그 실체가 더욱 궁금했던 탓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하얀 설산과 함께 덥수룩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산도적 같은 얼굴이 낯설기 짝없다. 야생 라마의 숨 가쁜 호흡이 금방이라도 책장을 뚫고 나올 것 같다. 누구나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크레바스와 설산 혹한의 땅, 그곳에 최영규가 있고 그의 시가 숨을 헐떡거리며 우리를 맞이한다.
최영규 시인은 이번 산악시집으로 제13회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김구용 시인은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던 1950년대에 이미 ‘시를 위한 노트’에’ 비평가가 비록 절찬한다 할지라도 자기 작품에 스스로 불만을 느낄 때마다 그 공허감은 메워질 수 없다. 시는 독자를 위한 생산물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자아에의 집중이며 극복이라는 시론을 펼친 바 있다. 최영규의 시가 그렇다. 그가 이미 발간했던 『나를 오른다』, 『크레바스』에 이어 이번 산악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에서 보이는 개성적인 시 세계는 독자에 대한 구애보다는 시인의 자기 구도求道형인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산을 오르면서 보고 느껴온 풍경을 그려나가면서 동시에 삶의 깊고 곡진한 곳을 건드린다. 즉 “자아에의 집중과 극복”이라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 할 것이다. 앞에 제시한 작품 「높이의 힘」에서도 이러한 그의 시 세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높아질수록 거칠어질수록/ 돌부리에 채이며 쓰러질 뻔한 숨소리가/ 있지도 않은 일처럼/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에서 숨은 생명의 원천이고 살아있음의 증명일진대 시인은 그 숨소리를 죽은 듯 사라지고 다시 다가서는 까마득한 산의 침묵이고 두려움이라 읽는다. 설산의 높이는 오를수록 그동안 자신이 행했던 ‘만용과 깍지 꼈던 자신감을 얼려’버린다. 「높이의 힘」 앞에서 산 사내는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처참한 사고의 상상/ 걸을수록 그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 안 깊숙한 곳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덜그럭거리고 있는,/ 새파랗게 질려서/ 투명한 알몸’의 자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당초에 ‘오르기로 오르겠다고 결정했던 처음 그것이’ 그 끌림이 ‘걸음이 되어’ 그를 이끌고 정상을 향해 나가고 있다. 이건 오직 나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산이 있어 오른다’ 하던 산 사내들의 사명이고 운명에의 이끌림이라 할 것이다.
최영규 시인의 이번 산악시집은 전편이 몸으로 쓴 시로 꿈틀거리고 있다. 하여. 독자들은 나를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읽도록 하자. 이번 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는 아래가 아니라 높은 곳에 두어야 할 것이다. 높고 거친 설산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아도 오직 산을 오르는 산 사내들의 고고한 정신을 받들 듯 읽어야 한다. ‘살아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크레바스 건너 ‘거대한 신의 머리 초오유 // 回靑을 쏟아부은/ 저/ 태조의 침묵’을 느껴보시라. 우리의 근원적인 자아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이다. 첨언하자면 시집 제목이 『설산 위에 서서』가 아니고 『설산 아래에 서서』라는 점이다. 산을 높이고 경외하면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산 사내의 아름답고도 지극한 정신이 더욱 빛나 보이는 이유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