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가볍고도 무거운
이정현 (시인)
한기팔 시집 『겨울삽화』
황금알
일어날 때는
여지없이
털어내야 한다.
작은 것일수록
영 쉽게 털리지가 않는다.
먼지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보다
구름보다 가벼운
삶,
그것이
먼지다.
꽃이거나
잎이거나
질 때는 한 색깔이니
그게 먼지다.
지는 것은
날개가 없다.
-「먼지」 전문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아기를 업은 채 겨울 바다를 바라보는 표지화가 퍽 인상적인 한기팔 시집 『겨울 삽화』를 본다.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향을 지키고 있는 시인은 자연을 사랑한다. 바다를 사랑한다.
예전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남편과 딸을 잠시 뒤로하고 시인을 만나러 서귀포로 향했다. <시인만세>를 찍으며 맛보았던 청귤차의 상큼함이 가시기도 전 시인은 미리 챙겨 놓은 귤 봉지를 건넸다. 주홍색의 귤빛보다 따뜻한 시인의 마음이 전해졌다.
이번 『겨울삽화』 시집의 차례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나는 어차피 꽃이 아니다 2부 허공의 한 채 3부 겨울 삽화 4부 꽃들의 반란이다. 나는 그중에서 14쪽에 실린 먼지를 꺼내 들었다.
먼지는 가벼우면서 강렬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내게도 먼지에 관한 강력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교실 안에서였다. 겨울날 점심때를 기다려 난로에 얹힌 도시락을 꺼내 내 자리로 올 때 본 먼지, 그것은 거대한 기둥이었다. 창가 햇빛을 통해 책상 위로 반사되는 먼지를 보고 숨을 참고 싶을 만큼 놀라웠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먼지들…. 햇살이 거울이 되어 춤추는 먼지들은 “먼지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바람보다/ 구름보다 가벼운/삶,”처럼 펄펄 살아 있었다. 그때는 놀라 날개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처음으로 먼지에 두려움을 느꼈다.
김지연 시인은 해설에서 “한기팔의 서정시에는 그가 견지하였던 창작 자세와 시어에 대한 엄결성이 녹아들어 있다. 그의 회화적 특징에서 비롯된 아미지의 현현일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꽃이거나/ 잎이거나/ 질 때는 한 색깔이니/ 그게 먼지다.”처럼 한 색으로 살기는 어디 쉬운가. 시인의 먼지는 무슨 색일까. 아마 귤꽃처럼 하얀색은 아닐까.
해마다 오월이 오면 제주에는 귤꽃 향기로 거리가 환하다. 달리는 곳마다 귤나무 꽃향이 제주를 온통 향기롭게 한다는데, 나는 제주 사람이 아니어서 아직 귤향과 귤나무 꽃향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쩌면 향기도 질 때 꽃과 잎처럼 한 색깔일지 모른다. 먼지일지 모른다.
시인을 생각하면 제주가 떠오른다. 그리고 서귀포가 뒤따라온다. 푸른 바람이 부는 귤밭에서 시구절 한 바구니 따 담는 시인의 환한 미소가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시인은 1937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1975년 심상에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서귀포』 『불을 지피며』 『마라도』 『풀잎 소리 서러운 날』 『바람의 초상』 『말과 침묵 사이』 『별의 방복』 『순비기꽃 섬』 『섬, 우화』등이 있고 시선집 『그 바다 숨비소리』가 있다. ‘문학인 양성과 서귀포 지역 문단 개척으로 예술 발전의 선험적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1975년 예총 서귀포 지부장을 비롯하여 2008년 (사)한국시인협회 이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직책을 역임’할 만큼 제주도에서 시인으로써 큰 몫을 해내고 있다.
이 봄날 시집 『겨울 삽화』에 담긴 시를 하나씩 꺼내 귤차처럼 드시길 권한다.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시인이 후후후 뜨겁지 않게 식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