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이 새싹
김수원 (시인)
이향지 시집 『야생』
파란
이향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 ‘야생’은 두 개의 문과 여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개의 문은 1부(프롤로그)와 6부(에필로그)를 가르키며 프롤로그에서 시작해 에필로그로 끝나는 방식으로 그것들은 ‘야생’의 입구와 출구입니다.
‘야생’은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끝에서부터 읽어도) 텍스트를 이해 하는데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나’를 따라 옮겨 다니는 ‘지금’이라는 삼각점
헤아릴 수 없는‘지금’이 산정의 삼각점 앞으로 나를 불렀다
‘지금’이 산맥을 이루었다
그 산 그 산맥 그 삼각점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의 축적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게 해 준 신발들
잠시라도 비루하지 않았다는 그런 반짝임
등산화 두 짝을 엎어놓고
바닥을 들여다보면 보인다
‘지금’이란 어디에도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말뚝일 뿐인데
‘지금’은 에누리가 없었다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잎이다
‘지금’ 방금 떨어져 버린 초록 잎들은 어디 있는가
-「지금-에필로그」 부분
불교 금강경에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려서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은 매 순간 지나가 버리니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아서 잡을 수 없네. 어디에 마음에 점(點)을 찍을 것인가.
그 말씀은 ‘지금’이라는 점(點)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되겠지만 시인은 지금 방금 떨어져 버린 초록 잎들은 어디 있는가라고 ‘지금’을 말합니다.
금강경에 대가였던 덕산 스님이 길을 가는 도중에 떡을 팔고 있는 노파에게 점심으로 떡을 사려고 하는데 노파가 자기 질문에 대답하면 공짜로 떡을 주고 대답 못 하면 떡을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노파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點)을 찍겠냐고 물었습니다. 덕산 스님은 뜻밖에 질문에 말문이 막혀 답을 못하고 점심을 굶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시인의 ‘지금’은 점심(點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시를 지으면서 수많은 ‘점심’이 있었기에 시인은 자신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삶은 무수한 ‘지금’으로 구성되며 사건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결코 ‘지금’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란 말은 시간에 관한 진술이며 ‘야생’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지금’을 “언제나 새로 돋는 잎”처럼 신생과 생성의 시간을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말띠생으로 194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습니다. 팔십 세가 넘은 나이지만 시집을 보면 젊은 기백이 풍기는 시어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시인은 1989년 월간문학으로 마흔일곱이란 늦은 나이에 등단했습니다. 등단 이전에도 오랫동안 시를 썼으나 미완의 상태로 있다가 등단한 것입니다.
그의 시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행위입니다. 시인은 답하기 불가능한 물음을 반복함으로써 시는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실존은 정체성 확인이라는 문제와 이어져 있습니다. 시인의 고독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중일까”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합니다.
시인의 시는 나이와 상관없이 싱싱하고 펄떡펄떡 뜁니다. 그 점이 존경스럽고 놀랍습니다. 그의 시는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고 귀향이 있고 그칠 줄 모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신출내기 암캐가 살모사 텃세를 건드려서
목덜미가 배 둘레만 하게 부어올랐다
독사 독을 혼자 이겨 낸 보리는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
배 속에 한 마리가 남은 줄도 모르고
밥 먹어라 밥 먹어라 밥 먹일 궁리만 했다
개를 버리고 사람으로 갈아입었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미안하다 고마웠다 탁본으로 남은 내 강아지
-운심리 부분-
‘운심리’라는 시를 보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시에 썼습니다. 개의 몸을 버리고 사람으로 갈아입었는가.라는 시구에 금강경을 생각했습니다.
금강경 사구계에 있는 이 뜻은 인연 따라 화합된 모든 현상들은 모두가 거짓이다.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알면 여래의 참모습을 본다.
불교적 사념이 시집 곳곳에 묻어있고 시인은 ’시를 통해 도(道) 닦는 수행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묻습니다. 길은 어디에나 없는 편이 좋다고,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길은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시인은 사물을, 현상을, 시간을 꿰뚫어 보는 사람입니다.
시집 속에서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과 사물을 관조하며 마음을 닦는 시인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세웠으므로,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
나의 시, 나의 실천. 이루었거나 못 이룬 진수들. 미완성인 채로
언제 손을 놓아도 억울할 것 없을 포트폴리오다.
-첫 페이지 시인의 말 전문.-
이향지 시인은 사물을 홀리듯 포착하고 관통하며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관조하는 시를 통해 道를 닦는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