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집 좋은 시 (『문학과 창작』 2023년 봄호)
생명예찬으로 빛나는 시심
주경림(시인)
허형만 시집 『만났다』
세상살이가 안팎으로 팍팍하고 유독 더 힘들었던 지난 해 세밑에 허형만 시인의 스무 번째 신작 시집 『만났다』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한해가 저물 때면 “뿌린대로 거두리라”라는 경구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필자에게 “은총과 경이로움의 빛”이 넘치는 시집은 큰 선물이었다. 첫 번째 시 「마침내 피워낸 꽃처럼」에서 마지막 시 「만났다」까지, 시를 대하는 한결같은 열정과 “부싯돌처럼 불꽃을 품고 있”는 시어들이 눈부셔서 별천지를 다녀온 듯 황홀했다.
시집은 1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2부 <산까치> 3부 <숲에서 배운다>로 구성되어 있어 숲과 관련된 시가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시인은 “숲속에서 야생 초록빛 오디가/자줏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 이며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숲에서 배운다」. “숲의 언어로 숲의 정령과 장난치며 뛰어노는/철부지가 되고 싶은 꿈에”(「숲에서 꾸는 꿈」)젖기도 하고 “홀가분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바람결 따라 출렁이는 시의 파동”(「침묵의 숲」)을 느껴보기도 한다. 3부의 시편 들 중에서 「한겻의 숲」을 읽어본다.
아침나절, 이 숲
의 나뭇잎들이 온통 별빛이에요.
사람들은 한겻이라 햇발에 반짝인다 생각
할 것이나 아니에요, 그것은 편견 때문이에요.
하늘이 가까울수록 더 빛나는 저 이파리
를 보세요. 거문고자리의 직녀성과 독수리자리의 견우성
이에요. 주변의 별들이 은하수처럼 출렁이는 숲
은 지금 조용한 축제를 벌이고 있어요.
여기서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요.
사람들만 한사코 낮과 밤, 너와 나, 좌우
로 나눠요. 그것은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욕망
때문이에요. 보세요. 불꽃처럼 터져 오르는 공기
를. 저 별들의 숨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번지는 파동
을. 나는 지금 우주의 중심에 둥둥 떠 있어요.
-「한겻의 숲」 전문
‘한겻’은 한나절의 반쯤 되는 동안으로 하루 낮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다. “아침나절, 이 숲/ 의 나뭇잎들이 온통 별빛이에요”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예사롭지 않다. 지상의 숲이 천상계로 날아오른 듯하다. 필자도 아침나절이라 햇발에 반짝인다는 생각을 지우고 차츰시인의 숲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우듬지의 이파리들은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독수리자리의 견우성, 주변의 별들은 은하수로 출렁이는 “조용한 축제” 한마당이다. 낮과 밤의 구별이 없는 시인의 「한겻의 숲」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이분법적 생각을 여의면 별들의 숨소리와 공명하는 광활한 우주의 중심이다. 심신을 정화하는 의식을 치루는 듯 장엄한 풍경이 펼쳐진다.
허영만 시인이 향토적 서정이 깃든 우리말로 기쁨과 애절함과 따듯한 위로를 건네줄 때 읽는 이의 공감의 폭도 커진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시의 날개가 바로/ 바람칼이다.”라는 시인의 시 「바람칼」에서 ‘바람칼’이 새의 날개를 이르는 순우리말 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바람칼을 지닌 시인은 “오늘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내 생애 마지막 한 줄의 시를 생각한다.”(「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시 한편마다 홍역을 치루 듯 목숨을 걸고 작품을 쓰는 시인이 존경스럽다. 또한, 시에도 벼랑이 있어 “사유의 깊이에 잘못 들면/ 수만 리 심연으로 떨어지고 만다.”(「시의 벼랑」)며 늘 경계하며 조심하고 긴장하는 시인의 겸허한 자세는 후학들이 본받을 만하다.
참꼬막 껍질에 새겨진
파도의 무늬
그 사이사이 숨겨진
푸른 별 자국
개펄처럼 부드러운
물결 피부
서서히 스며든
투명한 시간
모든 역사는 시간의 무늬다
-「시간의 무늬」 전문
짧은 시 「시간의 무늬」에서는 사물을 깊게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이 보배다. “파도의 무늬”가 “푸른 별 자국”으로 “푸른 별 자국”이 “투명한 시간”이 되는 언어의 변신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내면의 성찰로 얻어진 “모든 역사는 시간의 무늬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긴 여운을 남긴다.
한겨울, 대한의 추위 속에 시집 『만났다』를 읽다가 문득, 5년 전 쯤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서 보았던 「겨울 들판을 거닐며」의 싯귀가 떠올랐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황량한 겨울 들판도 봄을 기다리는 생명을 품고 있듯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자는 시인의 뜻을 함께 새겨보며 글을 맺는다.
허형만 시인은 1973년 『월간문학』에 시, 1978년 『아동문예』에 동시로 등단했다. 목포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이며 시집 『만났다』 등 20권, 다수의 수필집과 평론집을 발간했다. 한국예술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