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포에티쿠스, ‘다른 말’을 찾는 인간
고영섭(동국대 교수, 시인)
정병근 시집 『중얼거리는사람』
여우난골
내게는 다른 말이 있다
친절한 인사와 무난한 표정 너머
언뜻 보이는 하늘의 순간에
나의 말은 거기에 있다
자문자답과 중얼거림 속에
바위들이 둥둥 떠다니고
나무들이 비처럼 내리꽂히는
모르는 것들이 외면하는 그곳에
모래에 손을 넣고 다독이며
두꺼비와 거북을 불러 청하는
나의 새 말이 있다
일생에 너 하나를 얻지 못한
나의 말은 폐습처럼 너의 귀를 돌아
수박 껍질을 핥으며 미끄러진다
날랜 취향과 매끄러운 혀를 선호하는
그런 말은 나의 말이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분명히 아닌
난생처음 같은 말이 있다
―「다른 말이 있다」 전문
인간은 엉덩이 안쪽의 두 중둔근을 움직이는 직립을 통해 발견해낸 ‘언어’로 ‘문화’를 일궈냈다. 동시에 인간은 자유로운 두 앞발 즉 두 손으로 만들어낸 ‘도구’로 ‘문명’을 일궈냈다. 그 결과 호모(속명) 에렉투스(종명)인 ‘직립보행 인류’를 넘어 호모 사피엔스인 ‘슬기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호모 에렉투스가 문화의 초기단계인 도구화(instrumentalization)의 문명을 일구어냈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문명의 후기단계인 개념화(conceptulization)의 문화를 일구어냈다.
시인은 언어 즉 말하기를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시이며 그의 존재는 시적 존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새로운 말’을 찾는 사람이며 ‘남다른 말’을 찾는 존재이다. 그에게 ‘다른 말’은 이전에 없던 말이며 ‘다른 시’는 이전에 없던 시이다. 그것은 직립 이전 호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정교하게 가공되기 이전의 소리이며, 직립 이후의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의 일상화된 말 너머의 다른 말이다.
시인의 다른 말은 “친절한 인사와 무난한 표정 너머/ 언뜻 보이는 하늘의 순간에” 있다.” 또 그의 다른 말은 “자문자답과 중얼거림 속에/ 바위들이 둥둥 떠다니고/ 나무들이 비처럼 내리꽂히는/ 모르는 것들이 외면하는 그곳에” 있다. 시인이 찾는 새 말은 “모래에 손을 넣고 다독이며/ 두꺼비와 거북을 불러 청하는”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일생에 너 하나를 얻지 못한/ 나의 말은 폐습처럼 너의 귀를 돌아/ 수박 껍질을 핥으며 미끄러진다.”
이 때문에 시인은 “날랜 취향과 매끄러운 혀를 선호하는/ 그런 말은 나의 말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그가 찾는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분명히 아닌/ 난생처음 같은 말이”다. ‘난생처음 같은 말’은 시인이 찾는 원초적 말이자 최후의 말이다. 선적(禪的) 언어로 말하자면 처음 입을 뗀 ‘최초구’이자 가장 나중 입을 연 ‘최후구’이다. 그런 말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도 하지 않은 ‘다른 말’을 찾는 순간에 있다. 그 순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터뜨리는 ‘난생처음 같은 말’이다.
시인이 ‘다른 말’을 찾기 위해 헤맨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여우난골, 2023)은 호모 포에티쿠스 즉 시적 인간의 일대사이다. 이 시집은 그가 말의 고수를 찾아 헤맨 선재동자의 구법기인 『입법계품』을 방불케 한다. 여기에는 시인이 법계에 들어가기 위해 닦아야 할 수행의 내용과 수행의 방법을 길 위의 선지식들에게 묻고 배운 ‘길’이 담겨 있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 부르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는 노자의 가르침이나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는 왕필의 주석서도 그가 찾는 길이 아니다.
시인이 찾는 다른 말은 “입에서 귀로 전하는/ 세상에서 가장 긴 경전”, “눈과 입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 재갈을 물고/ 강철 귀로 들어야 하는 경전”, “쩔렁쩔렁 요령을 울리며/ 필생을 되새기는 말씀”, “듣지 않아야 들리는” 동문서답, 마이동풍, 우이독경의 소식이다. 그가 찾는 다른 말은 ‘자문자답’과 ‘중얼거림’을 넘어 ‘남들이 하지 않은 말’이며, 머리와 가슴까지 울리는 말을 넘어 ‘온몸으로 살게 하는 말’이다. 그런 말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의 말은 반어적이다. “듣지 않아야 들리는 동문서답”처럼 굴절의 언어, 반영의 언어를 보여준다. “천만번쯤 말을 삼키고 나면/ 충직한 짐승 한 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갖기 위해 회심의 인내를 바쳤다/ 터무니없는 요지부동으로/ 불쑥 쏟은 동문서답 같은/ 무한한 귀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자만/ 이곳에 들 수 있다/ 되새기는 草食의 표정처럼/ 첩첩 침묵으로 다진 저 뻣뻣한 위안을”(『비석은 자란다』 일부). 시인은 새 시집을 통해 말이 너무 많은 시대, 말이 너무 가벼운 시대에 ‘첩첩 침묵’을 통해 말의 가치와 위의를 환기하고 있다.
시인이 찾는 다른 말은 ‘첩첩 침묵으로 다진 저 뻣뻣한 위안’의 말이며, ‘난생처음 같은 말’이다. 당나라 곽암 사원(廓庵師遠) 선사의 『심우도』(尋牛圖)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야생의 말’이며, 야생의 말을 잘 길들인 ‘충직한 말’이다. 저마다 마음속에 키우는 ‘야생의 짐승 한 마리’를 ‘충직한 짐승 한 마리’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브제를 왜곡하는 말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이것이 시인이 길을 떠나 호모 포에티쿠스 즉 ‘다른 말’을 찾는 시적 인간이 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그 많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중얼거리는 사람』)라고 생각하면서 ‘중얼거린’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