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시인의 그리움
이영신 (시인)
김창범 시선집 『해질녘 강가에 앉아』
문학아카데미
해질녘 강가에 앉아 저물어가는 세상을 보라.
강 건너 하얗게
누에치는 집, 붉은 양철지붕 위로
빨간 치마처럼 내려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라.
파란 입술로 땅콩을 파먹던 어린 날의 모래밭이
점점 붉어가는 저녁 기운에 감추어져 갈 무렵,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옥수수 키 큰 이삭 사이로 구월 보름달이
화창한 몸을 숨바꼭질하듯 숨길 때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움은 아직도 내 가슴에 저녁 햇살로 남았구나.
따뜻하게, 따뜻하게 그리움의 숨소리를 듣는다.
양철지붕 위로 남은 해가 저물어간다.
해질녘 강가에 앉아 저기 가라앉는 세상을 보라.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치마를 풀어헤치고 저만치 가고 있는데
나는 해 저문 붉은 강가를 떠날 줄 모르는구나.
―「해질녘 강가에 앉아」 전문
봄비가 다녀간 뒤로 개나리 벚꽃이 피어났다가 지고 어느새 영산홍이 피어나고 있다. 이렇게 봄이 스치듯이 지나가면 곧 무더운 여름이 올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 몸을 지니고 사는 삶이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간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는 어린 시절을 지나 청 ․ 장년기를 지나면 하루의 해질녘과 같은 황혼기에 이르게 된다.
김창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선집 제목이 『해질녘 강가에 앉아』이다. 시선집의 책 표지 그림이 파랑과 녹색, 분홍이 어우러져 있으니, 무한한 천지에서 누군가 이끌어주는 해질녘에는, 은은하게 감싸 안아주는 부드러움과, 포근함의 어떤 힘이 있을 것 같다.
‘봄의 소리’를 따라 시인의 시를 읽다보니, 그림 같은 강마을이 눈앞에 펼쳐지고 어린 소년이 나타난다. ‘1미터 15센티의 키’에 ‘18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눈이 맑은 어린 소년이다. 소년은 강가에 앉아 풀잎을 입에 물고 풀피리소리를 내다가 싫증이 나면, 조약돌을 던지며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빚어낸다.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건너면서 물살을 본다. 물살이 돌에 걸렸다가 휘 돌아가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투명한 물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자연과 벗이 되던 어린 소년이 어느 새 어른이 되었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존재를 떠올리며 시인은 눈을 감는다. 이른 봄날이면 ‘온 몸에 돋아나는 여린 꽃망울’처럼 ‘속살 깊은 곳마다 솟아나는’ 속삭임을 듣는다. 바람이 옥수수 잎을 흔들 때면 사각거리는 존재를 느끼며,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을 우러러보며 시인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어떤 손길에 의하여 다독이는 풍경과 느낌은 천생시인이 들을 수 있는 숨소리이다. 귀가 밝은 시인은 천생시인이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시인인 것이다. 저문다는 것은 스러진다는 것이니 어찌 아쉬움과 미련이 없겠는가? 그러니 아름답다. 내려앉는 저녁노을은 코끝이 시큰해질 것처럼 묘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해질녘 저물어가는 풍경은 마치 기도와도 같다. ‘낙타 등처럼 세월 속에 굳어진 몸뚱이’이지만 고개를 수그리고 두 손을 모아 쥘 때의 겸손함은, 하얀 실을 따라 마침내 바늘구멍을 통과한 순간과도 같다. 그 넉넉한 오후는 통찰과 기도를 통한 기쁨과 즐거움의 경지이다.
시인은 그리움의 빛깔이 무엇인지 그리움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 시와 함께, 시를 향하여 구도의 길을 걷는다.
김창범 시인은 그간 북녘동포를 위한 길을 걸어왔으며, 그분, 절대적 존재에게 닿고자 하는 구도의 길, 거칠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왔다. 그러므로 이 시선집의 의미는 시인이 마침내 획득한 ‘자유와 꿈’과 ‘시와 노래’ 속에 그분과 함께 하는 길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시와 서정의 강을 향하여 걷는 시인의 발걸음이 마치 성자의 한 걸음 한 걸음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