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36- 탈렌트의 비유
마태18, 23-35: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을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100 데나리온과 만 탈렌트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심리학자이시고, 좋은 요리사일 뿐만 아니라 좋은 수학자이시기도 합니다.
사업가들은 이익이 있어야 사업을 성사시킵니다. 사업가는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그 일에서 전혀 이익이 없으면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사업을 하시면서 거래를 할 때는 항상 손해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을 보면 왕이 종과 셈을 합니다. 종은 왕에게 만 탈렌트의 빚이 있습니다. 종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왕은 그 종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 아내와 아이들까지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사정을 합니다. 시간을 주시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가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왕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아무 계약서도 쓰지 않습니다. 왕은 그냥 만 탈렌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만 탈렌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여러분과 제가 만 탈렌트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빚을 다 탕감 받고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다가 다른 종을 만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 준 일이 생각하고 그 친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친구가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그를 감옥으로 데려갑니다. 왕이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화가 나서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 물론 그가 갚을 수 없으니, 영영 감옥에 살아야 합니다.
이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1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만 탈렌트는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평균 주 5일 일을 했으니까 일 년에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 겨우 250 데나리온입니다. 만 탈렌트를 갚으려면 25 만 년을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몇 년을 삽니까? 300 년 쯤 살지요? 하하. 아니라고요? 이것은 일을 해 벌어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왕이 지니고 있는 호의를 보십시오! 왕이 왜 손해를 보면서 다 빚을 갚아줍니까? 우리 죄인을 되돌러 오기 위해서입니다. 그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피의 덕택으로 우리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종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만 탈렌트의 빚을 다 탕감 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께서 쓰시던 아라미아어에는 빚과 죄는 동일한 단어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요구도 없이, 아무 계약서도 쓰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뉘우치는 눈물 한 방울을 보시고 빚을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왜 거기에 마음을 씁니까?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빚을 탕감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100 데나리온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1 만 탈렌트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100 데나리온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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