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궤
사무엘 하6장1-11
관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관성(慣性)은 외력이 없는 한 물체가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관성의 법칙에 따라 되어 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상태 유지.
물론 나쁜 상태에서는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에 좋은 상태라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변함없는 신앙, 얼마나 우리들이 꿈꾸는 신앙입니까?
우리들이 꿈꾸는 신앙이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변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믿음을 꾸준히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결같이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알았을 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조차 뒤로 하고 말씀에 파묻히지 않았습니까?
한주에 두 번도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생존에 매여 있고 우리 각자의 삶에 매여 말씀은 뒤로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갖는데 왜 지금은 그때 그런 열심과 믿음이 생기지 않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때에는 많은 것을 희생도 했는데, 지금은 나의 것만을 더 많이 챙기는 욕심쟁이가 되어 버렸나.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꿉니다. 관성의 법칙의 꿈을 .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관성의 법칙이 해당된다면 그보다 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할수 없겠죠.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좋을 만큼 믿음이 있었던 그런 삶의 지속.
얼마나 꿈꾸는 신앙생활입니까?
그래서 이게 안되다 보니 인간들이 무엇을 합니까?
바락을 하죠?
그때 신앙생활은 저절로 그런 마음이 생기고,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열심을 품었고, 말씀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제 그런 맘이 싹 가셨다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욕심은 있죠? 좋은 믿음 가져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성경도 읽어 보고 기도도 해 보고, 찬송도 불러보고,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어느 정도 해도 자연스러움이 없습니다.
자연스런 만족이 없습니다.
의도적인 만족. 자신이 만들어낸 기쁨, 즐거움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니라 평안이 아니라 자신이 수고하여 땀 흘린 댓가로서의 만족과 기쁨과 평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꿉니다.
신앙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다른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일이 잘 풀릴때가 있죠?
그럴 때도 생각합니다. 계속 주님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인도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상태로 쭉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주님을 자신이 만족하는 상태로 묶어 두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마태복음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형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의 대화를 들은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토록 보고싶던 모세, 엘리야를 눈앞에서 목겪했습니다.
그러니 이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아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 환경이 되면 이렇게 말하죠.
주님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현 상태를 계속 유지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행동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무리 삼만을 모으고 하나님의 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가져 오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다윗과 함께 하신 여호와를 다윗이 잘 알고 있죠.
그러면 왜 굳이 하나님의 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가져오려 할까요?
그것은 현 상태의 지속성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밀어 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언약궤를 자신이 머문 곳에 둠으로 말입니다.
즉 다윗은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다윗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다윗이 알고 있죠.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면 언약궤를 가져 오면 되지 않겠느냐.
즉 하나님이 계속 내편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누가 죽습니까?
웃사가 죽습니다.
언약궤를 옮기는데 갖출 것은 다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소가 말썽을 피웁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뜁니다.
소들이 뛰니 새 수레에 실린 언약궤가 어떻게 됩니까?
덜커덩 하면서 수레에서 움직여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동작 빠른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언약궤가 떨어질것 같아 붙잡았는데 이것이 죽을 죄입니까?
죽을 죄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언약궤가 통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지 않고 언약궤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람의 방식으로 언약궤를 붙들려고 한 것입니다.
언약궤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활동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다윗편을 들어서 활동해 오셨다면 앞으로도 쭉 계속해서 다윗편에 서서 활동하시는 것이 다윗쪽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자신의 주변으로 갖고 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덜커덩 거릴때 웃사가 언약궤를 붙드는 행동은 곧장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언약궤란 인간의 손에 의해 고정될 수 없습니다.
만일 언약궤를 인간의 손으로 고정하려고 할 경우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언약궤는 철저하게 언약궤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일하시지 인간 중심, 다윗중심으로 일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서 언약궤를 자신에게 가져 올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갔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오벧에돔과 온 집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로 인해 혼이 났는데 오벧에돔은 오히려 여호와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고정하려고 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들을 꼭 붙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도록 그 구원과 은혜들을 계속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인간의 바램대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2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을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 까 두려워 함이로라”
희한하죠. 복음이란, 은혜란, 구원이란 유동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절대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복음, 은혜, 구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장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 가 함이라”
우리가 들은 복음과 좀 다르죠.
2절을 보면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에게 안도를 주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위해 인간을 마구 흔든다는 것입니다.
좀 표현이 이상합니까?
철저하게 주님지신 십자가만 전하라고 인생에게 수많은 상황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