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요한복음 15장 1~11절)
박영주 목사
(우리 회 전임회장)
1인 가구가 전체 인구의 1/4이고, 곧 1/3에 육박할 것 같습니다. 잠깐 생각해 보아도 깜짝 놀랄 변화입니다. 부부와 두 자녀로 이루어지는 4인 가족의 우선 비율이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우리는 그 구성을 핵가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을 가족의 기준 모델로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동안 살아왔습니다. 그 전 세대에는 조부모, 부모, 자녀로 구성되는 이른바 대가족이 우리의 기준 모델이었지요.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바뀌는 변화도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부모를 모시지 않고, 자식이 자신의 자녀들과만 살 수 있느냐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서였습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가족의 최소 단위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상식이 붕괴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동안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의 형태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을 소스라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소위 하나의 모델은 없는 것이지요. 하나의 형태만이 안정적이고, 규범적이며, 그 밖의 다른 형태는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부정적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재고될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1인 가구의 급증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주저함, 결혼의 지연에 따른 독립, 직장이나 학교 이동으로 인한 독립, 결혼 가구의 1/3에 해당하는 이혼으로 인한 소위 돌싱(돌아온 싱글), 특히나 100세 시대를 앞두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혼자된 노인 인구 등, 이 모두가 우리가 놀랄 수밖에 없는 1인 가구 초급증의 이유입니다. 경제가 어렵든, 병이 나든, 어떤 형편에서도 부모와 자식은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래서 ‘가족’이라면 함께 사는 것을 생각해 온 우리들에게, 혼자 사는 것도 가족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1인도 가족이구나, 1인에도 가족이라는 것이 성립되는구나 하고 이해하기가 무섭게 그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나 혼자 산다.’ 여기에는 많은 사회적 요인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 사생활중심주의도 한편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가족 중심의 가족, 핵가족에서 존중 받지 못했던 구성원,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하나의 대안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어왔던, 시부모, 부부, 자녀 등 가족 다자간에 생길 수 있는 많은 갈등 요인들이 1인 가족으로 출구를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가족의 형태가 다함께 우리들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규범적인 가족만을 상정할 경우, 이제는 상처 받는 많은 회중들이 있습니다. 행복하고 단란한 ‘부부+자녀’ 가정만을 상정한 전통적인 설교는 그 가족 형태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많은 이들을 소외시킵니다. 전체 인구의 1/4은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닙니다. 다수자입니다.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물론이고, 핵가족 하에서의 결혼과 가정은 많은 면에서 성역할과 자녀 역할을 요구 받았습니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에게 가장이라는 과도한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들이 가진 통합적인 인간성을 꽃피우지 못했습니다. 사회에서 발휘하는 그들의 능력은 ‘살림’을 일구어 나가는 가정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와 가정의 이분법이 엄격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지배와 사회적인 많은 기득권을 행사했습니다. 가족은 협동하는 가운데 꽃피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군림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통합적인 인간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여성들은 삶과 가정을 책임적으로 영위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정의 2차적인 존재로서 살아 왔습니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위대한 역량이 오히려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양성(兩性)의 훌륭한 덕목들을 통합한 인간성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성역할에 따른 모델을 가지고 자신을 형성시켰습니다. 사회의 계급 구조가 가정에서는 가부장제가 되었습니다.
가정의 시작은 남자와 여자의 결혼에서 시작됩니다. 성서는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결혼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가셔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의 흥을 돋아 주셨습니다. 이런 기쁜 자리를 마다하고 결혼을 기피하는 세대가 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부장적 결혼 구조와 삶에서 갈등을 하던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되었습니다.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고집하는 사회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결혼관과 가족관을 가진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말은 그게 성서가 가르치는 질서라고 하며 에베소서 5장을 근거로 듭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아내는 남편 섬기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21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시오”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22절을 강조합니다. 서로 순종하라고 했는데,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처럼 아내의 머리는 남자니까 가장인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고 섬기라고 한 부분을 강조해서 남편은 지배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 가정의 질서라고 주장합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남편에 대한 권면이 이어지는데, 이에 대한 관심은 약합니다. 사실상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섬기고 복종하든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은 사랑하고 다른 쪽은 복종하고 섬긴다는 관계는 위계적 가부장 질서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이 교훈을 33절에서 이렇게 맺습니다.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존경과 복종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복종하는 관계에서는 결코 존경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핵심인 서로 순종하고, 그리스도가 우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아내의 복종을 강조하는 한, 우리 교회에서도 비혼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한 결혼,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강하게 외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 3:28).” 로마 제국 사회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토대인 노예제와 가부장제의 철폐 선언입니다. 개선 선언이 아닙니다. 철폐 선언입니다.
인류가 존속해 오는 동안 발전시킨 계급주의, 가부장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부여 받은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꽃피우기를 원하십니다. 성서는 이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역사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억눌러야만, 누가 누구에게 억눌려야만 유지되는 사회가 소위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바로잡기 원하십니다. 바로잡힌 세상이, 바로잡힌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 나라’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바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풍성한 생명의 잔치, 남녀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성장하는 나라, 인간과 자연이 풍성함으로 공존하는 나라, 이 나라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5절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 상을 그리고 있는데, 그 표현이 매우 생생합니다. 이 은유에 따르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돌보는 농부입니다. 그 분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치고 손질하십니다.
이 은유에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띕니다. 첫째, 포도나무 은유는 기독교 공동체를 상호관계, 상호성의 공동체, 서로의 안에 머무는 공동체로 특징짓습니다. 여기서 기독교 공동체의 상호성은 15장 1~11절에서 열 번에 걸쳐 나오는 ‘거하다’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표현됩니다. ‘거하다’라는 용어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관계(15:10),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관계(15:4, 9), 그리고 예수에 대한 공동체의 관계(15:1,7)를 설명합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상호성은 공동체를 위한 생명의 가능성을 예시합니다.
공동체 내의 개인은 자신을 유기체의 구성원으로 인식할 때에만 번영할 것입니다. 개인은 자유 행위자가 아닙니다. 개인은 서로 얽혀 있는 포도나무 가지로서 예수와 함께 거할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이 은유는 상호 관계와 책임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은유에서 개인은 예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머물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은유가 그리고 있는 상호성은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둘째, 포도나무 은유는 공동체의 구성과 조직에 대해 급진적이고 비위계적인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심지어 반(反)위계적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가지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가지가 다른 가지보다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지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결과로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평가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15:2). 포도나무의 농부인 하나님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결실을 맺기 위해 가지를 치고 그 모양을 다듬습니다. 그분은 죽은 가지를 찾아 언제 어느 부분을 쳐내야 할 지 결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죽은 가지의 자리에서 파릇파릇 돋아날 가지, 즉 새 생명의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농부는 하나님 한 분뿐이므로 모든 가지는 그분 앞에서 평등합니다. 포도나무, 즉 공동체의 미래는 가지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특별한 지위에 있는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 은유는 새로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가지들을 자라나게 하는 포도나무는 기둥은 알아볼 수 있지만, 한데 얽혀 있는 가지들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떤 가지가 처음으로 싹을 틔웠는지, 어떤 가지가 가장 긴지, 한 가지의 처음은 어디이고 다른 가지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에서 구성원 사이의 위계 서열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구성원이 한 포도나무에서 자라고 한 분이신 포도나무 농부가 모두를 똑같이 보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모든 가정 구성원이 평등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가부장제 안에서는 그 구성원 모두가 열매 맺는 가지로서 풍성해지기가 어렵다고 진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 선포에는 치명적인 환자로 진단 받은 가족 관계가 치료 받고 새 생명을 얻는 길이 힘차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만을 우리를 열매 맺게 하는 농부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둥으로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모양대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신나는 열매 맺는 과정입니다. 우리 모두 포도나무처럼 서로 평등한 가족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가정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