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이 고대하는 바
(로마서 8장 19~22절)
채미라 목사
(해성교회)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이 노래는 13세기 성인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 중에 나오는 가사의 일부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는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찬란한 생명의 빛을 내뿜으며 그 모습 그대로 밤낮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 프란치스코의 깊은 영성이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들이 되살려야 할 마음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연을 형제자매로 부르며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데 반해, 오늘날의 시인 박노해는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시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을 이렇게 지탄하고 있습니다.
문맹(文盲)은 동정 받아 마땅하고,
컴맹(com盲)은 도움 받아 마땅하나
환맹(環盲)은
지탄 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파괴하는 자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다 쓰는 자
오늘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신의 발밑을 허무는 자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동정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환경을 모르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 못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음미해 보아야 할 시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창조신앙을 고백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신 피조의 세계를 이렇게나 형편없이 오염시키고 착취하고 파괴한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한다는 말씀(요한1서 2:5-6)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는 전 세계인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모두 지구가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얼마나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강과 바다의 오염, 숲의 파괴, 지표면 유실, 급속한 사막화, 온실효과와 지구 온난화, 생물종의 멸종, 핵 쓰레기의 위험,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삶의 위협은 우리와 후손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미세먼지는 심각한 수준이며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더 길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파괴되고 오염된 생태계의 문제는 고스란히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 우리 후손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시골 목회를 하면서 작은 텃밭을 가꾸는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작은 씨앗들을 심어 놓으면 어떻게 그 씨앗 속에서 싹들이 돋아나 열매가 맺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자꾸만 심어보고 싶습니다. 싹이 날까? 열매는 맺을까?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작은 쌀알을 심어 놓으면 쌀이 주렁주렁 달리는 쌀포기가 되고, 작은 사과 씨앗을 심어 놓으면 싹이 터서 자라 사과나무가 됩니다.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땅속에서 봄이 되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봉숭아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옵니다.
저는 땅이 보배라고 느껴졌습니다. 흙 한줌이 보배라는 생각이 듭니다. 흙에서 쌀이 나오고, 흙에서 채소가 나오고, 흙에서 과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보듬고 열매를 내주는 땅, 흙 한줌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이 생명체들을 키워내는 물 한 방울과 햇볕 한 줌이 역시 보배입니다. 금덩어리, 다이아몬드는 보배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수도 없고, 목이 말라도 마실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은 보배가 아닙니다. 아침이면 날아와 창가에 앉아서 노래하며 잠을 깨우는 아름다운 새소리를 금덩어리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없이 베풀어놓으신 흙이며, 물이며, 바람이며, 공기며,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피조물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밥상에 올라와 있는 먹을거리들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생명의 기운들이 모인 생명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몸을 만들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우리가 생존하게 하고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생명을 취하여 생명을 누리며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갈 때는 이 땅에 영양소로 우리의 몸을 내어주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와 이 자연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와 자연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을 건강하게 보살피며 사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을 잘 보살피는 일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명들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선해야 합니다. 아름다워야 합니다. 감사하여야 하며 많은 생명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1967년 린 화이트라고 하는 사람은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글을 ‘사이언스’지에 게재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생태적 위기의 뿌리에는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종교의 모습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서양 기독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을 해 왔습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육체는 더럽고 추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억압하고 억눌러 왔고, 정신은 이성적이고 의지적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분리되어 ‘거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역으로 보았습니다. 땅에 속하고 육에 속한 것을 열등하고 비천하게 보고, 생리를 하고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인류 역사 속에서 비천하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해 왔습니다. 반면, 남성들은 우월하고 이성적이고 저 하늘에 속한 거룩하고 영적인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런 반쪽짜리 이해가 오늘날 땅과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고 죽이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캐롤린 머천트는 여성과 자연이 역사 속에서 받아 온 억압을 ‘쌍둥이 억압’이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1:28)입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오해를 일으킬 만했습니다. ‘정복하라’(카바쉬)는 ‘발로 밟다’(미 7:19), ‘복종케 하다’(민 32:22)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땅을 발로 밟고, 복종시켜서 땅을 자신의 것으로 취급하여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좇아 땅 속에 포함된 광대한 자원을 개발하며 유용하게 이용하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지 말고 오히려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해 보았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인류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자연을 많이 섬겼어요. 바다를 섬기고, 태양도 섬기고, 해와 달과 별들도 섬기고, 거대한 나무, 큰 바위도 섬겼지요.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참 한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혜롭고, 소중한 존재로 만들었는데 말입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고, 풍성하게 누리며 살라고, 온 천지만물을 다 만들어 놓은 후에 인간을 창조해 주셨는데 말이지요. 그러니, 자연과 그 모든 만물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혜롭게 잘 이용하라, 그것들을 잘 돌보고 보살피고 적당히 잘 사용해서 풍성한 삶을 누려라. 인간이 두려워할 대상이 땅과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으로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게’(토브- 선하다) 천지를 창조해 놓으시고, 인간에게 그것을 잘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기대하신 모습은 선한 것들을 사랑과 인자와 자비롭게 다스리는 청지기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해 놓으신 생명들이 충만하고 풍성하게 번성하는 것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것은 잘 보살피고, 돌보고, 아끼고,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미세먼지 등 많은 환경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기독교윤리학자인 제임스 내쉬는 우리가 생태위기의 사실을 얼마만큼 아느냐가 중요한 환경의 문제를 알게 하는 그 자료가 우리에게 얼마나 도덕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환경 파괴 숫자에 무관심한 것은 환경 맹인이지만, 그 숫자를 보고 알면서도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양심 불량인 거지요. 여성신학자 셀리 맥페이그는 세계를 ‘하나님의 몸’이라고 부르면서 생태학적 관점으로 이 세계를 보라고 합니다. 지구를 하나님의 몸으로 볼 때 생태계 파괴는 하나님의 몸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는 거지요. 기독교인들이 이런 신앙을 갖는다면 생태계는 보전될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신앙으로 생태계를 살리고 보호하는 일을 ‘녹색 신앙’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녹색 신앙입니다.
피조물들의 죽음의 슬픈 노래가 온 천지에 울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간절히 고대하고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피조물들이 풍성히 생명을 얻도록 돌보아 주고, 사랑해 주고, 아껴 주고, 보듬어 주는 이들일 것입니다. 다른 생명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없이 인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생명들을 잘 돌보고 가꾸고 아끼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을 아끼는 길입니다. 다른 생명들을 형제자매로 보았던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되살려, 하나님의 자녀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도록 다 함께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