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푯대를 향하여
(디모데후서 4장 6-8절)
박인숙 목사
(베다니집 관장)
내가 죽던 날
내가 죽던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또 요한 계시록 20장이라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패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은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취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날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같이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을 알 터이니.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이니!
이 글은 한신대 학장이셨던 김정준 목사님의 ‘죽음에 대한 단상’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드린 유가족들의 슬픔에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고인은 이생에서의 고통과 수고를 마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사실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의 이별에 마음이 아프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슬퍼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고향,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히9 : 27)
우리 인생은 이 땅에 잠깐 살다가 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자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을 생각해보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정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억울해 합니다.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지 못하면 편안히 죽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죽음 앞에서 공포와 절망밖에 남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습니다. 평소 삶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그러기에 거룩한 삶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친지의 죽음 앞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하게 되는 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지 바울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3장 2-3절에서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이 말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들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자신의 몸이 상하는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고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아 달려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지, 목표를 향해 달려왔지만 이룬 것이 무엇인지, 반면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미국 애플사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잡스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그로 인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56세에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윙윙거리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온갖 줄을 통해 투여되는 약물에 의지해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그가 죽음 앞에서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고작 침대 한 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이루고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면서 아무것도 만질 수도 가져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단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행복한 기억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업적을 이루었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그 추억만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이 이루고 성공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사랑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합니다.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처럼 바쳐질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딤후 4:6-7)
인생은 태어나면서 죽음까지가 인생길이고, 경주하는 길입니다. 죽음은 인생 달리기의 종착역으로, 삶의 완성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탄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면, 죽음도 하나님의 은총임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의 눈이 감긴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에서 “죽음이 하나님과의 일치와 친교로 가는 길이므로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과 관련해서 두 가지 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생명신앙과 영원한 신앙입니다. 영원한 생명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죽음을 예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올바른 인생, 후회 없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죽으면 없어지고 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이방인의 선교사로 소명을 받은 후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힘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가올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예상하고서 ‘이제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주께서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래에 받을 상급을 사모함으로 죽음에서도 오히려 위안과 용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움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진리를 위해 싸웠으며 복음을 위해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본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당대의 편협한 유대주의와 열광주의에 맞서서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기고, 자신을 ‘마치 똥처럼’ 여기며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르심의 상을 좇아 푯대를 향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푯대를 향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인간적인 준비를 합니다. 디모데에게 마가를 로마 감옥에 있는 자신에게 데려 오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마가가 자신에게 요긴한 사람이라고 씌어 있지만, 사실상 바울은 마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어린 치기로 선교지를 떠난 마가를 감싸지 못하고 내친 일이 있습니다. 이제 감옥에서 죽어가는 날을 기다리면서 바울은 죽기 전에 마가와 화해하고 싶어 합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는 바울의 말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면서 해야 할 일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제 죽음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상처준 사람, 내가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해야 합니다. 이게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해야 할 것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감당하기 힘들고 고난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해도 부르심을 받은 그 자체로 감사하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의 날을 깨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 속에서도 자족할 줄 알며 오직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살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부끄러움 없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갔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이 귀하게 여김을 받는 존엄한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모든 차별과 불평등, 갈등과 싸움에서 벗어나 화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와 생명, 화해와 일치와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 앞에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충성된 종으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여러분,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우리 앞에 다가올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좇아 선한 싸움을 싸우며 푯대를 향해 잘 달려 나갑시다. 우리 육신의 죽음은 잠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가운에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