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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역자회주일 설교문
아비가일의 지혜
(사무엘상 25:18~38)
설교 김경희목사
(목포산돌교회)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33절)
사무엘의 죽음과 아비가일
사무엘상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을 알림으로써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원래는 나발이라는 사람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어떻게 다윗의 아내가 되는지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죽음과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일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그의 남편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죠. 다윗이 아직 도망자 신세일 때 나발은 그를 박대하고 모욕을 주어 격분하게 만듭니다. 이 일은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 단련된 다윗의 정예부대에 아무리 부유한 나발인들 당해낼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발 집안의 몰살을 계획하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촉즉발의 위기의 길목을 막아선 것이 바로 아비가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재빠른 대처와 겸손한 말과 확신에 찬 조언이 전쟁을 막고 무고한 피흘림을 막습니다. 이 일로 나발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사무엘의 죽음으로 마음이 무너진 다윗,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왕의 길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지혜로운 여성의 등장으로 그 위기를 넘깁니다. 또한 그 일을 계기로 다윗은 헤브론의 세력까지 규합해내는 결실을 얻게 됩니다. 흔히 이 이야기의 교훈을 지혜를 발휘해 결국 왕의 아내가 된 한 여성의 이야기에서 찾지만, 사실은 큰 보상이 돌아간 것은 다윗이었고, 무엇보다 장차 왕이 될 무흠의 자격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
사무엘이 죽은 후 다윗은 사울을 피해 바란으로 도망칩니다. 도망자 신세였지만 그를 따르는 칼을 찬 군사가 600명이었고, 아마도 그에 따른 식솔들까지 하면 족히 2,00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의 공격을 피해 다니는 것뿐 아니라 크고 작은 싸움들, 그리고 종종 용병이 되어 전쟁을 치르기도 했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식량 문제였습니다. 치욕스럽게도 블레셋의 용병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것 역시 그것 말고는 살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바란으로 도망친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는데 바로 갈멜의 나발이 양의 털을 깎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계약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윗의 무리들은 종종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었고 이민족이나 불량배들의 습격을 막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니 알만하다면 분명 그 주인은 자기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했고, 일 년에 한번 있는 양털 깎는 날에는 자기들에게도 잔치의 부스러기가 주어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겨우 소년 10명을 보내 식량을 요구합니다. 얼마의 양을 정한 것도 아니고, 그저 손에 쥐어지는대로 주십사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만 보아도 최대한 예를 갖춥니다. 무려 네 번의 ‘샬롬(평안)’을 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발의 샬롬, 나발의 집안의 샬롬, 그리고 나발의 소유, 즉 그 산업의 샬롬까지 빕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무례하고 오만하며 모욕적인 답변이었습니다.
나발은 말합니다. 10절입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10절)
이미 알려졌을 다윗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새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사울이 종종 사용하는 다윗을 깎아내리는 호칭이며, ‘억지로 떠나는 종’이라는 표현에는 다윗의 조상들의 이름이 들어 있어 그의 근본까지 무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억지로 떠나는 종’을 히브리어로 보면 ‘오바딤 함미트파레침’입니다. 이 두 단어의 어근이 바로 그의 조상 ‘오벳’과 ‘베레스’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심한 모욕을 느꼈고, 한 순간의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자기 군사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언제나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여쭙던 다윗이었습니다. 때로는 거듭 몇 번이나 여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말이 없으며, 심지어 자신이 이 일을 행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벌이 자기에게 내리리라 맹세하기에 이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저주의 맹세입니다.(22절)
어리석은 나발
나발이 실제로 그의 실명이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이름을 ‘바보’라고 지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실제 이름이 사라질만큼, 그의 인격만이 남아 회자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어쩌면 어원이 같은 다른 발음이었을텐데 후에 ‘나발’로 고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상 25장 처음에 소개한대로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외모가 아름다운데, 그와 대조적으로 그의 남편은 나발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나발의 종마저도 그를 ‘블리야알의 아들’(17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발을 소개할 때 이름이나 성품보다 그의 재산이 먼저 소개됩니다. 인격보다 그 소유가 앞서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가 권력인 시대, 소위 재벌 일가의 갑질을 보아왔기에 나발의 삶을 상상하기가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어리석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리석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바보스러움이나 멍청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재산이 많다는 것으로 인해 그는 거만합니다. 그는 잔인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약자를 함부로 대합니다. 자기를 도운 사람에게 감사 대신 모욕을 퍼붓고 그 방법 또한 교묘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다윗의 심사를 건드렸을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다윗입니다. 수많은 보복의 기회를 겸손히 떠나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장 연약한 곳을 자극해오는 나발의 도발에는 다윗도 이성을 잃습니다. 사무엘상이 말하는 나발의 어리석음은 바보같음, 멍청함이 아니라 잔인하고 완고하며 포악하며 오만한 그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종들마저도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몰살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사정을 듣는 즉시 마음이 죽어 돌처럼 굳어버릴 만큼의 큰 위기를 말입니다(37절).
아비가일의 지혜 1, 빠른 판단과 행동, 그리고 겸손한 말
이 때 오히려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한 인물은 안주인 아비가일이었습니다. 한 종이 나발이 아닌 아비가일에게로 와서 다윗이 보낸 전령들과 주인 나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그 종은 그 일의 심각성을 감지했습니다. 나발은 그 종만큼도 사태파악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소유와 그 소유로부터 오는 오만이 그를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종은 아비가일에게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17절)라고 말하며 뭔가 행동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비가일은 급히 다윗에게로 보낼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소년 열 명을 보내 청하였던 “네 손에 있는 대로”(8절)의 그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손이 미치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는 다윗에게로 먼저 보냅니다. 20년 만에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생 야곱을 만나러 오던 에서, 그의 마음을 풀기 위해 선물을 앞장서 보냈던 야곱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분명히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먼저 행동합니다. 그리고나서 그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시간을 법니다. 다윗에게는 분노를 잠재울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마침 두 사람은 산길을 돌아 호젓한 곳에서 마주칩니다. 그들이 만난 장소를 성서는 ‘호젓한 곳’(쎄테르)이라고 하였는데, 원래의 뜻은 ‘은신처’ ‘비밀스런 곳’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마자 급히 다윗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얼굴을 땅에 대는 행위는 죄인이나 종이 취하는 자세이며 가장 낮고 겸손하지만, 굴욕적인 몸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하는 가장 긴 ‘여성의 발언’을 시작합니다. 그 발언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낮추고(당신의 여종 5회), 상대를 높이고(나의 주님 14번),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장차 일어날 일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신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도 일깨워 줍니다. 최종적으로 상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때 자신도 기억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좋은 결말을 그려보도록 듣는 이의 생각과 시선을 확장시킵니다. 그녀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덧 당장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건의 전체를 보게 되며 또한 먼 미래까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혜롭습니다. 지금까지 보면 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비가일의 태도부터 지혜로와 보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재빠르게 행동한 것 역시 살아있는 지혜입니다. 거기다가 겸손한 태도와 언변을 갖추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이만큼의 지혜만 갖추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의 결정을 뒤바꾸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녀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이 때 사용된 지혜라는 단어는 ‘타암’(33절)입니다. 이 단어는 ‘행동’에 초점을 둡니다. 많이 아는 지혜가 아니라 바르게 행동하는 지혜를 갖춘 여자입니다. 아비가일은 말을 할 때와 침묵을 지킬 때를 알았습니다(19,36절). 박노해 시인의 글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때맞춰 침묵할 줄 안다.”(박노해의 걷는 독서) 바로 아비가일을 두고 한 말이죠.
그러나 자칫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고, 말로써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여 전체 그림을 보게 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대화의 기술’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참된 지혜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진정한 지혜는 무엇일까? 아비가일이 보여준 지혜는 무엇일까? 아비가일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지혜, 그것은 어떤 지혜일까? 이것이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 2, 중심을 일깨움
오늘 주요본문인 아비가일의 발언 부분에 좀더 집중해서 보겠습니다. 그녀는 이 말들을 통해 과연 무엇을 이루어냈을까요? 24~31절입니다.
아비가일은 우선 땅에 엎드려 절하며, 겸손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나서 일단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합니다. 자기 남편의 잘못 역시 인정합니다. 그리고나서 그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죠. 일단 화가 난 상대방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전적으로 말입니다. 변명부터 하거나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려고 했다면 상대의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26절부터 아비가일은 다윗이 놓친 핵심을 말합니다. 바로 ‘야훼’입니다. 400명의 칼 찬 군사와 함께 달려오는 동안 다윗은 한 번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 안의 야훼를 깨웁니다. 지금 그의 길을 막아선 것은 하찮은 여종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끝입니다. 다윗은 이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야훼와 다윗의 관계를 확인시킵니다. 야훼께서 다윗을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며, 다윗은 오직 야훼의 싸움만을 해왔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앞으로도 오직 야훼의 싸움만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를 예언하며 지금 사적인 보복으로 흠을 내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다윗을 두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여기 아비가일이 처음입니다. 즉 나단의 신탁(삼하7:16) 이전에 이미 그녀의 입을 통해 다윗의 미래가 선언된 것입니다. 이 때 아비가일은 지도자를 뜻하는 말로 ‘멜렉’(왕) 대신 ‘나기드’(지도자, 통치자, 영도자)를 사용합니다. 백성 아비가일에게 다윗왕은 지배하는 왕 ‘멜렉’이 아니라 책임지는 왕 ‘나기드’였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야훼’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그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합니다. 29절입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아비가일은 이 말에서 다윗에게 익숙한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싸개’(체로르)와 ‘물매’(켈라)입니다. 이것이 특별한 이유는 이 표현들이 다윗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동으로 있을 때 항상 그의 손에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어릴 적 경험을 아비가일이 알고 있는 것은, 다윗이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나발이 “다윗이 누구요?”라고 했던 말은 정말 몰라서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아비가일은 장차 다윗의 원수들이 어떻게 될지를 그의 경험을 소환해 미리 알게 해 줍니다. 그들은 마치 다윗이 목동일 때 손에 항상 쥐고 다니던 물맷돌처럼 내던져질 것이고 다윗의 생명은 야훼와 함께 생명싸개에 고이 싸일 것입니다. 목동들은 자신이 지키는 양을 셀 때마다 돌멩이 하나씩을 주머니(17:40, 켈리, 싸개와 다른 뜻이지만 비슷한 용도)에 넣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광활한 들판,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는 양들, 그 기억을 소환하여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그 뛰어난 언변에 있지 않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그저 처세술일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분노에 사로잡힌 다윗의 중심을 깨어나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그의 자리로 그의 길로 다시 돌아서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 3, 생명과 평화
부나 권력이 인격보다 앞설 때, 그것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인간은 쉽게 자제심이 풀어져 진짜 인성을 드러내곤 합니다. 오늘날은 권력보다 부가 더욱 자기 민낯을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성화되지 못한 권력은 폭력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점점 더 강해져 가던 다윗의 무리는 한 순간 폭도로 변할 찰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보여주는 어리석음의 또 한 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주 선 아비가일의 지혜를 보게 됩니다.
다윗은 한 순간에 이성을 잃고 폭주합니다.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출동시켜 사적인 보복의 피를 보려고 합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지금까지 지켜온 왕이 되어가는 과정도 노력도 이 순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잊혀졌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합니다. 나발 같은 사람의 모욕이니 어쩌면 더 자극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25장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24장과 26장에는 다윗의 숭고하리만치 뛰어난 자제력과 일생 최고의 영적 승리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울을 눈앞에서 없앨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장면입니다. 그 이유는 보복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자신의 손으로 해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24:12, 26:10). 분명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내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흡족했을 것입니다. 이랬던 다윗이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혀 나발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행해왔던 모든 싸움들이 ‘야훼의 전쟁’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공연히 사람을 죽이거나 몸소 원수를 갚는 일’의 어리석음을 일깨웁니다. 다윗의 위치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힘은 결단코 그의 사적인 감정의 분출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비가일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전쟁을 막고 살기 위해서, 무고하게 희생될 수 있는 수많은 목숨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머리를 땅에 대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며, 격분한 권력자 앞에 서는 두려움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김훈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됐습니다. 영화는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설전’이 주요 장면을 이룹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보고 나서 분명 ‘최명길이냐 김상헌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대의와 명분을 지키느냐 실리를 챙기느냐,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복잡함과 역사의 갈 방향 앞에서 혼돈스러웠을 것입니다. 영화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지금, 그리고 미래의 역사와 선택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절대적 가치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었습니다. 최명길의 말입니다.
“전하, 저들이 말하는 대의 명분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옵니까? 먼저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 아니옵니까?”(영화 <남한산성> 최명길의 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명길의 길이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선택과 그의 길이 옳기 위해서는 영화 속 그의 말대로 “목숨을 보존하여 … 백성과 함께 새로운 날을 만들어” 나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날을 만들어간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 성서 속 여인들에게서 봅니다.
지혜로운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
아비가일의 지혜와 용기를 닮은 여인이 사무엘서에 두 명 더 나옵니다. 사무엘하 14:2 이하의 드고아의 여인과 20:16 이하의 벧마아가 아벨의 여인입니다. 성서는 그들을 ‘지혜로운 여인’(이샤 호크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왕과 아들 압살롬 간의 평화를 위해 왕 앞에 감히 나섭니다. 벧마아가 아벨의 여인 역시 세바의 반란으로 인해 한 도성이 파괴될 위험 앞에 당당히 나섭니다. 그녀들의 이름 앞에 ‘도성’ 이름이 나온 것은 그 도성들이 바로 그녀들이 지켜낸 도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보인 용기에 바로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두 여인의 말과 행동 역시 아비가일처럼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동의 목표는 전쟁을 피하고 생명과 평화를 지켜내는 데 있었기에,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선명하게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25장은 하나님이 나발을 쳐서 죽게 하고, 그 후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그녀의 모든 말들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었음이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아직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목숨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그녀를 반려자로 두어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때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과 20절에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제르 케네그도’죠. ‘에제르’를 ‘돕는’으로 ‘케네그도’를 ‘배필’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번역은 ‘짝이 되는 협력자’입니다. ESV 성경은 ‘a helper fit for him’라고 번역했군요. ‘그에게 딱 맞는 협력자’가 되겠네요. 배우자란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진 협력자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신의 왕업을 이루어갈 ‘협력자’로서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 사람에게서 사람을 만들어내신 목적은 그 사람과 같은, 그러니까 ‘짝이 되는’ 협력자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남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러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에제르 케네그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러한 성서의 본래 뜻을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이름 높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했고 규정했고 가르쳤습니다. 여성을 심지어 ‘완전히 발달하지 못한 미완성의 남자’(아리스토텔레스)로 규정하였고, 성적 대상으로, 부수적 존재로, 오로지 모성적 의무를 다해야 하는 존재로 한정지었습니다. 페미니즘운동이 일어난 것이 불과 50년이 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워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그러한 현실 가운데도 보물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단지 나발의 아내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된 여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전쟁을 막았고, 다윗이 왕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이름 뜻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의 자랑’인 것이죠. 아버지의 기쁨은 곧 야훼의 기쁨입니다.
오늘, 아비가일들
선악과 사건 이후에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창3:20). 하와의 뜻은 삶, 목숨, 생명을 주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에는 ‘땅이 온갖 침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무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독일성서주석).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나는 민들레 같은 수많은 억압을 이기고 다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들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생명의 어머니 하와, 무모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낸 지혜로운 여인들, 그 역사의 한 지점에 아비가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하와들이 아비가일들이 이 세상을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보존하여 백성과 함께 새로운 날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 생명을 낳고 길러낸 ‘하와’이자 ‘아비가일’인 여성들은 부지런히 먹이고 입히는 사람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지켜내야 할 때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 있고 상대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분이 낮거나 가진 것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고 모욕하는 나발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때맞춰 침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한낱 도망자이나 그 사람 안에서 왕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마음을 일깨워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여교역자회 주일입니다. 여교역자회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가 ‘여교역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목회하며 교우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전국여교역자회 사업을 소개하고 재정자립을 돕기 위해서입니다.”(여교역자회 주일 공문) 그저 손에 쥐어지는대로 주기를 바랐던 다윗의 겸손한 요청이 이번에는 나발이 아닌 아비가일에게 직접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양 다섯 마리면 됐을 자선이 자신의 목숨을 잃고도 채워지지 않았던 비극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이 폭력과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더 많은 아비가일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프간과 미얀마, 그리고 76년 분단의 이 나라...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 그 길, 호젓한 곳에 아비가일인 우리가 먼저 도달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 서두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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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드린 원고에서 약간의 수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