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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회 동지구회 | 19.10.14
룻기 3:10~11
에쉐트 하일
룻의 연관검색어
‘연관 검색어’라고 있습니다. 검색창에 어떤 단어를 치면 그에 따라붙어서 검색되는 다른 내용들입니다. 그 연관검색어는 검색해 보고자 하는 그 단어와 가장 밀접한 순서에 따라 쭉 나열돼 있습니다. 이 연관검색어는 사람들이 많이 검색할수록 순위가 위로 올라갑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 3장 10~11절을 읽었는데, 오늘 룻의 연관검색어의 순서를 좀 바꿔보려고 합니다.
룻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연관검색어, 어떤 단어가 떠오르나요?(질문) 나오미, 며느리, 보아스, 다윗, 효도, 이삭줍기… 좋습니다. 나오미와 며느리, 효도 정도가 상위권에 있는 연관검색어일 것입니다. 그럼 오늘 바꿔보려는 새로운 연관검색어는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께 드린 이 말씀의 제목입니다. 에쉐트 하일! (따라해 보실까요?)
에쉐트 하일은 히브리어입니다. 에쉐트는 여자라는 뜻이고 하일은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여자와 힘, 힘있는 여자, 강한 여자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아쉽게도 우리가 오늘 읽은 성경은 그것을 ‘현숙한/정숙한 여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아쉽다고 하냐면, 이 표현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단아하며 얌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니까요.
<룻기>는 흔히 효에 대한 교훈의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인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아주 낯선 곳인 이스라엘로 와서, 그 낯선 땅의 신을 섬기며, 유독 배타적인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심지어 이 여인은 효부였던 것입니다. 룻에 대한 설교는 항상, 불행해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잘 섬겨서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는 식으로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오늘 여신도회 동지구회로 모였는데, 여러분 가운데 시어머니이신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또 아직은 며느리까지인 분은요? 시어머님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어떤가요? 솔직히 며느리 입장에서는요? 사실 요즘 이런 며느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시어머니 입장에서도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이런 해석은 시대착오적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를 넘어, 꿰뚫어 <룻기>가 주는 변하지 않는 메시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은 <룻기>인데 사실상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두 사람입니다. 룻과 나오미입니다. 룻기라는 성경은 4장으로 구성된 책인데요. 1장과 4장은 나오미의 이야기이고, 2장과 3장은 룻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나오미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룻의 이야기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다복했던 나오미가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갔다가 불행한 몰골로 돌아옵니다. 그의 이름이 나오미(기쁨)이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마라(쓰다)라고 부릅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저도 다 잃고 외국인 며느리 하나를 달고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여러분 곁에 그런 분이 있다고 한번, 아니 여러분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통해, 또 기업 무르는 친척(고엘) 보아스를 통해서 가문을 잇는 아들을 얻는 이야기로 4장이 마무리되고, 심지어 그 아들이 누구냐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 2~3장은 룻의 이야기인데요,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감수하고 남의 밭에 가서 하루 먹을 거리를 얻어 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참 재밌게도 2:3에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우연히도! 나오미의 집안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죠. 그리고 3장에서는 룻과 보아스의 ‘물레방앗간 만남’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목적과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룻기>가 쓰여진 시기와 관련이 있는데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였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예루살렘 재건의 두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느헤미야는 바벨론을 이은 제국 페르시아가 파견한 총독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후로 약 50년이 흐른 후입니다. 그런데 돌아왔는데, 예루살렘이 어땠을까요? 50년 전 그대로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짓밟아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완전히 폐허가 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되는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재건불능의 절망의 상태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정확히 필요했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이방 땅에 갔다가 완전히 거지꼴로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이전보다 더 훌륭하게 가문을 회복시켰다! 마라로 불리기를 원했던 나오미가 다시 나오미(기쁨)이 되었다!
그러면 룻의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준 것일까요? 룻의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포로귀환시대의 불행하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이 배경에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는 폐허 위에 다시 나라를 세워나가야 하는 절박함의 시대였습니다. 그 절박함은 철두철미한 내적 결단과 외적인 규범들을 만들어 냈죠. 우리 민족도 그런 시기를 남북이 모두 겪었습니다. 곳곳에 온갖 표어가 난무하고 국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었죠. ‘멸공방첩’의 엄청나게 큰 글씨들이 도시뿐 아니라 시골마을까지도 점령했었습니다. 북한은 달랐겠습니까? 산을 깎아 ‘주체사상’을 새기고 가르치고 암기했죠. 이스라엘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당연히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 내세운 순혈주의, 배타주의, 냉정한 정통주의는 그 잣대에 벗어나는 힘없고 약한 존재들을 칼처럼 쳐내기에 이릅니다. 이미 결혼하여 살고 있는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내쫓기에 이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고 하여 옳은 결정과 결단이었다고 칭송해야 할까요?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요? 그들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이방인 며느리 룻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방인 며느리 룻의 사랑으로 결국 이스라엘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룻기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룻의 사랑은 오늘 본문 3:10에 ‘인애’로 번역돼 있고, 새번역 성경은 이를 ‘갸륵한 마음씨’로 번역했는데, 히브리어로는 ‘헤쎄드’입니다. ‘헤쎄드’라는 표현이 아주 낯설지는 않으실 겁니다. 헤쎄드는 자비, 긍휼, 사랑, 선행, 친절, 연민, 인자, 선대, 인애 등으로 번역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룻기>는 이방인 효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지배자들의 논리에 맞서 이방인(즉 약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헤쎄드를 말하고 있다!
에쉐트 하일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은 모압땅에서 살기는 더 힘들었겠죠. 그래서 무겁고도 부끄러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옮긴 나오미, 다행히 그 곁에 룻이 있었습니다. 룻의 눈에 시어머니 나오미는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한없이 불쌍한 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엄마)가 어느 순간, 그냥 한 여자로 보일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한없이 가여운 한 인생으로 보일 때, 그 대상이 누구인든 그렇게 보이는 순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마음이 바로 헤쎄드입니다.
다행히 돌아온 고향 베들레헴은 그 마을의 이름처럼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집안간에 책임이 있는 보아스 역시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와 이방인 여자 룻을 기꺼이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기에 나오미는 엘리멜렉 집안을 다시 일으킬 꿈을 한번 꾸어봅니다. 그 이야기가 3장에 나오는데,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되바라진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룻기> 3장은 소설의 클라이막스처럼 긴장감과 재미가 최고조에 이릅니다. 드라마라면 최고시청률 장면이 됩니다. 8~11절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순간시청률 장면입니다.
보아스가 이방인 여인 룻에게 베풀어준 친절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레위기 19:9~10은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는 안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두어야 한다”(레19:9~10)고 정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져야 하는 책임 역시 ‘고엘의 법’(레25:2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온전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헤쎄드는 사람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이 역시 엄격한 율법주의와 냉정한 정통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냉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에게 고엘의 책임을 맡기기 위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무릅쓴 룻을 치하합니다. 룻의 용기에 탄복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남자들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게 온 것을 두고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인애, 즉 헤쎄드’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룻이 젊은 여자로서 자기의 인생보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 집안의 회복을 더 우선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이것을 결코 시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더 좋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개인보다는 공동체, 나보다는 남을 우선하는 마음을 두고 ‘더 나은 헤쎄드’라고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러한 룻을 향해 ‘에쉐트 하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인데, 고아 출신의 한 여자가 미혼모로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과 그 여자를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우직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나름 굳세게 살아가는 동백이 전남친이 찾아온 날 한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 때 그 우직한 남자, 용식이 동백을 일으켜 세우면서 하는 대사입니다.
“동백씨, 약한 척 하지 말어요. 고아에 미혼모인 동백씨이 모르는 놈들이 보면은 동백씨 박복하다고 떠들고 다닐지 몰라도, 까놓고 얘기해서 동백씨 억세게 운 좋은 거 아녜요?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탓 안하고 치사하게 안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 더 착하고 더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것, 그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 쳐 줘야 되는 거 아니냐구요.”
출처 입력
동백이 위로를 받습니다. 용식이 더 굳게 문 입술로 말합니다.
“동백씨, 이 동네에서요 젤로 쎄고요,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해요.”
출처 입력
(잠시) ‘에쉐트 하일’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입니다.
“당신 참, 대단한 여성이고 멋진 여성이고 훌륭한 여성이고 장한 여성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출처 입력
룻도 그 때 울었을까요? 그동안의 삶에 대해 위로를 받았을까요? ‘하일’은 성서에 아주 많이(300건 이상)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주로 군대, 힘, 부, 강함, 능력 등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특정한 인물인 한 여성에게 이 표현이 쓰인 것은 성서 전체에서 오직 룻뿐입니다.1) 그런데 현실적으로 룻이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이 가난한 과부 이방인 여성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동백에게 무슨 힘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룻의 하일은 헤쎄드로부터 나온 하일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온 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지구회의 모든 여신도들 역시 그 힘을 가진 ‘에쉐트 하일’입니다. 엘리멜렉 가문의 씨앗은 생물학적으로야 보아스를 통하여 얻었지만, 진정한 씨앗은 룻에게 있었습니다. 이방인 며느리를 품고 이방인 젊은 과부를 받아들인 것은 나오미와 베들레헴 사람들 같지만 그곳을 먼저 선택한 용기는 룻에게 있었습니다. 지교회와 연합회 속에서 사랑과 헌신과 덕을 행하시는 동지구회 여신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방여인 룻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시는 줄로 믿고 찬사를 올립니다. 에쉐트 하일!
1)잠언의 두 군데(12:4, 31:10)에 ‘에쉐트 하일’이 나옵니다. 물론 룻기와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의 언어(어진 여인, 어진 아내, 현숙한 여인 등)로 번역이 됐습니다. 새번역은 이 중 한 구절을 ‘유능한 아내’로 번역. 하일이 여성에게 적용된 또다른 구절 잠언31:29의 하일 역시 ‘덕행’입니다.
에쉐트 하일
룻기 3:10~11
2019.10.14
여신도회 목포연합회 동지구회 설교
룻의 연관검색어
‘연관 검색어’라고 있습니다. 검색창에 어떤 단어를 치면 그에 따라붙어서 검색되는 다른 내용들입니다. 그 연관검색어는 검색해 보고자 하는 그 단어와 가장 밀접한 순서에 따라 쭉 나열돼 있습니다. 이 연관검색어는 사람들이 많이 검색할수록 순위가 위로 올라갑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 3장 10~11절을 읽었는데, 오늘 룻의 연관검색어의 순서를 좀 바꿔보려고 합니다.
룻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연관검색어, 어떤 단어가 떠오르나요?(질문) 나오미, 며느리, 보아스, 다윗, 효도, 이삭줍기… 좋습니다. 나오미와 며느리, 효도 정도가 상위권에 있는 연관검색어일 것입니다. 그럼 오늘 바꿔보려는 새로운 연관검색어는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께 드린 이 말씀의 제목입니다. 에쉐트 하일! (따라해 보실까요?)
에쉐트 하일은 히브리어입니다. 에쉐트는 여자라는 뜻이고 하일은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여자와 힘, 힘있는 여자, 강한 여자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아쉽게도 우리가 오늘 읽은 성경은 그것을 ‘현숙한/정숙한 여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아쉽다고 하냐면, 이 표현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단아하며 얌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니까요.
<룻기>는 흔히 효에 대한 교훈의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인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아주 낯선 곳인 이스라엘로 와서, 그 낯선 땅의 신을 섬기며, 유독 배타적인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심지어 이 여인은 효부였던 것입니다. 룻에 대한 설교는 항상, 불행해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잘 섬겨서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는 식으로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오늘 여신도회 동지구회로 모였는데, 여러분 가운데 시어머니이신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또 아직은 며느리까지인 분은요? 시어머님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어떤가요? 솔직히 며느리 입장에서는요? 사실 요즘 이런 며느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시어머니 입장에서도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이런 해석은 시대착오적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를 넘어, 꿰뚫어 <룻기>가 주는 변하지 않는 메시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은 <룻기>인데 사실상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두 사람입니다. 룻과 나오미입니다. 룻기라는 성경은 4장으로 구성된 책인데요. 1장과 4장은 나오미의 이야기이고, 2장과 3장은 룻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나오미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룻의 이야기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다복했던 나오미가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갔다가 불행한 몰골로 돌아옵니다. 그의 이름이 나오미(기쁨)이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마라(쓰다)라고 부릅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저도 다 잃고 외국인 며느리 하나를 달고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여러분 곁에 그런 분이 있다고 한번, 아니 여러분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통해, 또 기업 무르는 친척(고엘) 보아스를 통해서 가문을 잇는 아들을 얻는 이야기로 4장이 마무리되고, 심지어 그 아들이 누구냐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 2~3장은 룻의 이야기인데요,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감수하고 남의 밭에 가서 하루 먹을 거리를 얻어 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참 재밌게도 2:3에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우연히도! 나오미의 집안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죠. 그리고 3장에서는 룻과 보아스의 ‘물레방앗간 만남’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목적과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룻기>가 쓰여진 시기와 관련이 있는데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였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예루살렘 재건의 두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느헤미야는 바벨론을 이은 제국 페르시아가 파견한 총독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후로 약 50년이 흐른 후입니다. 그런데 돌아왔는데, 예루살렘이 어땠을까요? 50년 전 그대로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짓밟아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완전히 폐허가 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되는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재건불능의 절망의 상태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정확히 필요했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이방 땅에 갔다가 완전히 거지꼴로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이전보다 더 훌륭하게 가문을 회복시켰다! 마라로 불리기를 원했던 나오미가 다시 나오미(기쁨)이 되었다!
그러면 룻의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준 것일까요? 룻의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포로귀환시대의 불행하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이 배경에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는 폐허 위에 다시 나라를 세워나가야 하는 절박함의 시대였습니다. 그 절박함은 철두철미한 내적 결단과 외적인 규범들을 만들어 냈죠. 우리 민족도 그런 시기를 남북이 모두 겪었습니다. 곳곳에 온갖 표어가 난무하고 국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었죠. ‘멸공방첩’의 엄청나게 큰 글씨들이 도시뿐 아니라 시골마을까지도 점령했었습니다. 북한은 달랐겠습니까? 산을 깎아 ‘주체사상’을 새기고 가르치고 암기했죠. 이스라엘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당연히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 내세운 순혈주의, 배타주의, 냉정한 정통주의는 그 잣대에 벗어나는 힘없고 약한 존재들을 칼처럼 쳐내기에 이릅니다. 이미 결혼하여 살고 있는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내쫓기에 이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고 하여 옳은 결정과 결단이었다고 칭송해야 할까요?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요? 그들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이방인 며느리 룻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방인 며느리 룻의 사랑으로 결국 이스라엘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룻기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룻의 사랑은 오늘 본문 3:10에 ‘인애’로 번역돼 있고, 새번역 성경은 이를 ‘갸륵한 마음씨’로 번역했는데, 히브리어로는 ‘헤쎄드’입니다. ‘헤쎄드’라는 표현이 아주 낯설지는 않으실 겁니다. 헤쎄드는 자비, 긍휼, 사랑, 선행, 친절, 연민, 인자, 선대, 인애 등으로 번역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룻기>는 이방인 효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지배자들의 논리에 맞서 이방인(즉 약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헤쎄드를 말하고 있다!
에쉐트 하일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은 모압땅에서 살기는 더 힘들었겠죠. 그래서 무겁고도 부끄러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옮긴 나오미, 다행히 그 곁에 룻이 있었습니다. 룻의 눈에 시어머니 나오미는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한없이 불쌍한 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엄마)가 어느 순간, 그냥 한 여자로 보일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한없이 가여운 한 인생으로 보일 때, 그 대상이 누구인든 그렇게 보이는 순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마음이 바로 헤쎄드입니다.
다행히 돌아온 고향 베들레헴은 그 마을의 이름처럼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집안간에 책임이 있는 보아스 역시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와 이방인 여자 룻을 기꺼이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기에 나오미는 엘리멜렉 집안을 다시 일으킬 꿈을 한번 꾸어봅니다. 그 이야기가 3장에 나오는데,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되바라진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룻기> 3장은 소설의 클라이막스처럼 긴장감과 재미가 최고조에 이릅니다. 드라마라면 최고시청률 장면이 됩니다. 8~11절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순간시청률 장면입니다.
보아스가 이방인 여인 룻에게 베풀어준 친절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레위기 19:9~10은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는 안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두어야 한다”(레19:9~10)고 정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져야 하는 책임 역시 ‘고엘의 법’(레25:2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온전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헤쎄드는 사람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이 역시 엄격한 율법주의와 냉정한 정통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냉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에게 고엘의 책임을 맡기기 위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무릅쓴 룻을 치하합니다. 룻의 용기에 탄복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남자들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게 온 것을 두고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인애, 즉 헤쎄드’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룻이 젊은 여자로서 자기의 인생보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 집안의 회복을 더 우선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이것을 결코 시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더 좋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개인보다는 공동체, 나보다는 남을 우선하는 마음을 두고 ‘더 나은 헤쎄드’라고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러한 룻을 향해 ‘에쉐트 하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인데, 고아 출신의 한 여자가 미혼모로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과 그 여자를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우직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나름 굳세게 살아가는 동백이 전남친이 찾아온 날 한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 때 그 우직한 남자, 용식이 동백을 일으켜 세우면서 하는 대사입니다.
“동백씨, 약한 척 하지 말어요. 고아에 미혼모인 동백씨이 모르는 놈들이 보면은 동백씨 박복하다고 떠들고 다닐지 몰라도, 까놓고 얘기해서 동백씨 억세게 운 좋은 거 아녜요?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탓 안하고 치사하게 안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 더 착하고 더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것, 그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 쳐 줘야 되는 거 아니냐구요.”
동백이 위로를 받습니다. 용식이 더 굳게 문 입술로 말합니다.
“동백씨, 이 동네에서요 젤로 쎄고요,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해요.”
(잠시) ‘에쉐트 하일’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입니다.
“당신 참, 대단한 여성이고 멋진 여성이고 훌륭한 여성이고 장한 여성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룻도 그 때 울었을까요? 그동안의 삶에 대해 위로를 받았을까요? ‘하일’은 성서에 아주 많이(300건 이상)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주로 군대, 힘, 부, 강함, 능력 등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특정한 인물인 한 여성에게 이 표현이 쓰인 것은 성서 전체에서 오직 룻뿐입니다.1) 그런데 현실적으로 룻이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이 가난한 과부 이방인 여성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동백에게 무슨 힘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룻의 하일은 헤쎄드로부터 나온 하일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온 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지구회의 모든 여신도들 역시 그 힘을 가진 ‘에쉐트 하일’입니다. 엘리멜렉 가문의 씨앗은 생물학적으로야 보아스를 통하여 얻었지만, 진정한 씨앗은 룻에게 있었습니다. 이방인 며느리를 품고 이방인 젊은 과부를 받아들인 것은 나오미와 베들레헴 사람들 같지만 그곳을 먼저 선택한 용기는 룻에게 있었습니다. 지교회와 연합회 속에서 사랑과 헌신과 덕을 행하시는 동지구회 여신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방여인 룻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시는 줄로 믿고 찬사를 올립니다. 에쉐트 하일!
*이 설교는 여신도회 목포연합회 동지구회의 월례회 설교입니다. '현숙한/정숙한 여인'으로 번역된 룻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성서 속에서 유일하게 '하일'(힘)의 칭호를 얻은 실명의 여성 룻에 대한 재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1)잠언의 두 군데(12:4, 31:10)에 ‘에쉐트 하일’이 나옵니다. 물론 룻기와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의 언어(어진 여인, 어진 아내, 현숙한 여인 등)로 번역이 됐습니다. 새번역은 이 중 한 구절을 ‘유능한 아내’로 번역. 하일이 여성에게 적용된 또다른 구절 잠언31:29의 하일 역시 ‘덕행’입니다.
첫댓글 룻기 3:11의 하일은 개역은 '현숙한'이라고 번역했는데 새번역은 사태가 좀더 심각하다. '정숙한'이라는 번역은 여성의 성적 정절과 정조를 강조한 번역이다. 굳센(공동번역), 훌륭한(가톨릭성경)에 비하면 너무 여성차별적 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