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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22.6.5(환경주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녹색교회
(정원진 목사 설교*를 바탕으로)
누가복음 10:36~37
로마서 8:18~19
설교 김경희목사
거의 죽게 된 지구
지난 5월 31일에 발생해 6월 3일 진화된 밀양산불입니다. 나흘 동안 태운 면적이 축구장 1000개의 규모라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지난 3월 4일에 울진에서 발생한 불은 강릉, 삼척까지 번져서 총 213시간 43분간 꺼지지 않았구요. 서울 1/3 면적의 산림을 태우고 나서야 불길이 잡혔습니다.
작년과 재작년 연이어 대형산불이 났던 안동입니다. 산불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가까이까지 내려왔습니다. 산불을 목격한 사람들은 지옥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이게 과연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산불이 맞나 싶습니다.
여러분, 산불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실수, 또는 범죄, 또는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이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형산불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형산불의 악조건을 고온건조, 강풍, 그리고 울창한 숲이라고 말하는데, 과거와 달라진 조건은 ‘고온건조’한 기후입니다. 산불의 발생횟수는 비슷한데 비해 그 피해는 2배로 늘어난 것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죠.
오늘 비가 내려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저수지가마르는 등 겨울부터 이어진 가뭄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고온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는 한 산불위험 역시 계속 도사리고 있는 것이겠죠.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던 지난 3월 인도와 파키스탄은 40도를 넘는 폭염에 시달렸습니다. 5월에는 50도를 넘어섰죠. 이러한 봄철 폭염은 3천년에 한번 있던 것이 이제 그 주기가 100년에 한번씩으로 빨라졌습니다. 100년에 한 번이면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어쩌면 해마다 이 고통과 마주해야 할지 모릅니다.
“올 여름 예년보다 덥지만, 최악의 폭염은 아닐듯”
(ytn, 22.5.23)
ytn의 5.23자 기사제목입니다. 이 기사 제목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휴, 다행이다, 하면서 안심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우리 나라만 그 고통을 살짝 피해간다고 그것이 과연 안심할 일일까요?
지난해 유럽 국가들에게 발생한 대형산불들입니다. 뜨거워진 지구가 그 열을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서 폭발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아서 두번째로 큰 호수 오로빌 호수입니다. 호수에 기대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지금 그곳에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뭄 때문에 그 많던 호수의 물이 다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1년 사이에 닥친 재앙입니다. 54년만에 수력발전소도 멈췄습니다. “이 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보트와 사람들로 가득찼던 빈 호수를 바라보며 던지는 이 물음이 머잖아 우리의 물음이 될까 두렵습니다.
자, 그 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지구의 다른 지역입니다.
물은 지구의 또 다른 편으로 몰려가 폭우로 쏟아졌습니다. 극지방은 춥고 적도지방은 덥고 온대지방은 계절마다 추위와 더위를 바꾸어가며 균형을 이루어온 지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10~15도의 쾌적한 기온을 유지하던 텍사스에 혹한이 불어닥치고, 꽁꽁 얼어있어야 할 극지방의 지반이 녹아 내려앉는 등, 기후변화가 가져온 재난이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폭염과 고온과 산불, 폭우와 혹한. 즉 이러한 ‘기후변화(기후위기, Climate crisis)’는 다만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의 증상들일 뿐입니다. 치명적인 큰 병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빙하, 영구동토, 성층권 냉각).
인류는 ‘강도’이면서 동시에 ‘강도 만난 사람’
어린아이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열’입니다. 열이 나면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열을 내리는 데 온 힘을 씁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죠. 몸이 아프면 먼저 열이 납니다. 열을 내리는 약을 먹고, 찬 수건으로 열을 식혀야 합니다. 오한의 원인도 높은 열에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가 앓고 있는 고온과 혹한과 태풍과 홍수, 산불들은 모두 열 때문에 나타난 증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 열부터 내려야겠죠. 열이 나는데 계속 불을 때서 기온을 올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픈 지구에게 계속 뜨거운 열을 주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구온난화’(지구가열, Global heating)입니다.
지구가열, 즉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의 가장 큰 원인은 온실가스 때문인데, 이 온실가스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산화탄소입니다. 이산화탄소 자체가 열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공기를 흔들어 열을 발생하게 하고, 열이 대기권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습니다. 이산화탄소는 한번 발생하면 200년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지금 당장 우리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멈춘다고 해도, 그동안 배출한 이산화탄소만으로도 지구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기후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산업화 이후 1850년부터 2019년까지 지구의 평균기온이 1.1℃ 상승했습니다. 자연적인 기온상승이 가장 빠른 시간이 1천년에 1℃ 상승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연보다 10배의 속도로 지구 온도를 높인 것입니다. 작년 8월에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발표한 제6차 보고서에서 지구과학자들이 한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지구 평균 기온 1.1℃의 상승은 인간의 영향이 명백하다.” 이 말은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원인은 100% 인간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IPCC 워킹그룹 공동의장인 판마오 자이도 “인간의 영향으로 대기와 바다, 육지가 뜨거워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로 인한 기후변화는 극한의 무더위, 집중호우, 그리고 가뭄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지구 생태계와 인류가 직면해 있는 파국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인데, 그 기후변화의 원인은 그동안 인류가 추구해온 ‘산업화’ 때문입니다. 유한한 지구환경에서 무한한 성장이라는 게 불가능한 것인데, 지난 200~300년 동안 인류는 산업화를 통해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쓰레기’라는 악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했고, 거기서 발생한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인류가 추구해온 ‘산업화’, 그리고 그 산업화의 열매인 ‘성장’과 ‘풍요’는 이제 ‘득’이 아니라 ‘독’이 되어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구 생태계를 인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나 면허증’으로 착각하도록 잘못 가르쳐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긴 책임이 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이기에 앞서 ‘강도’였습니다. 지구 생태계와 인류를 거의 죽게 만든 ‘당사자’였습니다.
특히 선진국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그 책임이 막중합니다.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량으로 세계 7위국가입니다. 선진국인 우리나라가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개도국 국민, 또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칼을 들어야 강도가 아닙니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면 기후강도이고 기후악당입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지금까지 지구 생태계와 인류에게 기후 강도 역할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 칼에 자기도 베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가서, 너도 이처럼 하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실려있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율법교사와 예수님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25절)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절)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질문만 하지 말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이웃사랑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28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37절)」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사마리아인에 앞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옷이 벗겨졌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를 길에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 길로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스스로를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불행을 당해 죽어가는 사람이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안정적인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살도록 온힘을 다해서 도왔습니다. 그 자신이 주변인이었기에, 약자였기에 강도 만난 사람의 고통이 마치 자기 고통처럼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지금의 기후위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지구의 형편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죽을 게 뻔한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모두 다 ‘측은한 마음’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기후위기가 과연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며 살던 대로 사는 사람, 기후 위기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외면하고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구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뜨거워져 아픔을 호소하는 지구를 느낍니다. 그래서 그 곁에 있어 줍니다. 함께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고통을 낫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살리려고 애를 씁니다. 역부족인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지구 생태계와 인류가 기후 위기로 거의 죽게 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랬듯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달려가서 그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비상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후과학자들은 그것을 “거대한 가속에서, 담대한 전환으로(great acceleration, great transformation)”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인류는 반드시 ‘담대한 전환’을 이뤄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사라질 것입니다.」담대한 전환, 이것은 기존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지금 어떤 가치관을 지키고 있나요? 경제성장, 풍요와 발전이죠?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을 복과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담대한 전환’은 지금의 세상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만 대응이 가능합니다. 즉 미래의 기후는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세상을 만드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제성장이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환경도 망치고 공동체도 망치는 길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목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환경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는 그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단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세상으로의 담대한 전환입니다.
담대한 대전환, 나의 실천으로부터
지난 100년 사이 1.1℃로 올랐기 때문에 1.5℃까지는 이제 겨우 0.4℃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 동참한 우리나라는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지구온도가 1.5℃ 이상 더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감당할 몫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2029년까지 모든 석탄발전소를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신규 발전소(삼척, 강릉 등)가 지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왤까요? 지금처럼 에너지소비와 물질적 소비를 유지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에서 멈추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뀌지 않으면서, 나는 그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면서, 세상이 대전환을 이루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산업이 바뀌는 것은 절대적으로 소비형태가 바뀌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구매자가 없는데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소비형태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소비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소비는 미덕이라는 말이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소비하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는 세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오히려 버리며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참된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소비생활, 윤리적인 소비생활만으로도 우리는 탄소중립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세먼지가 많이 발생하고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그 원인의 원인을 보면 거기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매력과 중국의 탄소배출량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쓰레기의 고리, 이 악순환에 호흡을 불어넣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소비에 있습니다. 대량생산은 제한된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대량소비는 곧바로 대량쓰레기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쇼핑하러 쇼핑몰에 갑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이 있다 하더라도 훨씬 많이 구입합니다. 살 물건을 미리 정해서 쇼핑몰에 가는 사람은 전체 고객의 1/4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돈을 쓰기 위해서 쇼핑몰에 갑니다. 더 큰 것, 더 비싼 것이 더 좋은 것이 됩니다. 2+1, 1+1은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사게 만드는 뛰어난 상술입니다. “사면 살수록 이득이다”라는 광고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황금만능주의는 가장 중요한 이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6:24)고 하셨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동차와 휴대전화는 사용하자마자 ‘중고’가 되어버립니다. 끝없이 새로 나오는 신제품을 욕망하고, 그 욕망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감과 불만족을 느낍니다. 요즘 자동차 중고업체에 대한 TV광고가 많아졌죠? 누군가는 계속해서 새 차를 사는 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요즘은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도 몇 번씩이나 광고도 같이 봐야 합니다. 아니, 드라마 안에 PPL이 들어갑니다. 계속 사라고 부추깁니다. 소비중독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들인 물건들은 또 쉽게 버려집니다.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는 것 역시 버리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식품의 50%가 해마다 폐기됩니다. 가정마다 구입한 식품의 30~50%를 폐기합니다. 농산물이나 공산품이나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버릴지언정 정작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로 순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래된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시장가격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식량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올해 식품을 폐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남은 식품은 자선단체에 기부해야 합니다.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각자의 소비를 돌아보고, 멈출 것은 멈추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은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다음은 나의 소비경향에 대한 체크리스트입니다. 몇 개나 해당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출처:정토회, 환경실천 수행연습 체크리스트)
어떠세요? 몇 개나 해당되시나요? 체크하신 것 중 선택하여 개선해보고 소비를 줄여보는 연습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환경마크입니다. 물건을 구입하실 때, 이 표시가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기업들(367개)이 내년부터 ‘RE100’(100% 재생에너지사용)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 중 SK, LG, 현대자동차, 수자원공사 등 19개 회사가 참여하며, 삼성전자도 검토중이라고 합니다. 재생에너지 사용으로 지구를 지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며 가야 할 길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지구는 물론,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결국 죽음과 멸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지구와 지구에 살아가는 생태계를 눈으로 보면서도 오직 성장과 발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축적한 부만을 향해 자기 갈 길을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뒷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돌이켜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행하겠다고 결심할 때입니다. 담대한 대전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처럼 획기적인 일입니다. 죽어가는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고, 시간과 돈을 들이고, 끝까지 책임졌던 사마리아인의 실천에서 우리의 갈 길을 봅니다.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녹색교회
탄소중립이란, 배출한 탄소의 양만큼 흡수하고 제거하여 순수하게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2050년에는 0에 이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그것도 시급히, 아무리 늦어도 2050년까지는 반드시 완수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 실현 여부에 인류가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점에 다가가고 있는 이 비상한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9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일할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지구 생태계를 되살릴 녹색교회와 녹색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십니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면 창조세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나 하나쯤이야” 하는 방관적 태도가 아니라 “나부터”라는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가 녹색교회가 되고, 우리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녹색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담대한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하면 세계가 변합니다. 우리가 시작하면 세계가 따라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기후 위기로 인해 다 죽게 된 지구 생태계를 살려냅시다. 창조 세계를 다시 온전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합시다.」
자, 마지막 사진입니다. 붉은 지구, 인류가 ‘거대한 과속’으로 달려 이른 곳입니다. 이제 ‘담대한 대전환’으로 돌이킨 곳에 푸른 지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미래의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주어야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좋은 물건이 아닙니다. 물질로는 부족함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주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구 위의 모든 피조물은 새로운 인류-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18~19)
*이 설교는 정원진목사님(서울제일교회, 기장 생태공동체운동본부 공동대표, 기환연 공동대표)의 설교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녹색교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참고자료
존 드 그라프 외/박웅희 역, 『소비중독 바이러스 어플루엔자』(나무처럼, 2010)
이종규, “신규 석탄발전소 7곳 가동되면 온실가스 감축 노력 물거품 돼”(윤세종 ‘기후솔루션’ 변호사 인터뷰, 한겨레 2021.8.25.)
KBS1, [기후변화 특별기획 4부작 1부] “‘붉은지구’-엔드 게임 1.5℃”
_____, [이슈픽 쌤과 함께](85회) “극한 산불, 지구가 보내는 붉은 경고”(서울대 정수종 교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지구가 인간을 버릴 수도 있어요”(조천호 교수)
사피엔스 스튜디오, [환경 읽어드립니다] “기후위기, 거대한 가속에서 담대한 전환으로”(조천호 교수)
______________, [환경 읽어드립니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환경문제”(김상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