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회 목포연합회 지구회 인권예배 | 22.12.10(토)
슬픈 노래
애가 4:7~14
축구와 전쟁
지난 화요일 새벽 4시에 여러분 티비 앞에 계셨습니까?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16강 경기를 벌인 시간입니다. 결과는 4:1의 패였지만, 경기력 분석표를 보니 내용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더군요. 월드컵은 올림픽만큼이나 전세계인들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큰 스포츠 축제죠. 이기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둥근 공의 모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어디로든 구르며 누구와도 어우러지는 즐거움을 전세계인이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뜻깊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나라마다 축구에 붙은 별명들이 있어요.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은 ‘태극전사’라고 부릅니다. 독일축구는 전차군단이라고 하고, 스페인은 무적함대, 프랑스는 뢰블레군단, 우리가 조별 3차전에서 이긴 포로투갈은 다섯방패군단이에요. 이에 비해 남미쪽 축구팀 별명은 좀 다릅니다. 메시가 있는 아르헨티나는 탱고축구라고 하고 우리가 분패(?)한 브라질은 삼바축구라고 해요. 유난히 유럽의 대부분의 축구팀 별명에 ‘군단’ ‘부대’ 등의 군대용어가 붙어 있다는 걸 아실 거예요. 왜 그럴까요?
유럽에서는 오랜 역사 동안 지역, 종족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의 발발지도 유럽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전쟁과 축구가 공통적으로 ‘종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축구라는 한자만 봐도 그렇습니다. 축(蹴)는 ‘어떤 나라 성을 점령하려고 나아가다’는 뜻이고, 축구(蹴球)는 ‘둥근 공을 점령하기 위해 나아가다’라는 뜻입니다.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지금은 전쟁 대신 축구를 합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공잔치가 벌어진 지금도 지구 한 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하는 인류
지난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습했을 때, 그 전쟁은 빨리 마무리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만 우리가 놀랐다는 것이 어쩌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중동,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등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 한반도는 78년째 종전선언 없는 상태로 살아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류역사는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없이 오늘날 국가의 형태를 이룬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 예찬론자도 나옵니다. 전쟁을 통해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 의료 영역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은 지금도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발, 발전, 번영이 좋다고 해도 전쟁이 치뤄내야 하는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는데도 말입니다.
만군의 주(전쟁의 신)
그렇다면 성서는 전쟁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만군의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군은 ‘萬軍’으로서 많은 군대, 모든 군대를 뜻하며 성서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의 히브리어는 ‘츠바오트’로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별명이 ‘전쟁의 신’인 것이죠. 그렇다면 성서는 전쟁을 옹호하고 미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만군’은 오직 주 야훼에게만 국한하여 사용할 수 있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오직 주님의 것, 오직 주님의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즉 전쟁은 결단코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 이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부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자체가 전쟁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토착민들은 전쟁신 야훼의 이름에 덜덜 떨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400년간이나 무기력하게 이집트의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이 무슨 전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스라엘민족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만군의 하나님, 전쟁의 하나님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고백이 이스라엘의 역사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후로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이룩해 가는 과정에서 모든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일로 행해집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에도, 정복 후 블레셋과 끊임없는 싸움을 해나가야 했을 때도 그 전쟁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시기를 성서는 ‘사사시대’ 또는 ‘판관시대’라고 칭합니다. 약 200년간의 이 시기는 전쟁의 신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시기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기가 끝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을 때였습니다. 이제 왕은 백성의 자녀들을 데려다 자신이 벌일 전쟁의 수단으로 삼을 것입니다(삼상8:11~13).
굶기기 작전
그렇게 세워진 왕국은 결국 두 개의 왕국으로 갈라지고, 마침내 신흥 제국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당합니다. 북왕국의 사마리아성이나 남왕국의 예루살렘성은 천혜의 요새로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위치에 세워졌으며 이후 보강공사를 통해 더욱 튼튼히 세워졌지만, 적의 군사가 포위한 채 일체의 외부와 교류를 차단하게 한 봉쇄정책으로 참혹하게 파멸되어 갑니다. 북왕국도 남왕국도 3년간의 봉쇄를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왕하17:5, 렘52:4~5).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습니다. 굶주림은 인간성 대신 생존의 본능만을 일깨웠습니다. 열왕기하 6장 28~29절과 오늘 본문 애가 4장 10절은 북왕국과 남왕국의 자기 자식마저 잡아먹는 비참한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평소에 자비롭던 어머니가 광기에 사로잡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돌변합니다. 신명기 28장 56~57절은 인간성이 없어지고 잔인한 동물성만 남은 전쟁의 비극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둔 상태라 하겠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아무리 온순하고 고귀한 부녀자라도, 곧 평소에 호강하며 살아서 발에 흙을 묻히지 않던 여자라도, 굶게 되면 그 품의 남편과 자식을 외면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어린 자식을 몰래 잡아먹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원수가 당신들의 성읍을 포위하고, 당신들을 허기지게 하고,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게 하였기 때문입니다.(신28:56~57)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 의해 2년간 봉쇄됩니다. 당시의 비극을 노래한 동요의 한 구절입니다. 20세기의 애가입니다.
괴물이 걸어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는
바구니에 시체 엉덩이를 넣고 다녔다.
점심으로 인육을 먹을텐데
이 조각이면 충분해!
아... 배고픈 슬픔
그리고 저녁은 확실히
작은 아기가 필요할거야.
내가 이웃집 요람에서 훔쳐낼게.
슬픈 노래
애가는 ‘슬픈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책의 첫 번째 구절이 ‘슬프다’(1:1)로 시작하는데, 그 발음이 ‘에이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로 이 책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애가 중 굶주림이 가져오는 비극을 노래합니다. 오늘 본문을 전쟁,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굶주림이 가져온 비극의 탄식으로 읽으십시오.
전쟁은 아무리 고결하고 존귀한 사람도 가장 비참하게 만듭니다. 굶주림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인간의 가장 잔학함을 드러나게 만듭니다. 야훼 하나님의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삶의 모든 기초마저도 소멸시킵니다. 재건이 불가한 철저한 멸망입니다. 재앙의 얼굴로 돌변하는 풍요로운 먹거리를 주던 밭, 자애로운 어머니는 사실은 심판으로 돌아서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가장 자애로운 존재가 가장 잔혹한 존재가 되고, 가장 풍요로운 땅이 아무 소산도 내놓지 않습니다.
이 모든 재앙은 지도자들의 죄 때문인데, 예언자들의 죄는 백성을 경고하여 책망하지 않은 죄입니다. 제사장들의 죄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죄입니다. 지도자들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욕망에 눈이 멀었을 때, 의인들은 무고하게 살해됩니다. 눈먼 자가 된 그들에게 아무도 와서 묻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세상은 교회를 이렇게 대할 것입니다.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류가 겪은 잔인한 전쟁에는 오만하고 교만한 지도자가 존재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해가면서 “나는 위대하다”고 믿게 됩니다. 일본 역시 제국주의를 팽창해가면서 스스로를 ‘아시아의 용’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에게 생명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그저 자신의 야욕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총알 하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2022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지?” 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짓밟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 같은 게 일어날 리 없다고 믿었어.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91쪽) “예루살렘 성문으로 대적과 원수가 쳐들어갈 것이라고, 세상의 어느 왕이, 세상의 어느 민족이 믿었는가!”(애4:12) 전쟁은,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핵강국이며, 남에는 싸드와 같은 미군의 무기와 군대가 있다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어디까지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불러오고, 다른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명함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교만하며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자, 그리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중 하나인 ‘여자’는 그 이름이 ‘하와’입니다. 하와의 뜻은 생명입니다. 여자는 처음 생겨날 때부터 그 존재의 목적이 생명을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생명인 여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을 겪은 러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한 구절입니다.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9쪽)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를 보내며 여신도회 목포연합회 지구회로 모인 여러분, 그리스도는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로서 가장 낮은 장소로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임하신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우리가 부를 노래는 승전가가 아니라 애가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평화의 왕입니다.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며 부르는 애가, 슬픈 노래 속에 지금 예수께서 오고 계십니다. 모든 것의 시작인 어머니, 하와인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로 지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