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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양씨(濟州梁氏)
 
 
 
카페 게시글
선조들의 발자취 스크랩 학포 양팽손
양소유 추천 0 조회 478 07.08.30 15:3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학포 양팽손은
  조선시대 (朝鮮朝時代) 화가(畵家)의 신분(身分)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高麗)이래 궁정(宮廷)에 부설되어 있던 전문적(專門的) 화가양성기관(畵家養成機關)인 도화원(圖畵院) 출신의 화가(畵家)이며 다른 하나는 이른바 사대부계급(士大夫階級)에 속하는 여기문인화가(餘技文人畵家)이다.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該當)되는 화가(畵家)로서 조선(朝鮮) 중종(中宗) 연간에 활동(活動)한 화가로 알려지고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대단히 비천(卑賤)하게 여겨지던 시대(時代)에 대부분의 여기화가(餘技畵家)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작품을 많이 남긴 일이 없어 진적(眞蹟)으로 확인(確認)할 수 있는 작품(作品)이란 극히 드문 상태이다.  또한 화가(畵家)로서의 활동 역시 <중종실록(中宗實錄)>, <경산집(經山集)〉, <동국문헌화가집(東國文獻畵家集)>, <서도징(書畵徵)〉 등에 단 몇 줄 쓰여있는 정도여서 자세한 면모를 밝힐 길이 없다.

  그의 출생지(出生地)는 능주(綾州)이며 직장(直長) 사위(思渭)의 증손(曾孫)이고 이하(以河)의 아들로서 자(字)를 대춘(大春) 호(號)를 학포(學圃)라 하였다. 중종(中宗) 11년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은 이조정랑(吏曹正郞)등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일에 특출(特出)한 실력(實力)을 나타내어 신동(神童)이라 불러졌던 모양이어서 약관(弱冠) 13세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공부했고 나세찬(羅世纘). 송순(宋純)등과 동문(同門)으로서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수신(修身)을 게을리 하지 않아 덕망(德望)을 한몸에 모으는 큰 그릇으로 추앙 받아왔던 것 같다.  

  그는 또 중종(中宗) 을묘(乙卯) 10월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사림(士林)으로서 개혁정치를 시행하려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등이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처형당하자 몹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소(疏)를 올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도 당대의 많은 識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실망한 나머지 고향인 능주(綾州)로 가서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신세가 된다.

  지금 학포의 작품으로 유존(遺存)되고 알려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하고 있는 이산수도와 화순 월곡(月谷)의 후손가에 남아 있는 작품 1점이다. 일본(日本)의 암도(巖島) 대원사(大願寺)에 소장되어 있는 팔경산수도(八景山水圖)의 낙관(落款)없는 병풍그림 한 폭이 있어 우리와도 관계가 깊은 일본인 미술사학자 관야정(關野貞) 박사가 그의 저서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속에서 학포의 작품으로 단정 짓고 기록한 일이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임진난때에 저들이 가져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 그림을 보면

  원경(遠景)으로 화면(畵面) 윗 쪽에 세 봉우리가 준엄(峻嚴)하게 솟아 있어 세로의 수직(垂直) 길이가 강조되는 이 작품에서 공간의 높이가 한결 더 돋보인다. 깊이에 역점을 둔 중경(中景)에 있어서는 아슬한 단애(斷崖)위에 앉아 자연경관을 즐기는 선인(仙人)들을 정점(頂點)으로 배열했다. 산봉우리들이 한결같이 둥글한 구름처럼 겹쳐 올라가며 꾸불꾸불하게 전개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선은 굵고 가늘게 율동감(律動感)을 주며 오른편 가득히 여백의 맛을 두었다.

  수림(樹林)과 암반(巖盤)을 포치(布置)한 근경(近景)에서 나뭇가지는 게발처럼 날카롭게 뻗으며 비약(飛躍)하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 몇 채의 집과 정자(亭子)가 보이고 강상(江上)에는 조는 듯 한가로이 나룻배가 지나 간다.  朝鮮朝 初期의 그림 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화제(畫題)가 있는 외에 화풍(畫風)은 당대에 유행하던 공통된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화면 좌상부(左上部)에 적힌 글은 오언시(五言詩)이며 글 끝머리에「학포사(學圃寫)」라는 낙관이 묵으로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인문(印文)이 분명치 않은 방형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家住淸江上 晴窓日日開 護村林影匝 聾世瀨聲催 客棹隨潮泊 漁船捲釣廻 遙知臺上客 應爲看山來 江闊飛塵隔 灘喧俗語聾 漁舟莫來往 恐與世上通 』

그런데 글의 필력(筆力)이 그림의 화격(畵格)에 못미치는, 다소 품격(品格)이 떨어지는 필치여서 혹 후세 사람이 써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라는 사상에 젖어있던 당시에, 더구나 사인화가(士人畵家)였던 학포가 화(畵)에 앞서 능해야할 서(書)가 화(畵)에 못미친다는 것은 모순으로 볼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이다. 어떻든「학포(學圃)」라는 분명한 낙관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서, 조선조 초기의 회화양식(繪畵樣式)을 엿보게 하는 이 작품이 가지는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글: 金仁煥 〈美術評論家.朝鮮大學 敎授〉.   ▷學圃公十六代孫  東孝  謹製.  


▲제주양씨 학포공파 대종회(회장 양회석) 회장단 회의=16일(토) 오전11시 종회사무소 222-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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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08.30 17:06

    첫댓글 본문에 나오는 영정사진은.... 좌측이 문정공 정암 조광조(l482~1519), 우측이 부윤당 양소유의 15대조인 혜강공 학포 양팽손(l488 ~l545)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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