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정은 1618년 양인용이 지은 정자로 화순군 이양면에 위치하고 있다.
양인용은 조선 선조 때 종 4품의 벼슬(훈련원 첨정)을 지내신 분으로 광해군 때 당쟁으로 정계가 혼란해 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화순에 내려와 송석정에서 시문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첨정공 휘 인용은 부윤당 양소유의 12대 할아버지이다.)
송석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건물로 이곳에는 양인용을 비롯해 감창흡, 조희일, 정방, 안방준 등의 시가 있고 주위에는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조용한 정자 같지만 봄, 여름, 가을이면 화려함이 묻어나는 유원지로 변한다.
바로 앞의 강물은 그다지 깊지 않고 물고기가 많아 낚시를 즐길 수 있으며 가까운 곳에 참외와 수박 재배지가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다음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글(松石亭記)이다.
주선생이 취성정(聚星亭)을 짓고 칭찬하면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큰 길을 거닌다는 정을 말하고 이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로 탄식하는 말인데 후인을 깨우치고 분발케 함이 많기 때문이다.
송석정은 능주의 남쪽 20리경 용강 위에 있는 양씨의 선조 첨정공(僉正公)이 살던 곳이다.
어느날에 정자의 주인이 서신을 보내어 한 말 얻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백세의 뒤로 하여금 우리 선조께서 후손들을 넉넉히 하려는 뜻이 별도로 있는 데에 있고 다만 강산이나 정사의 흔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다만 아마 먼 후손이라도 가히 입적되어 구원에서 뵈어도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하니 내가 옷깃을 여미고 세 번 읽으며 감탄한 것이 오래 되었다.
대개 보통 사람의 인정이란 한 번 벼슬길을 걷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여 늙어 백수가 되어도 그만둘 줄 알지 못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일이다.
첨정공 같은 이는 그 세대를 상고해 본즉 벼슬하거나 사람을 택하는 것이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성한 때요
그 지벌인즉 바램이나 실상이 함께 융성한 유문고가(儒門故家)이니 진실로 진취코자 한다면 평소대로 걸어가도 현달하고 영화스러울 것은 차례대로 될터인데 유연히 벼슬을 버리고 한가하고 적막한 곳에 은거처를 정하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그 나이를 마치니 세상에 보기 드문 높은 지조가 있지 않으면 능히 그렇게 했겠는가
제물을 끼고 다듬어진 담장을 엄하게 지켜 그 장구할 것을 기약하는 자는 반드시 천지로 더불어 오래갈 것을 계획하고 오래간다 해도 잠간 사이에 엉크러진 나무가 나와 문을 막으니 흥하고 탄식함이 곳곳에 있으나 다 족히 말(斗)과 같다고 할 것이다.
작은 정자가 수백년이 지나도 썩지않고 무너지지 않아 의젓하게 높은 산 큰 내와 함께 오래간다는 것은 진실로 어진 자손이 뜻과 사업을 잘 이으지 않았거나 세속의 바쁜 경쟁에 떨어져 명성이나 이욕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가히 이와같이 할 것인가 처음 창건하고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 두가지 어려움을 겸해서 다한 이는 내가 양씨에게서 보겠다.
그같은 이름있는 정자는 실계가 풍연에 이르니 우산(牛山) 삼연(三淵) 선생 이하로 우열을 판정한 글이 거의 집안에 가득하니 기를 짓는데는 별일이 없다.
주인의 돈독한 행실과 고상한 의지는 능히 가문의 명성을 이을 것이니 곧 첨정공의 10대손인데 그 이름은 익환益煥이다.<계사년 9월 월성 최익현(月城 崔益鉉) 근기>
松石亭記
朱先生作聚星亭 贊極道其高山景行之情 而繼之以嗣守之難 古今共歎之語 所以警發後人者深矣 松石亭 在綾城治南二十里 龍江之上 梁氏先祖 僉正公○ ○也 一日亭之主人馳書 謂願得一言 使百世之後 知吾祖裕後之意 別有所在而 非只爲江山臺○之迹而己 則只○雲仍可籍手拜於九原 而無憾矣 余○○三復感 歎者久之 夫常人之情 一涉宦海 便營營汲汲 老百首不知止者 古今一轍 若僉正公 考其世則爲官 擇人之宣仁盛際 以其地則望賓俱隆之儒門 故家苟欲進取 平步顯榮 乃次弟事也 顧脩然遠擧 考槃優遊於寬閑寂寞 以卒其年者 非有曠世 高操而能然乎 世之席勢 挾○峻守雕墻期長久者 未必不與天壤計壽而壽 而須臾之間 灌芥生之雍門 興歎在在 皆足今如斗 小亭歷傳數百年 不虧不崩 依然與高山大川 同其悠遠者 苟非賢子孫 善述志事 不墮俗奔競而爲聲利所搖奪 又可如是乎 創始守成二難兼幷 余於梁氏見之 若其名亭故實界至風烟 牛山三淵諸先生以下題品 殆充盈棟宇 無事於記也 主人敦行尙志 克紹家聲 卽僉正十世孫 其名益煥.<崇禎二百六十六年 癸巳菊秋 月城 崔益鉉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