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운포 재홍在鴻의 자는 우경이요, 선조의 근원은
탐라인이시다. 우리 조선 중종조에 경연학사 혜강공 학포선생은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올랐고 구봉 위남은 정묘호란에 의거지적義擧之蹟이 있는데 그 8세손
길묵의 아들이 재홍인바 품성이 강항하고 외유심직外遊心直하여 7세에 가정에서 수학하고 점점 자라서 족내의 화은 재해공에게 사사받아 대의에
통달하였다.
홍능연대 경술년(1910) 공의 나이 23세에 일본 적도들이 본국 적신과 더불어 군주를 협박하여 합방을 체결하니
팔방에서 의사가 군웅들을 끌어들여 광복을 꾀하니 호남인 모사자들의 중의衆議에 의하여 단주團主가 되시어 집에 돌아와 백여석의 가산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하고 사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적들은 변방 국경지대까지 별처럼 흩어져 있던 광복단원光復團員들을 체포하거나 살육하며 가혹하고 치밀하게
문초하였다.
운포공이 10여년 계획했던 사실과 기밀이 누설되어 드러나게되어 1918년 5월에 일 헌병에 체포결박 당하여 광주
경무서로 끌려가니 부父께서 일병을 꾸짖으며 재홍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조문석사朝聞夕死라도 공사에 비견하라 하셨다.
경무서에서 적들의
공갈협박이 자심하나 공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가로되 너희들은 비록 견양犬羊의 무리라 군신의 대의를 알지 못할 것이나 너희는 우리 대한인의
불공대천의 원수라 군신의 대의는 화이華夷가 다를바 아니나 충군애국지인을 너희는 어찌 범죄자로 하느냐 천하의 공의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느냐 내
장차 쾌검이도快劒利刀로 너희들을 도륙하여 우리나라의 국치를 모두 설욕하지 못하고 반대로 너희들에게 체포되니 이는 나의 졸모拙謀로 인함이니 가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구나 하시며 크게 절규하며 꾸짖고 입을 다물었다.
적장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의기의 사람은 실로 내가 처음
본다고 하면서 이에 따라 대담하게 중한 벌로 정해야한다고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나 공은 이에 맹세코 옥중에서 죽더라도 억누름으로 인하여 꺽이거나
유여하지 않았다. 혹 구타를 당하여 옷에 피가 흐른즉 무엄한 옥리들을 질책하였다.
밤낮으로 소순과 맹자를 읽어 백배로 용기를 더하고
손에는 항상 책을 가졌다. 이와같은 폐쇠가 10년에 이르러 무진년(1928년) 5월에 감재가율(집행유예)로 방출되었다.
부득이
사방을 경영하고 비로소 돌아와서는 충심으로 아버지를 봉양하고 배전으로 더욱 효도하였으나 잡혀가던 다음 해인 기미년(1919)에 어머니 문씨가
돌아가셨으나 부득이 달려오지 못하여 절의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전에 펴지 못함을 후에는 조난(부친상)을 당해서는 극진히 거상을 치르니 사람들이
착함을 일컬었다.
삼년상을 다한 날에야 중용과 대학을 송독하고 꽃피는 아름다운 절기에는 고구와 친척들과 시를 지으며 술을 권하면서
호탕하게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며 서술할 때는 울분강개의 마음을 품고 혹 술을 폭음함에 목을 놓아 부르짖기를 이 왜가 언제 망할 것인가 하시며
마음이 쓸쓸하고 구슬픈 심정으로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천고에 평등치 못한 기운을 만났음이라 하였다.
갑신년(1944) 8월 23일에
통한을 머금고 종명하시니 향년 57세였다. 일년만 빌릴 수 있었다면 원수들이 물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건만 그러지 못할 장부의 운명인저.
임종시에 아우 재만을 불러 가로되 백인백인百忍百忍이여 참을 인忍자 한 자를 마음에 두어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죽을 것이나 우리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선조의 사적史蹟을 기술함이 너에게 있다 하시며 또 가로되 밭갈고 글 읽는 선비들이 공인工人과 상인商人을 섬기고 공상工商은 의義로써
섬기면 이로움이 되는 것이요 이로움으로 이끗만 챙기면 곧 불의不義니라 하였다.
공이 약관에 특별한 허물없이 용맹한 사람이며 체구는
작으나 목소리는 우렁차고 두상頭狀은 둥글고 눈은 쏘는 것 같았으며 의로움에는 용맹스러웠고 자신에게는 명확했고 기류氣類를 스스로 길렀으나 세상에
처음 나갈 때 얻지 못한즉 가도家道를 세우고자 의義와 이利를 밝혀 분명히 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굳건한 말씀과 인내심으로 성품의 과단함이 이와
같았다.
외사外史씨 가로되 우리 조선은 어질고 의로움으로 갑옷과 투구를 삼고 충성과 믿음으로 오백년 동안에 호남은 문서나 재물을
넣어두는 부고(府庫,곳간)가 되었고 우리 양문(양씨 문중)은 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0세에 걸쳐 충효의 문중으로 병오
정미(1906-1907)간에 화은과 행사 재남으로 선후가 이어졌다면(화은과 행사, 재남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이다) 운포는 약관에
10년을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가세에 큰 짐이 되게하지 않았고 의로운 바람은 비록 능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을 위함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열렬하고 그 절의가 곧으니 보는 사람들이 어찌 가히 성패를 논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