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조용헌 살롱에 접빈객(接賓客)에 대한 다음 설명이 나온다.
양반 집안에서 챙기던 2대 업무는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다. 제사 지내는 일과 손님 접대하는 일은 양반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이었다. 조선시대 상류층 집안에서 접빈객에 대해 이처럼 비중을 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평판 때문이다. 학문을 하고, 돈도 있고, 신분도 양반인 집안이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고약한 평판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손님들에게 후하게 베풀어야 좋은 평판을 들을 것 아닌가. 좋은 평판을 듣고 산다는 것도 행복한 삶의 한 조건에 들어간다. 둘째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적선을 많이 해 놓으면 시일이 언제가 됐든지 간에 반드시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후손들을 위해서 보험에 드는 일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정보수집이다. 신문과 방송이 없던 시절에는 마땅히 정보수집이 어려웠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과객들이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과객들을 접대하다 보면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접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재력이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는 사랑채를 지어놓고 여기서 손님접대를 하였다. 물론 손님이 몇 달을 머물든지 간에 접대비는 받지 않았다.
cf.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888.html
부윤당의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부윤당 집안에도 이러한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이 강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사랑방은 늘 손님으로 붐볐고, 특히나 보부상을 가장한 손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이 바로 경향각지의 소식을 전해주는 광복단의 비밀단원이었다고 한다. 왜경의 감시를 피해 접빈객(接賓客)을 가장하여 할아버지께서는 이들을 은밀히 접촉했던 것이다.
부윤당 집안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한 때 가세가 많이 기울었었지만, 인물은 여전히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할아버지의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었다.
부윤당의 할아버지가 광복단장으로 건국훈장을 서훈받은 후에 그 밑의 단원이었던, 정동근·김교락·문재교·김영하·고성후 등도 잇달아 건국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분들의 공적은 부윤당의 아버님께서 할아버지의 판결문을 찾아내어, 판결문에 나오는 일제 강점기 때의 주소로 광복단원들의 후손들을 하나씩 찾아가 수소문하고 연락이 닿는대로 자료를 전해주어, 국가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하게하여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손이 없어 대가 끊어졌고, 어떤 분은 양자를 들였고, 어떤 분은 일제 강점기 때의 주소로 찾으려고 하니 그 후손들이 어디서 사는 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어떤 분은 부윤당의 아버님이 포상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는데, 보훈연금을 후손 중 누가 받느냐의 문제로 다툼이 있어 집안이 갈라져 깨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윤당은 수년 전 우연히 참석한 어떤 모임에서, 할아버지와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던 김영하의 손자를 만나서 앞으로 친하게 지내기로 약조한 바 있다. 또한, 때가 되면 할아버지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들의 후손들을 만나 서로 사귀어 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능주(綾州) 쌍봉촌에서 거의하여 쌍산의진(雙山義陣)을 결성, 호남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양회일은 부윤당 문중 사람인데, 그분의 참모로 활동한 임상영의 증손이자 종손이 바로 부윤당과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임을 최근에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는데, 훌륭한 선조를 두신 집안의 모든 후손들이 역경을 헤치고 잘 되었으면 좋겠고, 그들과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