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정치인이 ‘순교자 마음으로 정치하겠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순교라는 단어가 쉽게 사용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순교라는 현상을 존경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존경하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에베소서 4장 15절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라.’는 말씀은 거부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예수님이니까 가능하고 나는 저렇게 못한다며 예수를 더욱 높이 추앙한다.
역사에서는 이런 관점을 영웅사관이라 표현한다.
오늘날 순교가 가진 맥락을 새롭게 풀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면서도
더불어 순교자를 너무 추앙하면서 그의 삶을 우리에게 들이지 않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하는 삶을 잘 본받으면서도
그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존 그의 삶을 평가하는 해석은
타협하지 않는 보수신앙으로 삶 전체가 순교지향으로 맞추어져 있다고 했지만
누군가의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원-자료로 볼 때는
보수신앙으로 보기엔 ‘여자해방’이라는 논문을 쓴 것과
다른 논문에서도 근본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교파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엿보였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의 증언에 의하면
마지막 검속당하는 장면에서 아버지가 두려워서
도망쳐서 사랑방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보며,
‘모든 꽃들은 흔들리며 피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순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양심’과 ‘사랑’이라고 정리하며
‘양심’과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들었다.
어릴 적, 스스로를 소시오패스(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아닐까 고민했다.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 해도,
어쩌면 감정의 신호를 잘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계산이 빨라 평범한 사람보다 오히려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연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양심이란 사람이 느끼는 정서경험에서 얻는 가치나
건강한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는 능력,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사랑할 줄 아는 능력,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이라 보았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소시오패스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성공한 사람들 중에 다수가 그들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어떻게 이 사회에서 이토록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너져버린 공동체(한몸살이) 삶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양심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리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가 한몸살이로 더불어 사랑하는 삶을 배워나간다면
서로를 위해 순교하는 삶이 일상화되지 않을까.
첫댓글 순교적 삶을 영웅화/특수화 하지 않고 한몸되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가야할 길로 보았군요.
저는 보수신학 배경에서 자라 영웅적 주기철에 대한 상이 있었는데 이번 강의가 좋은 계기가 되었어요. 주기철의 인간적면을 보았고 그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을 입는 비결이구나 했지요.(약할때 강함되시네) 그는 순교를 지향한 적이 없었고 그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 져버릴 수 없었고 그길의 끝이 순교가 되었던 것 같아요. 아~ 하나님 사랑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싶어라!
후기 잘 읽었습니다. ^^!
일상적인 순교적 삶이이라는 것에 공감해요. 그렇게 일상을 살아야겠죠. 아자자!